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행복의 역설과 역설적 행복에 대하여

- <불행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행복의 철학>을 읽고
글 입력 2020.02.22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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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행복의 철학 표지.jpg

쇼펜하우어 지음 ; 정초일 옮김, 「(불행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행복의 철학」, 서울 : 푸른숲 , 2001.


 


들어가며



`불행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행복의 철학`이라는 제목의 책을 접했다. 호기심을 일게 하는 제목이다. 역설적이기 때문이다. 불행한 이의 행복론이라니. 우리의 일상적인 인식의 방식은 명쾌하고 직관적인 속성을 띄기에, 이런 역설은 흐르는 의식 속에선 곧바로 이해해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렇기에 흥미로운 것, 주의를 기울여볼 만한 것이기도 하다.


내 동생 놈은 직관적이고 긍정적인 녀석인데, 내게 이렇게 물어 온다. "행복론을 썼으면, 작가 본인은 그 방법을 잘 알고 있으니 행복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런데도 불행한 철학자면, 그 사람 능력 없는 거 아니야? 그리고 본인도 안 행복해지는 행복론을 우리가 볼 필요가 있나?"


좋은 호기심, 아주 기발한 질문을 내게 던져왔다.


 

쇼펜하우어.jpg

쇼펜하우어 초상. 부리부리한 인상이 왠지 곧 독설을 쏟아낼 것만 같다.


 

우선 지나가는 투로 들은바,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 철학가였다는 점을 들었다. 그게 뭐 하는 사람이냐고 묻길래, 나 같은 사람이라고 답해주었다. 바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러니까, 걱정 많고 회의적이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오빠야`*가 평소에 말하는 뭐 그런 거?"라는 동생의 덧붙임 말에, 나는 그를, 염세주의를, 잘 모르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가지고 있던 얕은 앎이 탄로 나는 부분이다.

* (우리 남매는 경상도 출신이다.)

 

더 물어오려는 것을 막고, 그냥 책을 안기어 주었다. 자기는 이런 거 싫어한다며 진저리를 치는데, 읽기 쉽도록 포스트잇으로 보충 설명을 달아두었다고 말하며 달랬다.

 

한 번 읽곤, 동생에게 이 책을 안기어 주었다. 내 동생은 직관적이고 긍정적이며 쾌활한 편인데, 최근 들어 이런저런 번민이 잦아져 자주 대화를 청해온 까닭이다. 어쩌면 나의 사견과 개똥철학들 보담, 논리적인 주장이 더욱 명쾌할 것으로 생각한 한편으로, 이 안에 있는 메시지들을 동생에게 전달해주고픈 마음이었다. 전달하고자는 것은 것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슬픔은 비단 슬픔으로만 이름되진 않고 기쁨 또한 마찬가지라는, 역설이 아니었던가 한다.



[크기변환][크기변환]행복론 포스트잇.jpg

나름 정성껏 포스트잇을 붙였다. 결국, 동생 놈은 이해하지 못해서 반환했다는 후문이…  어쩌면 악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행복론에 대하여



행복론이라는 글자에서 눈이 멈춘다. 인간의 모든 행동이 궁극적으로 행복을 향하는 일이라면, 아니 적어도 그 길 위라면... 이런 `행복의 이론`이 시사하는 바가 무얼까 하는 생각은 고민해봄 직한 일일 것이다. 어차피 모두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간에 행복을 좇는 와중일 것인데, 그것은 이미 향하여 가고 있는 하나의 체험일 것인데, 그럼에도 이렇듯 이론이 등장하게 된 까닭은 대저 무어냐는 괜스런 질문의 소치이다. 즉, 각자 알아서 해나가고 있을 것인데, 왜 이론이니 지침서니 등장하게 된 것이냐는 딴지이다. 역시 그 까닭이란, 우리의 모든 의지와 목적이 행복을 향한들, 그 사실만으론 행복이란 달성하기가 극히 어려웠던 때문이 아닐까.


