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소유하지 않는 사랑 [도서]

라이너 마리아 릴케 - 「소유하지 않는 사랑」
글 입력 2020.03.13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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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에 인용한 시들이 전부 정식 번역본은 아닙니다.

제 입맛에 맞게 변용한 곳이 있으니, 정식 번역본은 책을 참고해주시길 바랍니다.

 


 

사랑이 네게로 어떻게 왔는가?

햇살처럼 모았는가,

꽃눈밭처럼 왔는가,

기도처럼 왔는가?

말하렴

 

 

하늘에서

행복이 반짝이며 내려와

커다랗게 날개를 접고

피어나는 나의 영혼에 매달렸습니다…

 

- '꿈의 왕관을 쓰고' 中

 

 

 

 


들어가며


 

소유하지-않는-사랑 (1).jpg

소유하지 않는 사랑 : 릴케의 가장 아름다운 시 

 라이너 마리아 릴케 ; 김재혁 옮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 선집,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접하였습니다.

 

내게 릴케는 윤동주를 통해 소개받고, 편지글을 통해 닿은 서양의 시인입니다. (지난 글 참고)

즉, 시로 먼저 닿은 시인이 아닌 편지로 닿은 시인이라는 말입니다.

그의 서편이 준 감동은, 너무도 자연히 나를 그의 시로 인도하였습니다.

어쩌면 그의 서편에 담긴 시인 자신 영혼의 대화는 시 속에 가장 농밀하게 들어있을 테니까요.

그러한 추상적인 깊은 내면의 정수는, 시라는 완전히 자유로운 영역 속에서나 더욱 본 모습에 가깝게 드러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달리 말하여 볼까요.

내면에서 일어난 추상의 대화는, 다른 이에게 설명하기 위해서 보편 문법이라는 규칙에 맞게 가공되어야만 한다면, 변형이 일어난 것이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설득력을 갖추기 위해서, 또한 전달력을 갖추기 위해서, 모든 다른 이를 향하는 글은 가공처리 된 결과물이 됩니다. 글 이전의 생각은 가공을 통해서야 다른 이에게 쏘아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쓰는 이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글 이전의 생각으로 말씀드리자면, 내 안은 이해하기도 따라가기도 어려운 무정형의 춤사위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직감이나 영감이라 불리는 기원을 알 수 없는 날 것들이 날아다니고, 내 이지가 그를 쫓아다니며 논리를 입힙니다. 유치원에 등원시키기 위해, 알몸으로 뛰어다니는 아이를 붙잡아 옷을 입히는 장면이 연상됩니다.

 

시가 무엇이라고, 나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어쩌면 시는 이 무정형의 대화를 그대로 묘사해낼 수도 있을 법한, 자유로운 비유로 가득 찬 캔버스라고 생각합니다. 

시에서만은 ‘설명’이 적어도 괜찮으니까요.

 

위에 소개해 드린 책은 릴케의 모든 시들 중, 역자가 아름답다 여긴 것을 간추린 시 선집입니다.

워낙 많은 시를 쓴 대시인인지라, 따로 찾아보는 것이 막연하게 느껴지는 참에 다행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책을 한 번 훑어 읽고는

제목인 ‘소유하지 않는 사랑’. 이를 주제로 하여 시집을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그러나 시집 안에는 사랑뿐 아니라 너무 많은 것들로 가득 차 있었음에,

한 번에 여러 가지를 묶어낼 수 없는 내 인식의 한계는 잠시 길을 잃었습니다.

시집 안에는 정말이지 너무 많은 사유의 정수들이 담기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소유하지 않는 사랑’,

이 단어를 듣는 것만으로도 벌써 무언가가,

아직은 잘 알지 못하겠으나 무언가가 이 안에 응어리지고 있단 직감으로 떠오릅니다.

열매의 예감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릴케의 콘셉트는 ‘사랑’과 ‘고독’입니다.

릴케의 고독에 대한 제 생각은 지난 글에 담아두었고,

이번 글에는 그의 사랑에 대한 제 짧은 생각을 풀어볼까 합니다.

그러나 읽다가 읽다가 보면, 이 두 상관없는 듯 뵈는 개념이 자꾸 제 안에서 어우러지려고 하는 것을 또한 봅니다.

 

 

 

나의 사랑함


 

시를 읽기 위하여, 심장의 고동을 늦추어야 함을 깨닫습니다.

