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비 내리는 하와이 2 [여행]

글 입력 2020.02.1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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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 도착 첫 날, 숙소에 가까운 알라 모아나 공원에 가 산책을 했다. 알라 모아나 쇼핑 센터를 지나 5분정도 걸어가면 해변과 커다란 회백색 나무들이 있는 공원이 나온다. 나는 요트들이 늘어서 있는 선착장 다리를 건너 공원 입구로 들어갔다. 해변길을 따라 죽 이어진 알라 모아나 공원은 크고 푸르렀다. 인도에는 촘촘히 야자수가 세워져 있었고, 넓은 평지에는 묘한 곡선으로 거대하게 자란 나무가 그늘을 드리웠다.


아까 요트 선착장을 걸을 때 어쩐지 구린 냄새가 나는 진흙 구덩이에 발이 빠졌는데, 찝찝한 기분에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었다. 날씨는 좋았고 햇볕이 쨍쨍했다. 나는 몇 시간 전까지 퀴퀴한 비행기 안에서 쭈그리고 있었던 것과, 그보다 더 전에는 추위에 온몸을 꽁꽁 싸매며 한국의 길거리를 걸었던 감각을 빠르게 잊었다. 강렬한 자외선에 피로에 지친 몸뚱이가 나른해졌다. 어슬렁 어슬렁 벤치로 가 팔을 쭉 뻗고 드러눕다시피 앉았다. 맛있는 냄새가 난다 싶더니 옆에서 단란한 가족이 바베큐를 굽고 있었다.


아버지처럼 보이는 덩치 큰 남자가 두꺼운 팔로 부채질하며 연기를 내 쪽으로 보냈다. 머리 위에서는 새가 울고 해변이 태양빛을 받아 하얗게 부서졌다. 쾌적하고 평화롭다. 하와이는 이런 곳이구나. 휴양지야. 사람들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알 거 같아. 이런 햇빛 아래서라면 인생이 무엇인지 전혀 고민하지 않고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래를 온몸에 묻힌채 자전거를 타고 가는 저 사람처럼, 나도 태양의 활력이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눈을 감고 뇌 속까지 햇빛에 소독했으면 하는 기분에 반쯤 잠들었을 때,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 깼다. 하얀 웨딩 드레스를 입은 커플이 벤치 앞 나무에서 사진 촬영 중이었다. 보아하니 다 일본인이었다. 전문 사진사는 누웠다 앉았다 이리 세웠다 저리 세웠다를 반복하며 연신 사진을 찍었다. 쉬는 시간에 신랑은 신부 어깨에 올렸던 팔을 내리고 먼 곳을 바라보았고, 신부는 드레스와 머리매무새를 계속 가다듬었다. 바쁘고 권태로워 보였다. 이 커플 옆에선 또 다른 부부가 웨딩 사진을 찍고 있었고, 더 옆의 해변 방둑길에서도 한 커플이 사진 촬영 중이었다.


이 공원이 일본인의 결혼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풍경에 비해 도심과 가깝고 한적한 곳이라 사진 명소로 유명한게 아닐까. 인생에 기념 거리를 남기려는 것 치고는 주변 풍경이 너무 무심해서(사람들은 지나가고 바베큐는 구워지며 나 역시 심드렁하게 이들을 구경하는 중이었다) 과연 어떤 대단한 모습이 저기 담길지 궁금했다. 당연히 이런 지질한 것들이 렌즈에 담길리는 없겠지만. 사진사의 역할은 고객이 주인공인 완벽한 순간을 프레임에 담아 주는 게 아니던가.


비슷하게 입은 세 커플이 눈 앞의 카메라만 바라보는 비슷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했다. 태양의 온기가 사라지고 다시 회의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사진이란 무엇일까, 결혼이란 무엇일까, 왜 삶의 중요한 순간에도 권태는 사라지질 않는가...행복한 사람들을 빤히 구경하면서 인생이 지루하다고 생각하는 건 멋쩍은 일 같아 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자리를 떴다.