일상 속에서 여러 사람에게, 조금 뜬금없으나 거부감은 들지 않는 정도로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반은 그렇다고, 나머지 반가량은 그렇지 않다고 답해온다. 기꺼이 스스로 행복하지 않다고, 불행하다고 답한 이들은 곧이어 스스로 얼만 한 고통을 안고 있는지를 피력하려고 했다. 반면, 행복하다고 대답한 이들은 그리 말할 거리가 없었다. 그렇게 나쁘지 않아 이만하면 괜찮다 여기는, 소소한 행복 속을 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 명백히 빛나고, 주체 못 할 정도의 행복을 안고 있지는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하면 괜찮은, 많은 소소한 행복들. 그럴 땐 나는 왠지 쓸쓸함을 느끼게 된다. 실례가 될 만한 것이라 감추어야 하는 생각인, ‘당신은 정말로 행복한가?’ 하는 의문, 아니 의혹을 품게 되는 것이다. 거기에는 불행도 많고, 소소한 행복도 많았다. 그러나, 왜 나는 아예 쓸쓸함을 느끼고 있었을까.

 

 


염세주의자가 생각하는 ‘행복’


 


“평범한 인간은 체념과 결핍의 길을 거쳐 행복을 추구하기에는 너무나 의지로 충만해 있다.”


 

첫 페이지에 등장하는 그의 주장이다. 위에서 언급된 ‘체념’은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어쩔 수 없는 것들에 대함’이 아닌 적극적인 체념을 뜻한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체념은 진정한 만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쓰일 것이다. 달리 말해보자면, ‘만족을 위한 기꺼운 포기’ 정도 되겠다.

 

결핍의 개념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개념이다. 여기서도 결핍은 적극적인 의미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채워질 줄을 모르는 욕망의 샘을 우리가 품고 있다면, 언제까지고 그 주린 새의 배를 채워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핍은 필연적이다만, 그 필연적인 결핍을 받아들이거나, 하다못해 견디고 노려보고 감내해 보고자는 ‘의지’는 우리에게 좀체 떠오르질 않았다. 피할 수 없는 것을 외면하는 일은 불완전한 도피이나, 우리의 사회 속에는 그런 사실들이 가려져 있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적극적이고 완벽한 행복은 불가능하며, 비교적 덜 고통스러운 상태만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이 점에 대한 통찰은 우리가 삶이 허용하는 만큼의 행복을 누리는 데 도움이 된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살기 위한 수단의 극히 일부만이 우리가 가진 권능의 범위 내에 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매우 적다.”



과연 염세적인 발언이다. 그의 이러한 ‘우중충하고 우울하기만 한’ 발언들은, 우리의 의지를 꺾고 좌절시키기 위해서였을까? 글을 조금 더 읽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점차 느끼게 된다. 그의 발언들은 우리의 행복에 대한 ‘맹목적이고도 빛나는 소망과 희망들’을 꺾어놓으려고 하지만, 그것은 맹랑하고 현실성 적은 희망이, 오히려 고통을 낳는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것이 허상 된 욕망을 조장하기 때문이다. 생의 고통은 욕망이 좌절될 때 발생한다면, 필연적이다. 욕망이 끝이 없고 필연적인 반면, 욕망의 충족은 그렇지 못하기 고통 또한 필연이 되는 것이다. 이런 때에 너무도 빛나는 희망, ‘완벽한 행복’에의 희망은 결코 이룰 수 없기에 눈물을 짓는다는 것이다.

 


이병헌 달콤한 인생.jpg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달콤한 인생 中



많은 이들과 강연들은 꿈을 꾸라고 조언해온다. 그냥 무작정 꾸라고 한다. 그리고 일단 그를 좇으라고 한다. ‘빛나는 희망’, 그것 하나만을 보고 달려가다 보면, 그 끝에 꿈은 다가온다고 이야기한다. 더 정확하게는, 그 끝에서야 꿈은 다가올까 말까 한 것이다. 나는 그것이 거짓이나 기만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결코 완전한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본인 스스로에게 이는 오직 선택과 책임의 문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어떤 강연에서는 꿈을 좇으라고, 또 이런 책에서는 허상을 깨라고 말해온다. 무엇이 정답인지는 누군들 알 수 있을까. 알 수 있는 것이라곤, 어떤 선택이 정답이었건 간에 그에 따른 책임이 전부 본인의 몫이라는 사실뿐이다.

