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 작품 때문에 손드하임이 공연계를 떠나려고 했다고? [공연예술]

다큐 <메릴리, 찬란한 실패> 리뷰
글 입력 2020.02.22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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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 때문에 손드하임이 공연계를 떠나려고 했다고?

다큐 <메릴리, 찬란한 실패>



두 거장의 뼈아픈 실패


<메릴리 위 롤 얼롱Merrily We Roll Along>(이하 <메릴리>)은 여러모로 이상한 작품이다. 무려 손드하임이 작곡, 작사하고 해롤드 프린스가 연출한 뮤지컬인데 2주 만에 조기 폐막한 실패작이라는 점부터가 그렇다. 스티븐 손드하임은 뮤지컬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작사가로 커리어를 시작해, <스위니 토드>, <컴퍼니> 등 다수의 작품을 작곡 작사하며 뮤지컬의 지평을 넓힌 천재 작곡가라고 불린다. 할 프린스의 족적도 손드하임 못지않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지붕 위의 바이올린>, <카바레>, <컴퍼니> 등 뮤지컬사의 기념비적인 작품들이 프린스의 손끝에서 탄생했다. 브로드웨이의 신, 대가, 거장, 별, 거목 기타등등 온갖 수식어를 주렁주렁 붙여 마땅한 두 사람의 콜라보 작품이었다. 심지어 할 프린스는 이 작품이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런데 왜 망했을까, 이 공연.

 

할 프린스는 <메릴리>에서 여러 가지 위험한 실험을 했는데, 그중 하나는 연기 경력이 전무한 젊은이들을 캐스팅한 것이었다. 열여섯에서 스물다섯까지의 이 청년들은 캐릭터의 젊은 시절부터 중년까지 연기해야 했다. 많은 관객과 평론가들은 아직 어린 배우들이 중년의 연기를 하는 것을 어색하게 느꼈다. 아, 그래서 망했구나. 이뿐 아니라 역순행의 진행은 극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조차 어렵게 만들었다. 프리뷰 공연에서는 첫 넘버가 끝나자마자 자리를 뜬 관객이 반이었고, 어떤 배우는 무대에서 관객들의 불쾌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프리뷰 이후 대대적인 수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메릴리>는 결국 2주만에 막을 내렸다. 손드하임은 어찌나 상심했던지 뮤지컬계를 떠날 결심까지 했다. (천만다행으로 제임스 라파인과의 합작 <조지와 함께한 일요일 공원에서Sunday in the Park with George>으로 복귀했다.) 할 프린스는 다시는 손드하임과 작업을 하지 않았고, 웨버와 함께 <오페라의 유령>, <에비타> 같은 대중적인 히트 뮤지컬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메릴리>의 실패는 두 거장뿐만 아니라 초연에 참여했던 젊은 배우들의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다큐멘터리 <메릴리, 찬란한 실패>는 <메릴리> 초연 제작과정과 그 이후 참여했던 배우들의 삶을 추적한다.



어른이 된 아이들을 보는 것


<메릴리>는 세 친구 프랭크와 찰리, 메리의 이야기이다. 셋은 50년대 뉴욕의 예술가 지망생이었고, 함께 꿈을 꿨지만 그들의 삶은 각기 다른 모양으로 변한다. 작곡가를 꿈꾸던 프랭크는 잘나가는 영화 프로듀서가 되었고, 작사가를 꿈꾸던 찰리는 퓰리처상 수상 작가가 되었다. 작가 지망생이던 메리는 알코올 중독자가 되었다. 그러니까 프랭크는 돈과 명예를 좇았고, 찰리는 꿈을 고수했고, 메리는 자포자기했다. 극이 진행되면서 현재 시점인 76년부터 57년까지, 이들의 삶을 바꾼 중요한 순간의 선택들이 거꾸로 나열된다.


다큐멘터리 <메릴리, 찬란한 실패>는 꼭 실화 버전의 <메릴리> 같다. 함께 꿈을 꾸던 친구들이 어른이 된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공연 당시 열여섯 살에서 스물다섯 살까지의 이 어린 배우들은 열렬한 뮤지컬 팬이었고, 레코드판이 늘어지도록 손드하임과 프린스의 뮤지컬 앨범을 듣던 그들에게 <메릴리> 무대에 서는 것은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었다. 뮤지컬의 영웅들이 만드는 신작에 참여하는 것은 그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알다시피 개막 겨우 2주 만에, 이 엄청난 행운은 이르게 깨져 버린다. 다큐멘터리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현재 시점의, 어른이 된 배우이다. 그들 중 일부는 공연계에 남아 감독이나 배우가 되었고, 전혀 다른 길을 택해 사회운동가, 기자와 작가가 된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는 이들을 보면서 생각하게 된다. 그토록 절실하게 한가지로 꿈을 꾸던 젊은이들은 어쩌다가 이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되었을까. 우리는 주인공들이 어떤 어른이 되는지 이미 알고 있다. 치기어린 젊은 시절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들을 속편히 응원하지 못하고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작품은 꿈에 대한 천진난만한 이야기가 아니라 경계의 이야기이다. 작품의 가사 한 구절처럼 꿈을 잘 보살펴야 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최악의 일


“이 공연을 할 수 있다면 초연 다음날 차에 치여 죽어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최소한 제가 하고자한 일을 했으니까요.” 초연에서 ‘찰리’ 역을 한 배우 로니 프라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배우들의 꿈은 너무 강렬해서 그들이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을 보는 것은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상하게 한다. 하지만 <메릴리>는 비록 실패했음에도 참여한 배우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고의 일’일 수밖에 없다. 사랑을 위해서 한 일이니까. 당장에 숨이 끊어져도 행복한 일, 울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일인 것이다. 비록 이어지지 못하더라도 사랑을 위해서 한 일은 사라질 수 없다. 그리고 그 꿈을 공유한 사람들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특별하게 남는다. 오랜 세 친구, 프랭크와 메리와 찰리처럼, 20년이 지났음에도 어제 헤어진 것 같이 만난 <메릴리>의 배우들처럼. <메릴리 위 롤 얼롱>의 초연 앨범은 꿈의 에테르 같은 것으로 차있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면 주위는 한순간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물질로 가득 찬다. 모든 걸 걸고 사랑한 일과, 그 여정을 함께한 사람들과의 기억이 담겨 있는 건가 봐. 갑자기 나는 81년의 극장에 리허설을 하는 무리의 젊은 배우들과 함께 있고, 울고 싶은 동시에 참을 수 없이 웃고 싶어진다. 

 

 

[차송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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