 

알라 모아나 공원이 넓고 쾌적한만큼 심심찮게 둥지를 튼 노숙자들을 볼 수 있다. 웨딩 촬영의 명소를 지나 몇 발짝 걸어가면 거대한 버섯같은 모양새의 우산 텐트가 있다. 낡은 우산을 열댓 개를 펼쳐서 둥글게 꽂아 놓았는데 처음에는 저게 뭔가 싶다가 슬쩍 삐져나온 갈색 발을 보면 안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노숙자들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다니거나, 아니면 많은 걸 주렁주렁 매달고 다니기도 한다. 비닐봉지, 가방, 쇼핑카트, 크고 복실복실한 개 등. 저 우산 텐트는 내가 본 것 중에서도 가장 아늑해 보였다. 아마 집에 가장 가까운 모양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와이 노숙자들은 인종 비율이 뚜렷하게 차이난다. 대부분이 하와이 원주민과 백인이고 중, 노년 남성들 많다. 와이키키는 유명 관광지라 치안이 좋은 편이고, 알라 모아나 쇼핑센터 주차장이나 인근 공원, 상가 등을 많이 배회하는 편이다. 신기하게도 동양인 노숙자는 본 적이 없다. 하와이가 다문화 사회 정착의 모범 사례라고 (적어도 내가 연수 온 학교는) 말하지만, 이런 주거 빈곤이 한 인종(피식민지 원주민)에게 집중되었다는 건 하와이가 번드르르한 겉모습과 다른 내적 모순을 품고 있다는 걸 암시한다.

 

*

 

처음 하와이에 온 날, 온화한 기후와 풍경의 일부처럼 존재하는 노숙자들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은 이 곳, 하와이 문화의 한 모습같아 보였다. 날씨가 좋으니 노숙자들도 많구나. 사시사철 밖에서 자기 좋은 나라니 이렇게 살 수 있는 거겠지...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 다인종 국가에도 암묵적 위계가 존재하는 걸 알 수 있다. 내 눈에 비치는 사람들은 이렇게 나뉘었다. 시민(백인), 동양인(중국 혹은 일본인) 한국(한국인), 흑인(흑인), 노숙자(원주민).


하와이 사람들이 이렇게 딱딱 맞아떨어졌다는 게 아니라, 길거리에서, 버스를 탔을 때 내 눈에 비친 사람들은 이렇게 구분됐다. 백인은 백인이었고, 한국인은 십중팔구 관광객이었다. 동양인은 부자거나 관광객이거나 노인이었다. 동화되기보다는 각자 커뮤니티가 강했다. 공원은 노숙자들이 배회하고, 호화로운 집은 동양인들이 다 가진 것처럼 보였다. 내 눈에 하와이는 멜팅팟(melting pot)이라기보다는 인종을 넘어선 자본주의가 다문화의 동력이었으며, 그로인한 극심한 빈부격차와 삭막함을 숨길 수 없는 곳으로 보였다. (물론 날씨가 안좋아 심술이 났던 것도 있다)

 

집이 없어 떠도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살기 좋은 곳일리가 없다. 노숙자들의 얼굴은 고단해보였고 눈빛은 신산했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었다. 하루도 만나지 않고 지나가는 날이 없었다. 나는 관광객이었다. 이주 동안 하와이의 모순을 비난하며 틀어박혀 있느니 나가 하나라도 더 구경하는 게 맞았다. 관광을 위해 이리 저리 돌아다닐 때마다, 물건을 사고, 사진을 찍고, 풍경에 감탄할 때마다 나는 어떤 일에 연루된 게 아닐까 생각했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공범이 되었다는 의식. 죄책감은 아니었다.


그건 일종의 무력감, 우리가 완전히 다른 역할을 맡고 있으며, 어떻게 여기서 일탈할 수 있을지 몰라 생기는 고립감이었다. 내가 단지 어떤 거대한 힘의 병정으로 기능하고 있다는 생각, 나는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쓰레기를 감당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광이란 무엇일까, 여행지는 여행객에게 무얼 바라고, 어디까지 보여주는 걸까. 단체 생활과 맛없은 음식에 질린 나머지 숙소에서 꼼짝않고 싶은 날이면 이런 생각에 잠겼다. 그러면서도 매일 새로운 걸 보러 나갔다. 이 모든 고민이 유난이고 인생에 깊은 생각은 필요 없으며, 어짜피 누구도 관심 없는 문제니 즐기기나 하라는 목소리가 나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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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나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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