 


[크기변환]미생 14화 2.jpg



“대책 없는 희망이, 무책임한 위로가 무슨 소용이야.” - 미생 14화 中


오상식 차장의 발언이 생각나는 부분이다.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하고, 견뎌야 할 일이라면 기꺼이 견뎌라. “우리는 우리가 살고자 하는 삶이 아니라 살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그리스 시인들의 격언집》, 라이프치히, 1817년]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살 수 있는 삶’이란 현재적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만 살아내라’는 말이 아니라, ‘본능의 목소리’를 따르라는 말이다. “그냥” 살고 싶은 어떤 삶의 모습을 따르는 것은 비이성적이라는 말이다. 스스로 기꺼이 살 수 있을 만 한, 어떤 근거를 가진 삶을 좇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말. 그리고 그 좇을만한 삶과 근거를 일단 찾는 것이, 우리에겐 가장 우선되어야 한다는 말로 해석할 수가 있다. 그 근거는, 오로지 본능의 목소리일 것이다. 본능에서 샘솟는 목소리만이 영원할 수 있고, 그 목소리를 따라 우리의 모든 낮과 밤, 매일을 바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마치, 대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시인 지망생에게 조언한 바처럼 말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포스팅 때 자세히 다루겠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의 주관적 측면(”기분 좋은 삶“)에 중점을 두지만, 사실은 객관적 측면을 주로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호한 이야기이다. 행복이란 이지라기 보다는 감정의 발로일 텐데, 주관을 따를 것이 아니라 객관을 따르라는 그의 말은 일견 동감이 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감정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내면에서 근거도 없이 솟는 것이 아니라면, 즉 어떠한 관측이나 감각이나 사고 등, 근거에 기인하는 샘솟음이라면, 우리는 감정 자체를 의지로써 생성해낼 수는 없더라도 그것을 유도하는 근거를 마련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근거를 마련하면, 감정은 뒤따르게 마련이다. 근거가 있어야만, 감정은 뒤따르게 마련이다. 행복이 너무도 얻기 어려운 감정이라면, 그 근거를 더더욱이 면밀하게 고려해야만 할 것이다. 주관적 취향이 이끄는 대로 나아가서는, 외려 길을 잃게 될지 모른다.



“몹시 불행해지지 않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대단히 행복해지기를 갈망하지 않는 것이다.”


 

행복과 불행이 결국, 동전의 양면이자 불가분의 관계라면. 행복하지 않음이 불행이고, 불행하지 않음이 행복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불행 不幸이란 단어 자체가 곧 아니 不 행복 幸福 하다는 뜻을 여실히 비추고 있었다. 이 둘은 빛이 있어 탄생한 그림자이고, 어둡기에 비로소 보이는 빛이다. 행-불행의 불가분 관계란, 행복을 탐해서 생기는 불행과,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지면서 생겨나는 행복을 함의한다. 이는 꽤 흔한 이야기.


그러나 한편 불행이 문자 그대로 ‘행복하지 않음’이라 해서, 정말로 그 반대급부인 행복도 곧잘 ‘불행하지 않음’이 되는 것일까? 그런 이야기를 우리는 실제로 종종 듣긴 한다마는, 의심해볼 일이다. 주로 어르신들, 숱한 풍파를 겪고선 세계와 운명의 앞에서 겸손해진 어르신들, 그분들의 입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 ‘불행하지 않은 것이 행복이다.’ 이 말도 물론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만, 그것이 반드시 그런 것이라 동조하긴 아직 미심쩍다.


 

[행복에의 욕망 -> 좌절 -> 결핍의 감각, 불만족 = ‘불행’]

불행의 인과는 이렇게 풀어볼 수 있을 것이다.


[불행이 일으키는 내적 고통 ->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고자는 욕망 -> 평화로운 감각 = ‘행복’]


위의 ‘불행의 반작용으로써 생성되는 행복’(행복2)은 이렇게 도식화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 행복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행복(행복1)의 개념과는 합치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모호함을 자아내는 요인이겠다. 행복 2가 ‘해방의 감정'이라면 그와 달리, 행복 1은 소망을 이루는 때에 일어나는 ‘성취의 감정’이기 때문이다.


