[Opinion] 알쏭달쏭한 시 세계에 빠져보기 [도서]

"내게 시는 낙서로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아 시인의 『로라와 로라』 읽기
글 입력 2020.04.01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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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아 시인은 1978년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아주대 경영학부를 졸업했다. 2010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8년 만에 낸 첫 시집이 바로 『로라와 로라』이다.

 


“내게 시는 낙서로부터 시작되었다. 수신인이 부재한 채 놓인 어린 언어들, 완결된 문장이 아니라 열려 있는 채 성립되며 이내 부서지는 낙서. 고개를 들고 말하는 일보다 고개를 숙이고 말을 닫는 일로 현기증을 앓는다. 그것이 불가해한 세계에 대한 나의 유일한 정직이었을까."


- 《세계의 문학》 신인상 수상소감 중에서.



로라와 로라.jpg

 

로라와 로라. 혀가 굴러가는 발음이 재미있는 제목이다. 제목부터 수수께끼 같은 이 시집을 덮으면 떠오르는 단어들이 몇 개 있다. 세잔과 사과, 테이블과 모서리, 서랍과 빈칸. 그러면 시집을 다시 펼치게 된다. 시집에 흩어져있는 이 단어들을 한 데 모으고 싶어서.


시집 안에서 앞서 나온 사과와 뒤늦게 나온 사과는 시집을 읽는 머릿속에서 굴러다니며 서로의 의미를 보충해준다. 앞의 사과는 뒤의 사과 덕분에 조금 다른 의미로 읽히기도 했다. 표제작 「로라와 로라」에서 단어가 모습을 계속해서 바꾸어가며 서술되는 것처럼 시집의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시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로라가 아닌 로라처럼’ 시가 흘러간다.


특히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세잔의 사과와 같은 회화적 모티프는 주목할 만하다. ‘드로잉’이나 ‘토르소’같은 시어에서 시인의 미술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었다. 또한 「방문객」이나 「소유자」 같은 시에서는 말과 문장에 대한 시인의 복잡한, 마치 ‘낙서’같은 생각이 보이기도 한다.




정물화 도둑



봉제선은 말끔할 때조차 기괴하다.

이브의 매끄러운 옆구리에서 사과가 쏟아진다.


떨어지는 순간, 사과는

사과를 뱉어 내는 사과처럼

뱀이 된다.


뒤죽박죽이야 세계는.

붓으로 뱀을 그리는 어린 세잔의 이목구비는 아직 가지런하다.


캔버스 위에 붙였다 떼었다 한다.

한 개 혹은 여러 개의 사과로 질문인 얼굴을 완성할 수 있어?

사과 꼭지를 도려내는 칼끝처럼 날카로운 모서리들


밤은 머리가 많은 뱀처럼 베개가 부족해.

불행을 조제하는 테이블에서

알약들의 테두리를 애무하며

밤의 넓은 목구멍을 바라본다.


베어 문 사과처럼

손등만이 남아 있는 시간


사과의 반쪽은 사과가 도달한 옆얼굴인가.

부족한 손등은 시간의 완전한 테두리인가.


절반의 사과는 보다 짙은 냄새

한 개는 부족하고 반쪽은 충분해.

못된 쌍둥이처럼


이상하다고 되뇌게 되는 물체

목소리처럼 이빨 자국이 찍힌다.


점점 좁아지는 사각형 위에 팔을 괴고

얼굴을 모은다, 툭

떨어트리기 좋게


혀는 입안에 젖은 융단처럼 깔려 있다.

이빨은 가장자리로 밀려난다.


탁자 위에는 파이기 쉬운 사과 한 알

알겠다는 듯

모르겠는 얼굴로

아이가 남겨 둔 


*

 

사과가 그려진 정물화를 보듯이 찬찬히 시를 읽었다. 사과는 다른 시에서도 계속해서 등장한다. 다른 시에서 사과는 “파란 사과”(「복화술사」)였다가, “마녀의 손안에서 반짝이는 예쁜 사과”(「방문객」)였다가, 용서를 비는 사과가 되기도 한다. 「정물화 도둑」에서도 사과는 선악과였다가, 세잔의 사과가 되기도 한다.


처음 읽었을 때, 이 시의 사과는 나에게 ‘세잔의 사과’였다. 그러나 시집을 처음부터 다시 읽기 시작했을 때는 (아마도 다른 시들의 영향을 받아서) 사과를 ‘용서의 사과’로 읽고 있었다.



세잔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1895~1900년경) c오르세미술관.jpg
폴 세잔, 사과와 오렌지가 있는 정물(1895~1900) 오르세미술관

 

 

세잔은 진정한 사과를 그리기 위해 계속해서 그렸다. 사과를 보고, 그리고, 또 보고, 또 덧칠하며 변화되는 시선을 종합해 진정한 ‘사과’를 그렸다. 그것은 보이는 그대로의 사과가 아니라 우리가 떠올리는 사과의 단순화된, 단단한 ‘구(球)’ 모습이었다. 세잔에게 중요한 것은 경험의 감각이었고 그것은 이 시에서도 동일해 보인다.