 

희망이 부르는 고조된 흥분, 기운차고 충만한 의지에 멀어버린 눈 위로 시가 부딪혀 돌아감을 봅니다.

눈결을 타고 흐르다간 조용히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때에 나는 글자를 스치곤, 곧 그를 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본 것이겠습니까?

 

이내 나는 귀에 감도는 모든 소리를 지워버리곤,

한없이 조용한 곳으로 나를 이끌어봅니다.

 

적요한 환경 속으로 가서는

영혼이 그 적요함을 분명히 호흡하여 머금는 때까지 기다려 보았습니다.

완전히 젖어 그를 느끼도록, 자아가 그 감각의 속에 아주 처하도록 기다립니다.

 

이제 심장은 고요하고, 호흡도 거의 들리지 않고, 눈가에 나도 몰랐던 미소마저 걷히고 나면,

시는 그제야 나더러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이제야 이야기를 들리어주는 것입니다.  

드디어 나의 모습은 경청하는 눈으로 짐짓, 그를 마주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에 빠진 여인

 

 

이것은 나의 창문.

나는 방금 살포시 잠에서 깨어납니다.

두둥실 떠도는 듯했어요.

나의 인생은 어디까지 미치고,

밤은 어디서 시작되는지요?

 

나는 생각합니다,

주위의 모든 것은 아직 나 자신 같다고;

수정의 심연처럼 투명하기도

또 어둡기도 하고 말이 없어요.

 

나는 내 가슴에 별들을 담을 수도 있어요;

내 가슴은 그렇게 크다고 생각되거든요;

 

그러나

내가 사랑하기 시작하여  

붙잡아 둘지도 모를 그 사람을

나의 가슴은 기꺼이 놓아줍니다.

아무 것도 쓰여진 적이 없어 낯선 듯

나의 운명은 나를 바라봅니다.

 

무엇 때문에 나는 이렇듯

끝없음 아래 놓여 있는 건가요,

초원처럼 향기를 풍기며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소리치면서,

또 누군가 그 소리를 들을까 두려워하는가요,

 

나는 다른 사람의 가슴속에서

몰락하도록 운명지어졌나 봅니다.

 

 - '신시집' 제2권 中

 

 

재미있는 시입니다. 나는 시에서 어떤 퍼즐을 찾는 때 재미를 느끼는가 봅니다.

시의 시작에서부터 수수께끼를 겪습니다. 첫 단어인 ‘이것’이 칭하는 대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모든 행이 하나의 문맥을 이룬다는 전제 하에서,

글의 흐름을 충분히 이해하고 납득할 수 있게끔 배면에 숨겨진 또 다른 맥락들을 찾아내는 일은 어렵고도 즐겁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원관념이 모호한 비유에다가 자신이 생각하기로서니 꼭 맞는 무언가를 대입하면서 나아가는 하나의 탐색이고, 가정과 검증입니다.

시인이 시 전체에다가 분위기를 조성해 놓고 빈칸을 마련해두면, 독자는 그 안에다가 자신의 삶의 파편을 끼워 넣으며 나의 의미를 만듭니다. 그리곤 그 퍼즐을 나의 시로 만듭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이것’에 무언가를 넣어 적어낼 자신이 없습니다.

저 빈 공간에 꼭 맞는 무언가 삶을, 나는 아직 가지고 있지 않다고 강렬히 느끼기 때문입니다.

내겐 지금 사랑의 꿈만이 가득하고, 떠올릴 어떤 사랑의 모습은 비어 있어서 그런 것일까요.

사랑이란 추상적인 단어를 볼 때 떠올릴 어떤 실제의 체험, 내 사랑의 낯은 오래도록 비어 있습니다.

 

사랑의 실루엣만이 희미하고, 그 표정은 모호하니 흐려 있습니다. 표정이 비어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는 여인의 모습을 그리어내며, 그녀가 내뱉은 저 첫마디의 말 뒤에 있을 어떤 심정을 상상해봅니다만, 그려지지 않습니다.

 

 

Photo by Sasha Freemind on Unsplash.jpg

 

 

무척이나 사랑했던 사람은 있습니다.

꽤 귀한 기억과 추억을, 나는 그 얼굴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 얼굴은 꽤 길다고 말할 법한 시간을 지나고서도

이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 이목구비의 얌전함과 배경이 되는 얼굴형의 탁월함들이.