또 한편, 행-불행의 관계가 이렇듯 서로에 의해 규정되면 그 규정이 모호해진다. 즉, 행복이 불행하지 않음이고 불행이 행복하지 않음이면, 그 정의가 확정되지 못하고 무한한 순환에 빠진다는 말이다. 예컨대, [행복 = ‘불행하지 않음’ = ‘불행(=행복하지 않지) 않음’ = ‘행복하지 않지 않음’]과 같이 이상한 굴레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는 이 문제를 대하여, 선택의 문제라고 결론 내리게 된다. ‘기준 되는 것을 무엇에 두느냐’의 문제라고 생각한다는 말이다. 의미의 기준을 행복에 두느냐 불행에 두느냐의 문제, 즉 행복을 기준점으로 두면 불행이 ‘행복하지 않음’이 되고 불행을 기준점으로 두면 행복이 ‘불행하지 않음’이 된다는 것이다. 그리곤 선택한 기준의 정의를 내림으로써 이 관계는 명확하게 명명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내가 기준 되는 단어를 선택하는 기준이 될까? 달리 말해, 무엇으로 나는 그 기준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것은 취향 말고는 달리 이야기하기 어려울 듯하다. 스스로 더 우선시하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다. 스스로 불행한 이에게는 불행이란 단어가 먼저 다가올 것이고,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바램인 행복이 먼저 떠오를 것이다.


작가의 위의 문장은 ‘행복’을 그 기준으로 두었다. 그에 따라 큰 ‘불행’을 피하는 방법은 큰 ‘행복’을 찾지 않는 것이라 말했다. ‘큰 행복을 찾다가, 그것을 찾지 못해 크게 행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큰 불행이다’라고 풀어서 해석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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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 이 사진은 빛 때문에 아름다워지는 것일까, 어둠 때문에 아름다워지는 것일까.


 


즐거움과 고통에 대하여




오랫동안 소망하던 행운이 찾아오는 경우에도 우리의 기분이 모든 면에서 전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유쾌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한 행운이나 불행이 찾아오는 순간에는 말할 수 없는 비탄에 빠지거나 마음껏 환호하게 되지만, 그 비탄이나 감격은 마침내 사라지고 만다. ~~ 괴로움이나 즐거움은 미래에서 빌려와야만 고조될 수 있는 까닭에 지속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일시적으로나마 조금씩 명랑해지다가 기쁨까지 차오르게 될 때를 생각해보라. ~~ 그러나 이 믿음은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행복에 대해 생각하기를, 큰 즐거움이 큰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곤 한다. 아닌 게 아니라, 즐거움이 그 순간엔 분명한 행복감을 불러다 주니까 말이다. 그러한 까닭으로 우리의 행복에 대한 소망이 강해질수록, 더욱 큰 즐거움을 찾아 나가게끔 된다. 심지어는 즐거움과 행복을 같은 단어로 인식하는 경우도 종종 보게 된다.


소망과 성취, 이 자연스러운 인간의 일에 대해서 작가는 딴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소망을 갖고, 그 소망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소망의 민낯을 알리고자 한다. 기대를 걸어볼 값이라면 제대로 알고 걸라는 말이겠다. 행복을 찾아간 곳에서 실망만을 안게 된다면 더없이 슬플 일이니 말이다.


만약 우리가 어떠한 소망에 대해서 크나큰 기대를 걸고 있다면, 그러니까 이 소망을 이루게 된다면 큰 즐거움과 행복감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면, 그것은 반만 맞고 반은 틀린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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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만 행복하려면 이발소에 가라.

일주일만 행복하려면 차를 사라.

한 달을 행복하려면 결혼을 해라.

일 년을 행복하려면 집을 사라.

 

평생 행복하고 싶다면 정직하게 살아라."


By 짱구 아빠



행복은, 얼마나 지속되어야 참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반대로, 찰나의 행복을 두고 우리는 기꺼이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까?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이지만, 그 안에서 우리는 행복을 이루는 요소에 ‘지속성’이 포함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직감할 수가 있다.


작가는 그 순간에 얼마나 큰 환희를 느끼는지보다는, 느끼게 된 감정을 얼마나 유지할 수 있느냐는, 감정의 지속성에 더욱 무게를 두고 있었다. 그 까닭인즉, 행복의 가고 난 빈자리는 더 이상 ‘없음’이 아니라 ‘사라짐’인 때문이다. 누군들 공감하시겠지만, 있다 없으면 늘 아리게 마련이다. 찾고 자는 행복이 쓰라림만을 남긴다면, 그건 참 모순적일 것이다.



