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내가 여행 에세이를 읽는 이유 [도서]

책 「나만 위로할 것」을 읽고
글 입력 2020.03.25 2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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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책장 속에 있던 책 한 권을 꺼냈다. 많고 많은 책 중에 여행 에세이를 집어 들었다는 건 내가 조금, 어쩌면 많이 지쳐 가고 있다는 증거인 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일상, 무료한 시간들, 미소를 잃은 표정만이 가득한 하루하루를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었지만, 현실에 부딪혀 시도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좌절감이 오고야 만다. 그래도 어떻게든 떠나고 싶었다. 나의 숨통을 트여줄 무언가가 필요했고, 나는 두 발로 걷는 여행 대신 두 눈으로 읽는 여행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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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나만 위로할 것」은 저자 생선(저자의 필명이다.)이 아이슬란드를 여행하며 보낸 두 달의 여름과 세 달의 겨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생선은 이름만 들어도 추운 아이슬란드를 여유와 낭만으로 따뜻하게 녹여내기도, 외로움과 암울함으로 꽁꽁 얼어붙게도 만들었다. 흔히들 하는 말로 단짠단짠이라고나 할까.


책에는 생선 혼자만의 생각, 그가 만난 사람들과의 이야기, 그가 담은 사진들이 담겨 있는데 그중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몇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다.




북유럽 숲의 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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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북유럽 숲에 살고 있다는 요정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요정이 아니었다. 초록색 연기가 까만 숲 위에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건 처음에는 희미한 빛이었지만 이내 그 빛은 서서히 하늘 위로 퍼져가더니 결국에는 까만 밤하늘을 반으로 가로질렀다.


생선은 오로라를 북유럽 숲의 요정으로 표현했다. 처음엔 귀엽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나는 요정과 웅장함을 뽐내는 오로라가 과연 같은 말로 표현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지만, 생선이 찍은 오로라 사진을 보고 있자면 비행기가 지나간 자리에 비행운이 생기듯 마치 요정의 흔적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지구가 아닌 무한한 우주의 공간 속에 홀로 남겨진 것 같기도, 밤하늘에 마법 약을 흩뿌려 놓은 것 같기도 했다.


사진 한 장으로도 이렇게 많은 감정과 상상력이 동반되는데, 실제로 본다면 얼마나 경이로울지 감히 상상할 수 없다. 아마 나도 생선처럼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지어본 적 없는 표정으로 오로라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침묵할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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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사투파는 당신에게 침묵할 공간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 문장에 매혹되어 나는 이메일을 보내 3일간 그곳에서 지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나는 침묵할 공간을 찾아, 비사투파에 가게 된 거였다.


비사투파는 호스텔이다. 하루에도 몇 번씩 눈보라가 몰아치고, 밤새 쌓인 눈을 치우지 않으면 방이 어둠에 갇히는 세상의 끝과도 같은 곳이다. 여기에 말할 상대라곤 한 명도 찾아볼 수 없다는 점까지 더해지면 침묵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 완성된다. 이 고독한 곳에서 생선은 지금까지 지니고 다녔던 것들은 흰 눈 위에 놓아두고, 느긋하게 쉬며 12일을 보냈다.


생선이 떠나는 날, 야네는 그에게 침묵하는 방법을 배웠냐고 물었다. 생선은 침묵을 ‘그동안 살아오면서 어쩔 수 없이 너무 열어 둔 마음의 문을 잠깐 동안 닫아두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지만, 한 번에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침묵이란 남을 향해 있던 나의 모든 신경을 거두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이라는 뜻처럼 들렸다. 단순히 말을 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넘어 고요함, 평온함, 때로는 외로움과 고독함까지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시간을 갖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기도 했다.