그녀는 표정들을 지워내도 아름다울, 잘 형성된 마네킹의 얼굴형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얼굴형의 위로 비로소 그 사람이 표정을 지으면,

무언가는 살아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내 안에서, 그녀가 그 옛날의 미소를 그리면, 무언가는 살아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다음으로 내 상상이 나아가기엔, 그다음을 내가 일찍이 겪은 적이 없는 탓입니다.

엇비슷하게 빌려다 올 그 어떤 경험도 내 안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렇듯, 내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뿐,

사랑에 빠진 여인의 얼굴을 가지고 있진 못한 것입니다.

나는 나의 사랑함만을 가지고 있을 뿐, 너의 사랑함을 갖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그 두 파편의 입을 맞추어야, 비로소 ‘사랑’이 될 것입니다.

그때에야 ‘나 어떤 사랑을 알고 있지’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 시의 공란에 나는 자신 있게, 그것이 착각일지언정, 무언가를 끼워 넣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저 여인이, 어떠한 이유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놓아주는지를 알 수가 없고,

그녀의 운명이 낯선 눈빛으로 그녀 스스로를 바라보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나는 저 여인의 사랑을 알 수가 없어, 오늘

내가 꿈꾸는 사랑만을 이야기할 수 있겠습니다.

오랜 사랑에 빠져 있는, 나의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열렬히 사랑하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서양의 시인들이 신화적 상상력으로 자신의 앞에 놓인 어떤 놀라운 것을 바라보고, 신화적 모티프로 그를 묘사하듯이, 나는 그녀를 본 적 없는 동양화의 화폭에다가 담았습니다. 빛바래 누런 종이 안에, 색만은 영원처럼 빛날 듯 찬란하게 채색되었습니다.

 

 

board-painted-portrait-955001_640.jpg

아무리 찾아도 내 심상 속의 그림과 엇비슷한 그림은 찾을 수 없다.

이런 때는 그림을 배워볼까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다.

 

 

그리곤, 너무 강렬한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으로부터 나를 멀게 함을 체험했습니다.

매일 그 사람을 볼 시간이 다가올 때마다 떠오르는 감당 못 할 초조함은,

사실 가진바 모든 나약함과 어리석음과 어리숙함과 못난 모습의 집체임을,

나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얼마나 작은이었던지를 여실히 알게 하는 이 사랑의 빛이란,

지금의 내게 너무 찬란했던 것입니다.

나는 그 빛이 나를 쬐어 옴에, 자라나는 그림자인 못난 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결국에 나는 그 사랑을 갖지 못했습니다.

불길한 바람과 같이, 다가감을 영원처럼 서성이다가

결국에 그녀는 나의 궤도에서 멀어졌습니다.

당연한 아픔이 찾아옵니다.

나는 온 계절을 모두 스쳐 지났는데도, 아직 그 속에 있습니다. 

 

 

언젠가 이처럼 가장 오래된 고통들이 우리에게

열매로 맺지 않을까? 지금은 우리가 사랑하며

연인에게서 벗어나, 벗어남을 떨며 견딜 때가 아닌가?

발사의 순간에 온 힘을 모아 자신보다 더 큰 존재가 되기 위해

화살이 시위를 견디듯이. 머무름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 '두이노의 비가 ; 제1 비가' 中

 

 

머무름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아직 머리로만 알겠습니다.

그 사실을 확인할 만큼의 시간이 내게 아직 없었기 때문입니다.

확신을 갖게끔 하는 근거인 어떤 체험이, 아직 내게 적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아직 너무 젊기 때문입니다.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소서,

이틀만 더 남국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진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맬 것입니다.

 

 -  '형상시집' 中

 

  

Photo by Asai Hatomi on Unsplash.jpg

 

 

나는 이 시 위로 지나버린 계절을 떠올립니다.

큰 고통을 선물한 내 지난 계절은, 한편으로는 생에 얼마 없을 위대한 경험을 주었습니다.

나는 마치 처음으로 사랑함을 맛본 듯합니다.

여태의 경험들을 아득히 초월하는 빛을 보아, 그래서 나는 조금 아팠습니다.

 

이젠 운명을 관장하는 나의 신께서, 내 생의 다음 장이자 다음 계절을 펼치시어

마음의 들녘에 바람을 풀어놓아 주시었으면 합니다.

여름의 끝자락을 이틀만큼만 더 베푸시어,

내 안의 생채기 위로 터져 나오는 검붉은 액체에 어떤 성숙함을 스미게 하시길.