일식.jpg

마음 안이 온통 어둠 속이라면, 행복의 가고 난 자리는 저렇게 빈자리로 표지되는 것이 아닐까. 빛이 사라진 자리로 말이다.

 


그러므로 과도한 환희나 고통의 바탕에는 항상 오해와 착각이 자리잡고 있다. 이 점에서 이 두 가지 과장된 기분은 통찰에 의해 예방될 수 있다. 모든 과도한 환희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어떤 일이 실제 일어났다는 착각에 기인한다. 말하자면, 성가실 정도로 끊임없이 생겨나는 새로운 소망의 지속적 충족이나 새로운 근심의 지속적 해소가 가능해졌다는 믿음은 착각일 뿐이다. ~ 착각에서 벗어나는 대가로 원래 착각이 가져왔던 환희만큼이나 쓰라린 고통을 지불해야 한다.



감정의 고조, 그 자체는 결코 거짓된 감각이 아니겠지만, 그 감정이 기인하고 있는 근거가 주로 허상이나 과장된 환상이라는 말을 작가는 하고 있다. 우리의 축제를 향하던 들뜬 마음과 발걸음, 그것은 곧 있을 축제에 대한 낭만적인 상상이 불러일으키는 고양감이었듯 말이다. ‘어쩌면 오늘, 그곳에서 운명적인 사랑을 찾을지도 모르지.’ 모르지.


그러나 축제를 비로소 겪고, 집으로 돌아오는 때의 쓸쓸함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 쓸쓸함은 지나가 버린 축제의 잔향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현실로 추락해버린 낭만적인 환상의 결과일 수도 있다.


부푼 기대감으로 크리스마스 선물상자의 포장을 뜯던 마음들, 그리고 열어버린 상자의 뒤로 떨어지던 우리의 고개들을 혹시 기억하시는가?



우리는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새로운 소망을 이루기 위해 애쓴다. 원하던 소망이 이루어졌음에도 만족을 얻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의 실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우리는 다나오스의 딸들처럼 구멍 뚫린 물통에 물을 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서둘러 새로운 소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대부분 무한한 과정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바라던 바를 이루었을 때의 행복감은, 상상하던 그것과 얼마나 같았던지 질문해본다. 누군들 이런 경험을 한 번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욕망의 환상과 욕망의 실상, 그 사이의 괴리에 대해서 우리는 대면하기를 피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욕망을 이루었을 때도 쓸쓸한 것이, 욕망이 좌절되었을 땐 얼마나 크던지.


욕망과 좌절과 새로운 욕망의 순환. 너무도 쓰라린 욕망과 좌절의 굴레, 이 영원한 반복의 어드메에서, 지쳐버린 우리는 좌절을 대면하기를 피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피하고 제쳐두고 좌절을 잊고, 공허한 우리 마음들은 그를 달래줄 다른 즐거움이나 위안을 향해 도망치듯 뛰어가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이상향에서 태어났다. 말하자면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에게는 갖가지 행복과 즐거움을 누려보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운명이 투박한 손으로 우리를 낚아챌 때까지, 실제로 그 뜻을 이루어 보겠다는 어리석은 희망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이윽고 운명은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사실은 우리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어린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세상에 대한 체험이 적은 때, 가슴 속에 떠오른 모든 소망은 의심이 없어 곧장 희망이 되던 시절. 그 부푼 가슴을 아직도 잘 기억한다. 그리고, 누구에겐 들 그 가득한 고양감은 깨어지게 마련이다.



그때 비로소 경험이 우리를 찾아온다. 그리하여 행복과 즐거움이란, 환상이 조화를 부려 아득한 곳에 떠오르게 한 허상일 뿐이라고 깨우쳐준다. 반대로 번민과 고통은 실재하는 것이며, 환상이나 갈망 없이 출현한다는 사실도 깨우쳐준다. 그 깨우침이 결실을 거두면, 우리는 더 이상 행복과 즐거움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오직 어떻게 하면 고통과 번민을 피할 수 있을까를 염두에 둔다.