첫 문장이 강렬하다. 매끄럽게 한다고 해도 떨어진 것을 이어붙였다고 증명하는 봉제선은 그 자체로 기괴하다는 말로 시작하는 시는 상처와 용서에 대해 말하는 듯 보인다. 세계는 뒤죽박죽이라고 말하는 어린 세잔의 말에서는 상처받은 화자가 겹쳐 보였다. 무언가를 붙였다 떼었다 하기도 하고 묻는다. 사과로 얼굴을 완성할 수 있느냐고. 그리고 날카로운 모서리는 사과 꼭지를 도려낸다.


수수께끼 같은 말이 연속되는 시이고(그건 다른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 의미를 쉽사리 알아차리기 어렵다. 아마 난 아직 시를, 시집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상처받은 마음에는 목소리처럼 이빨 자국이 찍히고, 상처를 준 혀는 아직도 입 안에 융단처럼 자리 잡고 있다.


 

 

소유자


 

당신은 몇 개의 허용을 가졌습니까 당신은 발아래를 바라봅니까 내장의 안쪽을 봅니까 양옆의 문장을 바라봅니까


나는 나를 너라고 부르던 순간부터 같은 테이블에 앉아 둘의, 셋의, 넷의……, 아무래도 좋을 낙서를 합니다 일인칭과 이인칭과 비인칭을 초과하여 테이블의 확장을……


악몽 속에서 세계는 간결합니다 말줄임표처럼 고요하고 말줄임표처럼 풍부합니다 악몽 속에서 세계는 가지처럼 조용한 식탁을 차리고 목 아래부터 자화상을 시작합니다


한 국자씩 나누어 담을 접시가 필요합니다 한 국자씩 떼어 놓을……


케이크에 박은 양초처럼 불타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거리에는 언제나 축하할 것이 남아 있는 기분입니다 양 갈래로 그늘을 묶고 눈을 깜박이는 아이들, 아이들은 거리의 활용을 발명합니다


냄새에 사로잡혀 물을 휘젓는 물고기들, 물고기도 물에 익사합니까 끝은 무정형의 장르입니까 하지만 너무 비좁지 않습니까 끝이라는 단어는


산 물고기처럼 죽은 물고기처럼 문장은 문장을 마주 보지 않습니다 언어로만 존재하는 것들을 오래 생각했습니다 언어가 잊은 것들을요……


*


시는 테이블을 확장한다. 테이블은 시인에게 놀이를 발명하는 곳이며(「등을 맞대고 소녀소녀」) 밀도가 듬성하고(「우리들의 테이블」) 뗏목처럼 흐르는 것(「오필리아」)을 발명하거나, “불행을 조제”(「정물화 도둑」)하는 곳이다. 테이블은 많은 일이 일어난다. 그것은 마치 시인이 테이블 앞에 앉아 시를 쓰는 모습 같다. 아무래도 좋을 낙서가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테이블은 확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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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악몽 속의 세계는 말줄임표처럼 간결하다. “내가 깨어나는 세계는 서랍의 형식을 하고 있다”(「빈칸의 경험」)고 말하는 것처럼, 말줄임표의 그 간극만큼, 세상의 빈칸은 채워지지 않는다. 동시에 세계는 「정물화 도둑」에서 세계를 뒤죽박죽이라고 하는 것처럼 풍부하다. 시 전체가 꿈속의 세계를 희미하게 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시를 다 읽고 다시 첫 문장을 읽었다. 나는 몇 개의 허용을 가졌을까. “왜 모든 말들을 마구간에 가둬야 하지”(「방문객」)라는 시인의 의문처럼, 이 물음은 확장하고 싶은, 수많은 허용을 가지고 싶은 마음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은 언어를 오랫동안 생각했다고 말하며 끝맺는다. 시인이 언어가 잊은 것들을 소유하게 된, 어떤 ‘허용’을 소유하게 된 ‘소유자’가 아닐까.

 


사과가 빠져나가고 있는 화판 속에

문장이 느리게 회전시켜 보는 여름 속에

엎드린 등이 창궐하는 자정 속에

거듭 지연되는 아름다울 이야기 속에서

어둠으로부터 탈구된

사과의 운동이


- 「세잔, 아무 데서나 잠을 잔다」 중에서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입술 앞에 대고 묻는다. “우리가 빠트린 것을 말해 볼래”(「등을 맞대고 소녀소녀」)라고.


세잔에게 사과가 있었듯이, 시인에게는 문장이, 언어가 있었다. 마치 낙서처럼, 닿으려는 곳이 불분명하면서 계속되는 드로잉과 글자는 한편의 그림이 되고 한 편의 시가 된다. 수수께끼 같고 꿈같고 환상적인 세계는 그 자체로도 아름답고 흥미롭다.


우리가 빠트리고 잊은 언어를 꿈에서 찾으며, 우리 빠트린 생각을 환상에서 찾는 것 같다. 알쏭달쏭한 심지아 시인의 시 세계 속에서 , “이곳의 밀도는 듬성하”(「우리들의 테이블」)지만, 우리들의 빈칸이 조금은 넓어지길 바란다.


 

[진수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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