 

아니, 현재의 눈으로는 끝없어 뵐 나의 계절은 포도주가 익을 만큼만 지속되길.

영원한 머무름이 없다는 것은, 아직은 머리로만 알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끝이 날 이 계절을 믿어보려 애를 쓰는 중입니다.

포도주가 익을 만큼만 지속되기를 빕니다.

그것도 아니면, 나를 어여삐 여기실 신께서 주시는, 포도주가 익어가는 시간이라 믿기로 애써봅니다.

 

나는 그동안, 그리고 그다음 계절의 한동안까지

과일이 익고 낙엽이 흩날리는 때까지도 아마

헤매고 있을 것입니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는 집을 짓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의 한동안까지

그렇게 홀로 오래 남아, 헤맬 것입니다.

 

겨울이 오고, 다음 봄 즈음에는 어떨는지요.

다음 여름에는 아마 달라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포도주는 조금이나마 익었을 터입니다.

 

 

내 본질의 어두운 시간을 나는 사랑합니다,

이 시간이면 나의 감각은 깊어지니까요,

마치 오래된 편지에서 느끼는 것처럼

이때 나는 지나온 나날의 삶의 모습을

저만치 전설처럼 아득하게 바라봅니다.

 

어두운 시간은 내게 알려줍니다,

또 다른 삶에 이르는

시간을 넘어선 드넓은 공간이 내게 있음을.

 

그리고 어쩌다 나는 한 그루 나무와 같습니다

묘지 위에 자라나 바람결에 가지를 흔들며,

죽어간 소년이 슬픔과 노래 속에서 잃었던

그 꿈을

이루어 주던 나무와 같습니다.

 

-  기도시집; 제1부 `수도사 생활의 서` 中

 

 

시를 읽기 위하여 심장의 고동을 늦추어야 했듯,

영혼을 무르익게 하기 위하여, 나는 심장의 고동을 늦추어야 함을 느낍니다.

 

시가 영혼의 깊은 곳이 던지는 언어라면,

나는 시를 보던 것처럼 영혼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아니, 영혼을 보는 것처럼 시를 보는 것이라 함이 옳겠습니다.

초조한 마음 아주 아니, 고조된 마음도 아니, 기쁜 마음조차 아니.

고요한 박동의 너머로야 들리는, 조용하디 조용히 울리는 목소리들을 우리는 압니다. 

 

나는 이 계절을 지나

신이 마련하신 어두운 시간에 드디어 안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신은 아무도 아닙니다. 그 신은 인과율 그 자체입니다.

 

나의 명랑한 때에 닿을 수가 없었던, 

그러나 영혼의 포도주를 위해서 인간이 반드시 처해야만 하는 이 어두운 시간까지의 인과인 것입니다.

이 어두운 시간에 닿기 위한 인과인 것입니다.

내게 신은 그러므로 운명입니다. 또한, 숙명입니다.

모든 일어나지 않은 내일까지 모조리 알고 있는, 운명이고

지나고 나서 볼 때에야 알 수 있는, 모든 우연 속에 깃들어 있는 인과인 숙명입니다.  

내가 신을 믿는다 함은, 이러한 운명과 숙명에 대한 믿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내 감각은 깊어집니다.

망막이 볼 수 있는 세계가 어둠에 가리고서야 눈을 감고

영혼이 있는 깊은 곳 어둠으로 들어갑니다.

이 위에 지난날들이 전설처럼 아득히 영사되고,

깊은 감각이 나의 이 작은 세계 위로 또한 인과를 부여해 나아가다 보면,

일찍이 경험한 바 없는 삶, 시간을 넘어서는 공간에 도착합니다.

 

영혼의 익어감, 포도주의 비유는

다만 이런 것들에 대한 먼 비유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나는 내 안에 세계 하나를 만들고,

아무런 말도 없이 나의 언어는 익어가는 것입니다.

 

사랑이 기꺼이 축복의 비유가 되는 까닭은 이 글의 흐름과 닮아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랑에서 출발해 나는 시와 신을 지나, 영혼의 나무에 도착하였습니다.


 

서시

 

 

네가 누구라도, 저녁이면

네 눈에 익은 것들로 들어찬 방에서 나와 보라.