그가 집중하고 있는 점은 행복에는 조건이 필요하지만, 고통에는 조건이 필요 없었다는 사실, 그러므로 고통이 보다 본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이다. 언제까지고 계속 행복을 위하여, 그 어렵고도 일시적인 감각을 위하여 그 조건을 찾아 나서는 것보다는, 조건 없이 무한히 솟는 고통을 다루는 편이 바람직하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고통 없고 평온한 현재, 견디고 살 수 있을 만한 현재가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현재가 그처럼 평온하게 되면, 그런 상태의 가치를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상상 속의 즐거움만을 끊임없이 동경하게 될까 봐 조심한다. 또한, 운명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미래 때문에 불안스러이 근심하다가 현재를 망쳐버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조금 허무해 보이는 결론이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참 힘 빠지는 말일 수도, 고요한 깨달음일 수도 있겠다.


작가는 “삶의 지혜는 행복론과 유사하다.”며,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삶의 지혜를 쌓은 이, 현자는 쾌락이 아니라 고통 없는 상태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장 행복을 잘 이해한 모습이다.’ 라고 말해오는 듯하다.


 


결론




"가장 큰 행운이 가장 큰 기쁨과 즐거움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기쁨과 즐거움에 따라 삶의 행복을 평가하려 드는 사람은 전적으로 잘못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기쁨이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생각은 시기심이 길러낸 망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통이야말로 삶의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이다. 즉, 고통이 없다면 행복한 것이다. 따라서 이 점에 비추어보면, 고통을 겪는 대가로 즐거움을 누리면 안 된다고 할 수 있다. 고통을 겪은 후 즐거움을 누리든, 즐거움을 누린 후 고통을 겪든, 결국 부정적이고 헛된 것을 얻는 대신 긍정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지불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즐거움과 고통 모두를 부정하고 있었고, 공한 상태, 중용의 상태를 추구할만한 상태로 보았다. 나는 그의 견해에 일견 공감을 표하고 있지만, 완전히 동의를 표하지는 못하겠다. 왜 그런가. 왜 그랬던가. 질문해본다. 


그의 선언을 보고 있자면, 즐거움을 일단 좇지 말라는 주장이라 느끼게 된다. ‘고통이 괴롭고, 즐거움도 괴로움으로 이어진다면 둘 모두에서 도망쳐야 한다.’ 만약 그의 말을 이렇게 읽는다면, 그것이 또 하나의 괴로움을 낳는다고 나는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만약 하나의 강제를 띈다면, 억지 체념이라면, 그것이 자연스러운 일련을 따르지 못하는 일이라면, 다시금 고통을 낳게 되리라는 생각을 가진다. 즐거움을 좇지 말아야 된다는 강박이 쏘아나가고자는 나의 소망들을 억지로 죽이고 있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고통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은 그를 올바르게 해석한 바가 아닐 것이다. 그가 주장하고자는 바는, 제 감정의 속성을 통찰하고, 그에 대한 ‘올바른 체념’을 통해 고요한 상태를 추구하라는 것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것은 마땅함을 억지로 행하라는 말이 아닐 것이다. 그 ‘중용’의 상태는 도망침, 회피를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진정한 중용, 고요한 마음은 대면과 대결을 지나고서야 얻어낼 수 있는 적극성의 소산이다. 무엇을 대면하여 대결해야 할까. 바로 위의 즐거움과 고통이 아닐까.



내가 글에서 공감한 바는 ‘맹목성’에의 경계이다. 즐거움이 그 쾌락을 원리로 하여 부지불식 간에 우리로 하여금 ‘맹목성’을 갖게 한다면, 그것은 경계해야만 옳다는 측면에서 그에게 동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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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이 감정선의 스펙트럼 위, 어디쯤에 속하는 것일까?

