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포스트 문예지의 조용한 변주 [도서]

글 입력 2020.03.08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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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의 변화와 함께 찾아오는 것은 많다. 공기 냄새가 변하고, 길거리 음식의 온도가 달라지며, 소매가 길어졌다가 짧아진다. 새로운 표지를 입은 계간지가 서가에 진열되기 시작한다. 계간지 중에서도 구석 서가에 꽂히는 유독 두꺼운 책들이 있다.


문예지. 《문학과 사회》, 《창비》가 가장 대표적인 문예지로, 흔히 ‘벽돌’이라는 비유가 따라붙는 이 잡지에는 출판사가 청탁한 혹은 국내 등단 제도에 의해 선정된 작가들의 시, 소설, 평론이 빼곡히 담겨 있다. 혹시 문예지를 펼쳐본 경험이 있다면 누구나 알 것이다. 이 책을 통독하는 일은 작품의 밀도만큼이나 어렵다는 것을. 1980년대 혁명적인 캠퍼스 생활을 보냈던 이들에게 문예지는 탐독해야 할 필수품이자 활발한 담론장이었다.


최근 이 시기의 노래와 패션이 ‘뉴트로’, ‘탑골’이라는 수식어를 얻어 다시금 주류 문화의 궤도에 오르고 있는 반면, 문예지는 밀레니얼 세대로부터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문예지는 고루하고 고리타분하다는 고정 관념을 보란 듯이 타파하려는 실험적인 기류가 문학의 장 곳곳에서 포착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차세대 문예지는 탄생했다.

 

 

 

Literature X Fashion 《Motif》 (이하 모티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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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다시서점

  

 

우리는 한국 특유의 입시 제도 아래서, 오랜 시간 문학을 배워왔다. 올바른 선지를 골라 정답을 맞히기 위해선, 함부로 감상할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그렇게 체득된 읽기 습관은 미성년자를 벗어난 이후에도, 문학 텍스트를 대할 때마다 자신을 끊임없이 검열하도록 했다.


이를 지켜보던 문학 레이블 ‘공전’은 한마디를 던진다. “책뿐 아니라 문학에 대한 편견들을 깨고 싶어요. ‘이런 것도 문학이네?’ ‘개나 소나 할 수 있는 문학’이라는 생각이 들게요” 이렇게 탄생한 모티프의 독보적인 특징은 바로 문학 작품과 패션 화보의 접점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이데아를 추구하다 보니 어려워져버린 감상을 도와줄 보조 장치로 이미지를 선택한 것이다. 물론 주객의 경계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았다. 너무 구체적인 오브제를 택했다가는 오히려 발상의 자유를 훼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은 문보영 시인의 <빵>을 시각적으로 재해석하면서, 진짜 빵을 오브제로 사용하는 대신 빵을 의미하는 수어를 모델의 손동작으로 담아냈다. 이들의 개방적인 시도는 많은 대중이 문학을 적극적으로 소비하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함부로 문학을 정의하려는 여타 권력들에 대한 저항이었다. 텍스트중심주의 속에서 어느덧 그것이 본질인 양 경직되어가는 문학을 타개하고자 했다. 문학은 패션을 포함한, 그 무엇도 될 수 있었다.

 

 

 

책은 우리 안에 얼어붙은 바다를 깨야한다, 《Axt》 (이하 악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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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xt는 ‘도끼’를 뜻하는 독일어 명사다. 폐쇄적인 문단 내부의 권력구조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이를 견제할 수 있는 존재, 옳고 그름을 판별할 수 있는 존재가 필요했다. 유일한 것이 대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짧은 정보와 감정을 직접적으로 전달해주는 스크린의 영역으로 넘어간 지 오래였다.


대중과 문학이 이룰 수 있는 가장 큰 교집합은 소설이라는 판단하에 악스트는 소설 전문 문예지로 거듭났다. 붓글씨로 쓴 대문짝만한 잡지 이름이나 기하학적인 도형 대신 소설가의 얼굴을 표지에 실었다. 소설 역시 나와 같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것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암시라도 하는 듯이. 기성 문예지처럼 장편 소설을 연재하기도 하고 평론을 싣기도 하지만, 그 전제 조건은 폭넓은 시각에서 소설에 접근하는 것이었다.