먼 곳을 배경으로 너의 집은

마지막 집인 듯 고즈넉하다,

 

네가 누구라도,

지칠 대로 지쳐, 닳고 닳은 문지방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너의 두 눈으로

아주 천천히 너는 한 그루 검은 나무를 일으켜

하늘에다 세운다 :

쭉 뻗은 고독한 모습.

 

그리하여

너는 세계 하나를 만들었나니, 그 세계는 크고,

침묵 속에서도 익어가는 한마디 말과 같다.

 

그리고 네 의지가 그 세계의 뜻을 파악하면,

너의 두 눈은 그 세계를 살며시 풀어준다……

 

- '형상시집' 中

 

 

 

소유하지 않는 사랑


 

그래서, 소유하지 않는 사랑은 무얼까,

나는 충분히 깊은 곳까지 들어온 다음에야 이 질문을 다시 상기시켜 봅니다.

이에, 나는 두 가지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

이 단어가 가지는 의아한 직감이 스쳐 지나치려는 눈길 위로도 능히 붙잡힙니다. 

아니, 이 의아한 단어가 스치려는 내 무심한 눈을 꽉 붙잡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영혼은 이미 떠올리고 있는 것이겠습니다. 

이 의아함이 가리키는 단어의 피안 너머, 내 사랑하던 모습들을. 

사랑하여 집착하게 되면, 언제나 그 집착을 괴로워하던 영혼이 답 잃어 헤매던 모습들을.

 

소유하지 않는 사랑.

사랑이 너무도 강한 빛이라 또한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면, 이 어둠은 집착일 것입니다.

집착은 소유에 대한 욕심의 다른 이름일 것이고 말입니다. 사랑하면, 가지고 싶어집니다.

 

 

Photo by Anish Kumar on Unsplash.jpg

 

 

나는 사랑함으로 집착을 갖게 됩니다.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마찬가지인 듯합니다. 어둠을 비밀리에 간직하지 않은 빛을 나는 본 적이 없습니다.

손 닿을 곳에 있는 사랑을 한없이 바라보려고만 하는 마음을, 나는 여태 본 적이 없습니다. 

아직 만나지 못한 따름입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이를 굳게 믿기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나의 사랑함은 언제나, 상대를 향해 발산되기 위해 나의 대지를 걷어차는 아우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나는 그를 계속 붙잡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붙잡는 것은 다만 작은 두려움에 불과하고요.

 

집착하는 스스로가 괴로워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사랑엔 까닭이 없는 것일 테니까요. 

정말이지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음은 그를 향하고 그리어도, 차라리 눈 돌리는 것만이 우리의 의지가 할 수 있는 전부가 아니었습니까? 한편 이런 때에 우리는 만나지 않고도 그를 보고 있지 않았습니까?

 

마음은 까닭도 모르게 발생한 사랑의 감정을 타고, 누군가 주신 듯 까닭 모를 내 감정을 타고 흐르는 배. 감정이 흘러가는 데로 따릅니다. 

사랑은 한동안 커가고 있을 겁니다. 집착은 이 한없이 자애로우신 사랑의 낯에 숨기어진, 찡그린 표정입니다. 

 

두 가지 집착이 떠오릅니다.

하나는 연인에 대함이고

다른 하나는 아직 이어지지 않은 사랑에 대함입니다.

 

즉, 하나는 이미 가까운 상대를 더욱 가깝게 하고자 하는 욕심이고,

다른 하나는 닿지 못했기에 더욱 커가는 욕망입니다.

둘은 다른 듯 닮았습니다.


‘사랑이 이렇듯 의지의 권역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사랑의 다른 이름인 집착도 마찬가지인 것일까.’

 

나는 이를 물어보기 위해 사랑함의 주체인 깊은 내게로 들어갑니다.

시를 느낄 수 있는 정도로까지 나를 멈춥니다.

 

그러자 누군가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래서 너는 아직 어리거나 젊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사랑을 타고 마음은 흘러라, 그러나 동시에 집착은 맞서야 한다.’

 

이것이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너무도 마땅한 이야기라면… 

이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때가 사랑에 있어서 성숙된 영혼의 시기이고, 

이 이야기를 능히 할 수 있는 어떤 얼굴이 진정 사랑할 수 있는 자의 모습이라고 말해옵니다. 

나는 그 흠모할만한 얼굴을 그려봅니다.

  

‘집착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 또한 마찬가지로 의지의 권역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니까 마음이란 것이 시키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이유로 그에 맞서기를 애써야만 한다.