 


그의 행복론에서 ‘행복’이 지칭하는 바는, ‘지속 가능한 즐거움’이 아닌 ‘고통 없음’이었다. 위에서 잠깐 다룬바, 행복 1(성취의 감정)이 아닌 행복 2(해방의 감정)의 개념이다. 이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중용의 자세이다. 감정선의 양극단을 각각 즐거움과 고통이라고 가정한다면, 어느 쪽 극단도 처할만한 바람직한 곳이 못 된다는 말을 그는 하고 있었다. 이는 낯선 주장이다. 일반적으로, 한 극단의 기피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면 우리의 사고는 그 정반대 편으로 쏠리게 되기 때문이다. 극단적 이분법이다. 더군다나 너무나 기피할만한 것인 고통의 반대편이 너무나 달콤한 것, 쾌락이라면야 이 이분법적 쏠림은 더욱 자연하다. 이것이 행복에 관해 우리가 빠진 함정이 아닐까. 그리고 행복으로 쏠린 우리의 감각은, 그 반발로써 불행을 규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를 향한 욕망이 강할수록 그 좌절인, ‘행복하지 않음’으로서의 불행은 커지는 것이라면… 그건 참 역설적일 것이다. 행복에 대한 욕망이 강해질수록 반대급부가 커지는 모습인 따름이다. 무언가를 강렬히 바라는 것은, 그것으로부터 스스로를 멀리 떨어뜨리는 역설적인 모습을 띤다.


일상적인 사고방식 하에서, ‘행복’의 달성은 행복 1의 개념, ‘즐거움의 양적인 성취와 그 지속’이라고 쉬이여겨지곤 한다. 작가는 우선 그 부분에 딴지를 걸었다. 즐거움 그것이 아무리 감미로운들, 조금 떨어져서 넓게 바라보면 그 감정은 떨어져 깨어지는 불완전함이고, 그 행복의 크기만큼 허전함이나 괴로움을 느끼게끔 하는, 결과적으로는 고통에 수렴하는 상태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행복을 위하여 즐거움‘만’을 좇는 것은, 공허한 일이라고까지 말해온다. 언제까지 일시적 기쁨과 필연적인 쓸쓸함의 반복 속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러한 상태의 일련을 우리가 ‘의심 없이 기꺼이 따를만 한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행복이란 우리의 궁극적 목표인 최고의 ‘좋음’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행복 1을 향하는 와중에, 즐거움과 허무함의 순환이 ‘택할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하는 모종의 체념으로 우리 안에 자리 잡는 때는, 참으로 슬플 것이다.


즐거움은 이렇듯 불완전한 상태이고, 고통은 그 자체로 기피하고 싶은 상태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온 생애를 투신할 만 한 바람직한 목표는 그 둘로부터의 안녕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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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빛나는 태양일까 잔잔한 바다일까. 선택하고 분명히 해야할 문제일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니, 행복은, 과연 달성할 수 있는 것일까 회의감이 든다. 어느 순간에 행복에 이르면, 도착한 것이 되는가 물어보게끔 된다. 누군들 아니라고 할 것이다. 행복감, 그것은 ‘현재’의 ‘상태’에 하나로, 다만 가장 지배적인 상태일 뿐이다. 이는 잠깐 서고 또 잠깐에 스러지는, 일시적인 상태의 하나이다. 우리 얼굴에 만연한 미소를 짓게 하는 어떤 감정, 그것이 즐거움이건 만족이건 간에 감정은 영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경험한 바 있다. 한 달을 가는 미소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래도록 체험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다만 수 시간의 무표정 위로 때때로 찾아오는 각 다른 미소들, 그것이 비단 행복뿐 아니라 온 감정의 속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행복’을 취하고자 할 때, 그 행복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 중에서는 ‘지속성’을 가장 으뜸시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생각하게 된다. 물론 우리 안의 그 어떤 상태도 영원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극단적으로 짧고 강렬한 감정들, 예컨대는 어느 하루의 쾌감이 그다음 날과 그다음 주에까지 이어질 수 없었고, 심지어 그 빈자리가 외려 허무감이나 쓸쓸함으로 아려온다면, 최대한 지속 가능한 것을 좇는 것이 우리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 가장 타당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그렇지 못한 일상 속의 우리들은, 그 아린 듯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또 다른 쾌락을 찾아 나서곤 했지만 말이다. 그런 내 모습을 3자의 시점에서 바라보자면 참 슬픈 숙명처럼 느껴진다.