비사투파가 침묵의 공간을 제공하는 것뿐만 아니라 침묵 속에서 나 자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을 깨닫게 하는 시간 또한 제공한다는 점을 통해 생선이 이곳의 매력에 빠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시 우리의 세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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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스는 보여줄 게 있다며 자작나무 숲으로 날 데리고 갔다. 거기에는 꽤 큰 뿔을 가진 북극 사슴 한 마리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은 정화를 거친 듯 더 푸르렀다. 사슴을 사냥하는 것도 아닌 그냥 단지 사슴을 보고 싶어서 이 깊숙한 숲속으로 눈을 헤치고 오다니……. 그가 보러 오는 것은 천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그는 이제 돌아가자고 했다. 다시 우리의 세상으로……. 나는 아쉬웠지만 그는 충분히 충전을 마친 듯했다.


우르스와 생선은 자작나무 사이를 걸으며 대화를 나눴다. 나이가 들수록 옛날에 있었던 일들이 너무나도 또렷이 생각난다는 우르스와 자주 중요한 것을 잊곤 한다는 생선의 대화에서 우르스는 중요한 거라면 잊은 것이 아니라 경험한 기억들 사이에 파묻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냥 자연스러운 시간을 가지면 어느 날 마법처럼 모든 게 생각날 거라는 말과 함께.


‘자연스러운 시간을 가져라.’


이 한 문장이 참 위로가 됐다. 미래만 보며 조급하게 살아가는 나에게 여유를 가지며 한가로운 삶을 사는 것도 필요하다고, 또 그 여유 속에서 잊고 있던 중요한 것은 없나 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일흔 인생의 관록이 느껴지는 우르스의 말이 나를 따뜻하게 안아주는 듯했다.


이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는 숲속의 사슴을 봤다는 사실에 집중하느라 둘의 대화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읽고서야 숲의 마지막에 있는 사슴이 아닌, 숲으로 가는 동안 나눈 둘의 대화가 마음에 닿았다.


나는 그들이 걸었던 숲이 우리의 인생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슴을 보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 숲으로 향하는 것, 그 과정에서 두 친구가 만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는 것, 목적을 이룬 후에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새로운 목적을 꿈꾸는 것이 인생이라는 그림과 닮아 있는 듯했다.


아직 아쉬움이 남은 생선과 충분히 충전을 마친 우르스의 모습 또한, 살아온 인생보다 살아갈 인생이 더 많은 서른의 청년과 살아온 인생의 시간이 차곡차곡 쌓인 일흔 노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짧은 대화였지만 인생의 깊이를 생각하게 한 대목이라 여러 번 읽으며 내용을 곱씹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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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모두 특별하다는 거다. 우리가 일상에서 아예 접하지 못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종류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도 충분히 접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소소한 이야기가 쌓여 특별함을 만들어낸 것이다.

 

*

 

나는 일상의 반대말은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을 하는 동안은 날씨가 좋지 않아도,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져도 하루하루가 특별하다. 여행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말이다. 일상에서 예민하게 굴었던 사소한 문제가 여행 중에는 별 것 아닌 게 되는 것처럼 하루하루를 여행하는 것처럼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삶이 따분한 것 같을 때, 내가 유독 예민한 것 같을 때, 나도 나를 모르겠을 때 여행 에세이를 읽을 것을 추천한다. 여행은 추억을 남기는 것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알아가는 방법을 제시한다. 작가가 여행 중 겪은 경험과 생각에 공감하기도, 반감을 느끼기도 하면서 내가 어떤 여행을 선호하는지, 어떤 분위기를 좋아하며,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다. 한 권의 책이 그동안의 답답했던 날들에 숨을 불어 넣어 주고, 예민했던 나를 둥글게 만져주고, 나라는 질문지에 정답을 체크할 수 있는 확신을 준다.

 

지쳐 있던 내가 여행 에세이를 읽고 다시 활력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여행 에세이를, 또 이 글을 읽은 당신과 나 모두 소소한 일상의 이야기를 쌓아 여행을 하는 듯한 특별한 하루하루를 보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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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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