 

그것이 어려움에도 마땅함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된다 해서 그를 쉽게 체념함이란 당당한 모습이 아님을 너 안다면.

 

그러므로 이는 어려운 마땅함이고,

이 어려운 마땅함을 대하고자 하는 혼자만의 고요한 투쟁은 아름다움이 된다.

 

그것은 분명 오랜 투쟁일 것이다.

언제까지 대결하면 나는 그를 이겨낼 수 있는가를, 대결의 끝에 나는 그를 이겨낼 수나 있는지를,

우리 중 그 누구도 미리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행해야 하는 이 마땅한 투쟁을 겪어야 한다.

그런 중에 너는 아름다워지고,

그런 중에 너는 성숙해지고,

그런 어느 미래에 너는 조금 성인에 가까워 있다.

아름다운 고통을 가져야 한다.‘

 

내 속에 갈무리된 어떤 성숙한 영혼, 어느 시인의 말씀이 이렇습니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

사랑이 부르는 집착은 능히 손안에 거머쥐고, 오로지 사랑만을 살 수 있는 모습은 아름다울 것입니다.

이는 마음을 소유하는 것인 때문입니다. 

훈련된 의지가 너끈히도 마음을 조율하는 모습인 때문입니다.

최고의 충동인 사랑마저 거머쥐는, 전능한 손아귀의 주인이 되는 것인 때문입니다.

그런 때에 인간은 스스로 참 주인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이러한 모습을 두고 우리는 흠모하게 되는 것이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훈련해야 합니다.

훈련을 위해서 나는 영혼을 들어야 합니다.

내 세계로 들어가야겠습니다.

 

아직 미약하고 쉽사리 두려움에 빠져 전율하고, 또한 쉽사리 탈진하여 나자빠지는,

그런 이유로 구석에 웅크려 있는 영혼의 민낯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아직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며,

이게 될 성이나 싶으냐는 의심증에 빠진 그를 타일러야 합니다.

작게 지속되는 울림에도 쉽사리 공명하는, 이 영혼의 가벼움에 무게를 달아야 합니다.

 

이 무게의 추는 무엇이 될 수 있을는지,

젊은 나는 생각 중에 있습니다.

생의 경험과 고난의 체험이 그것일지

혹은 내적인 대결이 주는 위대함과 숭고함이 그것일지.

 

그리고 이런 대화를 시도하는 때,

고요한 박동이 틔운 내 눈동자의 낯은

어디인가 모르게 고독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쓸쓸한 사람의, 눈빛 속에서 익어가는 영혼은 눈 감고 밤의 하늘을 우러러 있을 것입니다.

그 익어가는 영혼의 뒤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인 ‘소유하지 않고도 익어가는 사랑’을 사는 내 아름다운 모습이 그려지고 있습니다.

 

 

그대는 폭풍의 커가는 것을 보았지만,

폭풍의 위력에도 놀라지 않는다.

나무들은 도망친다. 도망치는 모습이 마치

걸어가는 듯 가로수길을 만들어 놓는다.

그대는 안다, 그들이 도망치는 상대가

곧 그대가 향해가는 그 존재라는 것을.

그리고 창가에 서면

그대의 감각은 그를 노래한다.

 

그 여름의 몇 주는 조용히 멎어 있었다.

나무들의 피는 솟아올랐으니,

이제 그대는 느낀다, 떨어지려 함을

모든 것을 행하는 존재를 향해.

열매를 손에 넣었을 때 그대는

그 힘을 인식했다고 믿었다.

이제 그 힘이 다시 수수께끼가 되었으니,

그대는 다시 나그네.

 

여름은 그대의 집과 같아,

거기엔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제 평원으로 들어서듯이

그대 가슴속으로 나아가야 한다.

위대한 고독이 시작되고,

일상은 무감각해진다.

바람이 그대의 감각으로부터

속세를 마치 시든 나뭇잎처럼 날려버린다.

 

그대 감각의 앙상한 가지 사이로

그대 가슴속의 하늘이 보인다.

이제 신에 적합한 대지와 저녁 노래,

그리고 땅이 되어다오.

이제 하나의 사물처럼 겸손하여,

진정한 존재로 익어가다오,

그대에게 기별을 주었던 그 존재가

손을 내밀면, 그대를 느낄 수 있도록.

 

-  기도시집 제2부, '순례의 서' 일부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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