쇼펜하우어는 ‘현재’에 강조를 두며 말했다. 과거와 미래의 허상이 현재를 침노하는 것이 어리석다고 말이다. 행복의 조건 중 하나인 즐거움이 결국 ‘현재’에 감각되는 것이고 그 근거가 대부분 미래에 걸어둔 기대라면, 미지의 장막을 걷어 미래를 알 수 없는 한, 우리는 그 행복의 옳고 그름을 지금 판단할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옳다고 믿기로 한 따름인 것이다.


또한, 지금의 고양감을 위해서 너무 지나치게 미래로 유예해 둔 행복의 보증, 과도하게 낭만적인 소망은 나중에 지불의 때가 오면 손쓸 수가 없단 말을 하고 있었다. 지금의 행복을 위해 미래로 전가한 비용을, 경계하란 말이었을게다. 즉, 신용카드는 적당히 좀 쓰라는 말이었을게다.


책은 주구장창 행복의 역설을 언급하고 있었다. 행복을 추구하고자는 마음이 너무 클 때, 행복은 더욱 멀어지고, 그 반발작용으로써 외려 불행이 탄생한다는 인과.


그렇기에 역설적인 행복이 등장한다. 진정 행복을 원한다면, 오히려 그 원하고 바라는 마음을 줄이고, 조절하고, 길들이라는. 고삐가 없이는 무한히 뻗어 나갈 수가 있을 욕망은, 길들여야만 옳다고. 나는 그렇게 읽었다.


내가 동생에게 전달하고자는 것은 바도 이 비슷한 것이었다. 요즘따라 슬픈 때에 어떻게 해야겠느냐고 내게 묻는다면. 내 요즘은 썩 괜찮은데, 마음 안은 이상스레 불길한 기운을 띄고 있다면.


만약 그렇다면 슬픔을 뚫어지게 바라볼 것이 아니라, 너의 이전의 기쁨들을 찬찬히 되짚어볼 때라고. 예전과 달리 요즘따라 종전의 기쁨이 자최를 감추었다면, 그래서 슬픈 것이라면 정말 그래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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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제목, ‘불행한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행복의 철학’을 다시 본다. 그는 왜 불행했을까. 아니, 왜 그를 두고 불행하다고 이야기했을까. 그의 이런 삶의 방식이, 다른 이들에게 불행하게 읽혀서가 아닐지.


더 나은 소망과 즐거움을 찾아 나아가며 빛을 내는 태양의 자식들에게, 고요하게 정처한 채로 터무니 없는 희망을 죽이고 고통을 바라보고 있는 어떤 이는, 곧잘 ‘불행한 이’로 읽힐 터이니 말이다. 그런 달과 같은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행복과 불행을 그네들은 알 수가 없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불행을 거부하는 몸짓들로는 불행의 제대로 된 민낯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어떠한 까닭으로 불행을 겪게 되는지를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즐거움으로 알음알음해가는 행복이 있지만, 불행을 통해 거꾸로 알아가는 행복도 있다. 그것은 각각 행복 1과 행복 2일 것이다. 성취하는 기쁨과 해방된 기쁨. 그중 무엇이 더 좇을 만 한 것인지는, 내가 감히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염세적인 철학자 쇼펜하우어의 눈 위로는 해방된 기쁨이 더욱 좇을 만 한 것으로 보였나 보다. 그에 따르면 영원한 성취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영원한 해방은 가능한 일일까. 그것 또한 나는 잘 알지 못하겠다. 결국, 할 수 있는 말의 전부는 선택의 문제라는 것 뿐일까. 짱구 아빠 말대로, 잠깐의 행복을 위한 것들은 많다. 어떤 이는 삶이란 그 잠깐의 행복들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삶이란(그리고 그 위의 우리들도) 본디 건조한 무표정을 띄고 있으며, 우리는 그 위를 잠깐의 행복들로, 미소들로 비추는 것이 할 수 있는 전부라고도 한다.


영원한 행복을 찾아서. 그것이 불가하다고 여기어 체념한 이들은 잠깐의 행복들을 애쓸 것이다. 그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좇는 이들은, 다만 오랜 동안 아플 것이다.


어쩌면, 그 고통 속에서 해방의 길을 모색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은, 오로지 고통 속에서나 모색해봄 직한 것일게다.



[서상덕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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