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강릉 찍기 [여행]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피곤한 짓이다.
글 입력 2020.02.23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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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해보려고 했던 일이 엎어졌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지만, 아무튼 그렇게 됐다. 차라리 잘됐다며 배를 잡고 신나게 웃었지만, 웬걸. 마음이 답답하고 어디론가 돌아다니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그래서 떠났다. 강릉으로. 탁 트이고 시끄러운 파도가 있는 곳. 그곳 말고는 그 어느 것도 나를 달래줄 수 없었다.


마음먹고 준비하는 데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생각을 오래 할수록 얻는 것 없이 딜레이만 계속된다며 평소라면 엄두도 못 낼 단 5분 만에 핸드폰, 충전기, 카드, 이어폰을 챙겼고, 곧바로 택시에 몸을 실었다.


가는 길엔 소떡소떡을 먹고 싶었는데, 날이 추운 탓인지 뜨끈한 어묵이 당겼다. 속이 녹아내렸다. 아, 소떡소떡도 사 먹을 걸. 왜 두 개 먹을 생각을 못 했지.



어묵.jpg

 

바다.jpg

 

 

강릉에 도착했다. 생각해보면 일이 착착 진행되었던 것 같다. 버스는 오기 마련이지만 내가 탈 버스가 금세 오는 건 행운이었다. 터벅터벅, 여전히 묵직한 마음으로 숲길을 지나 정자를 지났다. 내내 땅만 보며 걷다가 고개를 탁 들었는데, 캬하-. 탁 트인 드넓은 해변과 바다를 보는 순간 묵은 때가 확 씻겨 내려갔다. 숨통이 트였다.


무수한 발자국이 남겨진 해변 가운데,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곳에 조개껍데기 하나가 놓여있었다. 오늘 내 친구는 너구나. 옆에 풀썩 앉아 이리저리 모래를 밀어내 편한 자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후로 멍하니 바다만 봤다. 파도 소리만 들렸다. 어쩜 색도 이렇게 예쁠까, 고울까 생각하며 그냥 바다만 바라봤다.


가끔 영상과 사진을 찍었지만, 눈에 담는 게 더 기억이 오래간다는 누군가의 말에 따라 조용히 눈에 담았다. 그러다 정말 한~참이 지났나.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왔다가 크게 빙 돌더니 왼쪽으로 날아갔다.



조개.jpg

 

 

아, 다음 생엔 새로 태어나고 싶다. 잔잔한 우물에 돌 던지듯 상큼한 생각이 확 일면서 툭툭 털고 일어났다. 생각과 감정이 정리되었다는 증거였다. 겸사겸사 배고프기도 했지만, 기러기의 등장은 정말 나이스 타이밍이었다. 카페거리 쪽으로 걸어갔다. 모래사장이 울퉁불퉁 사막 같았다. 1박2일에 나온 이수근의 노래가 생각났다. “세상만사, 오르막길 내리막길♬” 노래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짧은 문장이지만, 음정이 있으니 노래다. 그래, 인생사.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거지. 평지도 나오고.


사람이 많은 곳으로 가다가 할머니 네 분이 사진을 찍고 계신 게 눈에 들어왔다. ‘우리는 이제 따뜻한 곳에 있어야 해. 오래 있으면 못써.’ 하며 서둘러 뒤돌아 가던 세 분과 아이 같은 미소로 바다를 보고 셀카를 찍던 할머니 한 분. 나와 친구의 모습 같기도 하고, 그들에 비하면 어린 나는 멈추고 좌절하기엔 아직이다, 는 생각도 따라왔다. 내 인생은 1회차, 부족하고 모르는 건 당연하니까. 그래. 머플러로 어깨를 감싸고 뒤늦게 도도도 걸어가시던 할머니의 미소가 눈에 선하다. 귀여우셨다.

 

초코칩 프라푸치노를 시켰다. 곧 죽어도 포기 못 하는 나의 최애다. 기분도 좋아졌고, 걸어오는 길에 해변에 놓인, 탐났던 벤치의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바람은 요란했지만 내 기분은 잠잠하니 괜찮았다. 그리고 또 한~참. 얼마 안 가 부표인 줄 알았던 흰색 물체가 기러기인 걸 깨달았다. 작당 모의를 하는지 바다 위에 수십 마리가 앉아있는데, 모양새를 보아하니 뜬금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주 바다에 몸을 맡기고 둥둥 떠다니는 게, 속절없이 편해 보이기도 하고 저렇게 사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면서.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피곤한 짓이다 싶었다. 이렇게 사는 거지 뭐, 별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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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흐. 코웃음을 내며 기러기한테서 인생 배웠다고 생각하며 영상을 찍었다. 참 평온하고 평화롭기도 하지. 둥둥 떠 있어도 제자리에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그렇지?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 곧 도착한다던 버스에 헐레벌떡 달려간 것 치고는 버스 정류장에서 20분을 더 기다렸다.


그래도 단숨에, 타이밍 좋게 도착했고, 작은 컵라면 사발 하나를 먹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소떡소떡이 다 팔려서 옆에 있던 후랑크 소시지 하나를 샀고, 막차 버스를 탔고, 씩씩하게 걸어, 따뜻한 물로 샤워하고,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간밤에 가위에 눌렸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그래도 다음 날 개운하게 눈을 떴다. 힐링 한 번 하고 와서, 내가 원하는 여행을 하고, 좋아하는 것의 총체에, 뜻하지 않게 깨달은 상큼한 생각에 답답한 마음이 홀라당 날아가서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루가 지났다. 이렇게 나는 살아냈고, 살아간다. 나는 살아있었다. 그거면 된 거야. 수고했다. 토닥토닥.

 

 



[서휘명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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