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살아 움직이는 눈: 우리 눈이 두개이어야만 하는 이유 [사람]

글 입력 2020.03.14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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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후 석탄발전소 한 달간 가동 중단... 충남 미세먼지 농도 고작 1.1% 감소”

 

<조선일보> 2017년 7월 26일자

 

“노후 석탄화력 ‘셧다운’ 한 달... 미세먼지 최대 14% 줄었다”

 

<한겨레> 2017년 7월 25일자

 

위에 제시된 두 신문사의 헤드라인은 몇 년 전, 논란이었던 미세먼지 저감과 관련된 정책의 효과를 나타내고 있다. 당시 탈석탄 정책의 일환인 화력 석탄소의 일시 셧다운에 관하여 <조선일보>와 <한겨레>는 동일한 데이터를 토대로 상반된 해석을 하였다. 결국 조선일보 독자와 한겨레의 독자는 하나의 현상이 다르게 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렇게 정치나 사회 뉴스처럼 과학을 소재로 하고 있는 뉴스도 타협이 어려운 상반된 입장에서 각자의 입장만 고수하기 때문에 갈등과 대립이 불가피하다. 참고로, 과학도 객관적일 것이라고 여겨지곤 한다. 특히 과학 연구결과의 수치는 마치 고정된 사실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숫자는 맥락에 따라 충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언론사는 자신들의 주장에 맞추어 데이터를 해석할 수 있는데, 설득력을 얻기 위해서 자신의 의견에 동의하는 취재원을 선별하기도 한다. 양쪽 입장을 다 고려하는 ‘합리적’인 판단을 위해 한겨레 신문과 조선일보 신문을 동시에 보는 것이 좋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고 번거로운 일일 수 있다.

 

이와 같이 한 가지 현상을 단편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본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앞선 예시처럼 하나의 사안을 다양한 입장에서 입체적으로 보기 어려울 것이다. 다양한 입장, 즉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입장을 고려할 수는 없겠지만, 하나의 현상을 적어도 두 가지 관점에서는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탈원전 문제는 보기처럼 마냥 쉽지 만이 않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도 한 가지 성격으로 재단할 수 없다. 소심해 보이는 사람이 때로는 과감한 결정을 내리곤 한다. 권위적인 상사는 집에서는 지극히 가정적이고 순종적이게 변하기도 한다. 또한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감독상, 국제장편영화상, 그리고 각본상을 거머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속 인물들도 선악의 이분법으로 명확하게 구별이 안 되는 입체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우리가 사람을 알아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면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 눈도 두 개가 있지 않는가? 사실 한 눈을 가리고 앞을 봐도 사물이 보인다. 그러나 두 개가 있어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크기변환]movie parasite.jpg

 


생물학적으로, 우리 눈이 앞을 입체적이고 원근감 있게 보려면 하나 갖고는 부족하다. 양쪽 눈으로 앞을 보게 되면 약 120도 시야가 겹쳐 보기 때문에 입체와 거리를 인지할 수 있다. 우리의 뇌는 양쪽 눈을 통해 각각 들어온 이미지를 시신경을 통해 뇌 뒷부분의 제1차 시각피질로 전달되어 잘 합쳐서 하나로 보게 해주는 융합기능이 있다.


 

[크기변환]perspect.jpg

 

 

1960년대에 고양이를 대상으로 한쪽 눈의 눈꺼풀을 꿰매 앞을 못 보게 만든 동물실험이 있었다. 세월이 지난 후, 실밥을 풀었지만 꿰맸던 쪽의 눈은 정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시력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뇌를 살펴보니 특이 사항이 발견되었다. 꿰맸던 눈의 정보를 처리해야 할 뇌 영역이 일정 시기 작동 안할 경우 그곳으로 ‘정상’ 눈의 정보를 처리하는 회로가 침범하면서 영역을 확장했던 것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안 보게 되면 진짜 보지 못하도록 뇌 회로가 변경될 수 있다.


이 실험을 진행한 미국 하버드 의과대학의 데이비드 허블과 토르스톤 위젤 교수는 시각정보가 뇌에 어떻게 처리되는지 연구한 공로로 1981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살면서 너무 오랫동안 한쪽 시각만 바라본다면 다른 쪽의 관점을 누군가 제시하더라도 못 보게 되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는 한쪽 시각만 볼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다른 쪽의 시각도 파악하고 배워야 할 것이다.

 

최근에 또 다시 나는 동일한 날에 두 매체를 비교해보았다. 헤드라인만 봐도 입장은 상이하다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다.

 

탈석탄·탈원전에 매출 급감한 두산중공업, 일부 휴업 검토

 

<조선일보> 2020년 3월 11일

 

후쿠시마 원전사고 9주기…환경단체 등 “탈핵” 촉구

 

<한겨레> 2020년 3월 11일

 

탈원전으로 누군가는 피해를 입지만 누군가에겐 기쁨이 된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입장을 정하고 주장하는 ‘답정너’가 되기보다는 양쪽 의견을 모두 들어보고 천천히 생각해봐야할 것이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보수 성향이든, 진보 성향이든 모두 우리나라를 위한 마음이 있다는 것. 즉, ‘국가의 안녕’이라는 공통된 목적이 있다. 실제 우리 눈도 일반적으로 양쪽 모두 같은 곳을 바라본다. 만일 두 눈이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본다면, 뇌로 서로 다른 정보를 전달해 뇌는 결국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갈등을 줄이고 화합을 위해서 우리는 두 눈의 협동으로 입체적이고 현명하게 볼 수 있는 혜안을 기르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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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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