문학의 영역에만 고여 있지 않고 과학, 심리학 등 여러 학문에서 소설을 분석하며 해석의 지평을 넓혔다. 문학은 문학 전공자의 눈길에만 번쩍 뜨이는 것이 아니라 공학, 행정학 전공자의 눈에도 여전히 읽고 싶고, 만지고 싶어야 하기에 말이다. 악스트 편집부는 냉정히 말하면 문학에는 아무런 힘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다만 존재하며 모닥불처럼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 그것이 문학의 힘이라고 덧붙인다. 그렇기에 악스트는 문학의 온기가 보다 많은 사람의 마음에 가닿기를 바라며, 담담하게 그 불길을 막는 방해물들을 정리할 뿐이다.

 

 

 

쓰는 존재 읽는 생활, 《Littor》 (이하 릿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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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는 2015년, 40년 동안 발행하던 계간 《세계의 문학》을 폐간했다. 한국 문학계에 후기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소개했던 행보를 보건대 과연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릿터’는 명사 Literature(문학)와 접미사 -tor(-하는 사람)를 합성한 조어로, ‘문학 하는 사람’을 의미한다.


문학하는 사람에 내포될 수 있는 범주는 참 넓다. 등단하지 못한 작가. 뭐든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 SNS에 자기만의 짧을 글을 올리는 사람. 이름의 스펙트럼으로 미루어 알 수 있듯 릿터는 고인다면 썩을 수밖에 없는 문단 내의 권력을 본래 문학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는 ‘읽는 사람 쓰는 존재’들에게 분배하고자 했다.


문단 내부와 전혀 관계없을 듯한 아이돌, 배우들의 인터뷰가 매번 실린다는 사실은 릿터의 의도를 여실히 드러내는 페이지다. 원더걸스 혜림의 『안네의 일기』, 배우 강한나의 『갈매기』 등 지극히 사적인 독서 경험을 조명하며 문학은 등단한 작가만의 것이 아님을 암묵적으로 시사하고자 했다.


그렇게 명백히 현재에 속하여 사는 존재들과 마주하려면 가장 ‘지금의’ 쟁점을 회피하지 않아야 했다. 계절의 이름을 선택하는 대신 ‘비거니즘’, ‘노키즈?’, ‘여성-서사’ 등으로 커버 기획을 선정하고 짝수달에 한 번씩, 더 자주 독자를 만나기로 했다. 그렇게 책을 읽는 아이돌, 기사를 쓰는 편집자, 이를 읽는 독자들... 지금, 이곳의 문학에 대하여 민감하고 날카로워지는 동시에, 문학 하는 사람들 간의 경계가 점차 허물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2015년 문단 표절 사태로, 어디 선가부터 문학의 방향이 어긋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발견되었다. 문단 내 권력 구조로 말미암은 문제들의 원인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문학의 본래적 가치를 다시 탐구해야 했다. 공감하든, 성찰하든, 분노하든, 좌절하든 문학을 읽고, 사유하는 동안 우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짜릿한 순간을 경험한다. 그 복합적인 감정 속을 헤집어보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우리가 살아있다는 감각이다.


편집자들은 이 인상적인 추상이, 문학이 우리 곁을 지켜올 수 있었던 까닭이었음을 발견했다. 목소리로 구전되던 시절부터 이북 리더기에 담기기까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꾸준히 효용을 의심받으면서도. 결국 차세대 문예지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는 바로 ‘사람’이다. 이들의 조용한 변주는 등단, 청탁, 더 과거로 들어가 보자면 주입식 교육 등 여러 수직적인 제도에 의해 폐쇄적으로 고착되어버린 문학의 장을 개방하고자 하는 움직임이었다.

 

 


 


* 대표이미지 출처: 신승민, "진퇴 기로에 놓인 문예지 시장, 몸집은 불어났지만 재정난으로 ‘등단 장사’ 하는 곳도!", 월간조선, 2018.05

 


[우제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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