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뉴필로소퍼 Vol.9, 죽음을 외면하면서도 전시하는 사회 [도서]

글 입력 2020.02.12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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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이중성: 외면과 전시


 

우리는 죽음을 외면하면서도 전시한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죽고 싶은지에 대한 속깊은 대화는 꺼리면서도 대중문화와 예술작품에서 죽음을 대상으로써 소비한다. 일년 중 연초와 연말을 가장 뜻깊은 시기로 삼아 주변인들과 축하하면서도, 삶에서는 오로지 출생만을 축복할 뿐 죽음을 우리 공동체의 주요한 주제로 격상시키지 않는다. 뉴필로소퍼(New Philosopher)의 이번 호, '삶을 죽음에게 묻다'에서는 이러한 우리의 이중성을 비판적으로 논하고 있다.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뉴필로소퍼는 독자들이 미시적인 현실을 넘어서 삶과 사회를 관통하는 실존적 고민에 도달할 수 있게 도와준다.

 

'외면과 전시'가 공존한다는 사실이 혹자에게는 모순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어떤 대상이 전시된다는 것은, 전시물을 향유하는 다양한 계층의 관심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전시물을 우리가 외면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문장은 적어도 '죽음'에 관해서는 모순이 아니다. 죽음은 미술관에 전시되는 작품도, 박물관으로 새로이 들여온 유물도 아니다. 죽음은 삶의 우연성을 단절하는 필연적인 관념이며, 그렇기에 박물관에서 선사 시대의 주먹도끼를 지나치듯 단번에 흘려보낼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죽음을 해부하기도 전에 걸어놓고 있는 우리의 태도야말로 진정한 '외면'인 것이다. 우리는 두렵기 때문에 전시할 뿐, 죽음의 공포를 두눈으로 마주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이번 뉴필로소퍼에 실린 티파니 젠킨스의 글 '죽음이 전시되는 세상'에 따르면, 20세기 의학의 발전에 따라 질병의 공포로부터 인류는 자유로워졌지만, 의료만능주의가 죽음을 금기시하게 만들면서 도리어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강화되었다. 죽음을 주제로 한 대중문화나 유명인들의 장례에 관해 압도적인 관심을 드러내면서도, 정작 자신과 가족, 친구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예전보다 더 함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티파니 젠킨스는, "죽음을 전시하는 대신 유한한 삶이 일으키는 실존적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더 필요하다"라며 지적한다. 삶의 유한성에 대한 자각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공동체적 차원에서 일어나야 한다. 그럴 때에야 죽음을 인간이 정복해내야 할 야수가 아닌, 우리 사회가 공동으로 수용하고 참여해야 할 자연 현상으로 인식할 수 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올리버 버크만이 인용했듯이, "우리의 두 번째 삶은 우리에게 단 한 번의 삶이 주어졌음을 깨닫는 순간에 시작"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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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죽음의 영역에서 발견한 절망과 희망


 


사전에서 모든 단어가 다 날아가 버린 그 밤에도

나란히 신발을 벗어놓고 의자 앞에 조용히 서 있는

파란 번개 같은 그 순간에도

또 희망이란 말은 간신히 남아

그 희망이란 말 때문에 다 놓아버리지도 못한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왜 폐허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느냐고

가슴을 두드리기도 하면서

오히려 그 희망 때문에

무섭도록 더 외로운 순간들이 있다

 

- 김승희, <희망이 외롭다>


 

세상에 아름다운 죽음이 있을까? 임종을 지키는 사랑하는 가족들의 온기 덕분에 아름다운 죽음의 현장은 있을 수 있겠다. 그러나 한 인간의 모든 세포와 장기가 기능을 멈춘 뒤 그는 더 이상 미추(美醜)를 식별할 의사능력을 갖고 있지 못하기에, 어느 누구도 아름다운 죽음을 경험할 수는 없다. 그렇기에 죽음은 어쩔 수 없이 폐허다. 다 불타버려 아무 것도 잔존하지 않는, 황야의 상태가 죽음과 비슷하다. 그래서 우리는 '죽는다'는 말을 문언 그대로의 의미로만 사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나에게 살아 있음의 역동감을 느끼게 했던 사랑이 과거로 스러진 직후, 우리는 '나 자신의 일부분이 죽었다'고 표현한다. 행복을 느끼는 역할을 담당했던 마음의 한 부분이, 심폐소생술로도 살아나기 어려울 만큼 죽어버렸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본능적으로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고자 한다. 위의 '희망이 외롭다'라는 시에서, 필자는 어떤 단어도 완성해내지 못할 정도로 절망에 빠진 순간에조차 희망으로 인해 폐허의 수렁으로부터 건져올려졌다. 그의 가슴을 번개처럼 스친 희망이 내면의 죽음을 저지했다. 사람들은 '죽고 싶다'는 말을 일상적인 한숨처럼 내뱉는다. 하지만, 죽고 싶을만큼 삶의 짐짝이 버거운 순간에도 미래의 변화에 대한 실낱 같은 희망을 놓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간신히 남겨진 열망과 바램 때문에 삶을 이어갈 수 있다.

 

각자의 희망이 더 이상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 차라리 폐허로 변해버렸으면 좋겠다며 가슴을 두드리는 누군가의 희망이, 어딘가에서 또 울부짖는 다른 이의 희망과 응답하여 보다 커지고 선명해졌으면 좋겠다. 뉴필로소퍼에 사진작가 클라우스 보와의 대담이 실려 있었다. 그는 지난 8년 간 'Dead and Alive Project'를 진행하며 전세계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태도 및 장례 풍습을 조명했다. 그 과정에서 그가 얻게 된 통찰은, 가족, 친구, 이웃들이 망자를 보내는 의식에 같이 참여하며 서로 위로하는 일이 죽음을 다루는 훌륭한 방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만 우리는 죽음을 '사회의 순환과정 내로 수용'할 수 있고, 망자의 영혼을 존중을 담아 기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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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우스 보의 문제의식은 '희망이 외롭다'를 쓴 김승희 시인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혼자만의 고뇌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는 희망은 희미하고 무력하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 기뻐하고 아파하는 순간 속에서, 그들 각자의 열망은 애타게 손을 뻗어 생명력을 얻고자 한다. 우리 공동체는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들에게 더 따뜻해져야 한다. 상실 후의 감정이 어떠한지 한번 더 물어야 하고, 물을 수 없다면 적어도 옆에서 함께 비를 맞아주어야 한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절벽 아래에서 펼칠 수 있는 날개를 제공해줄 수 있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모든 일은 결국 '죽음'의 의미와 본질에 대한 사람들의 자유로운 토의 아래에서 가능한 것이다. 이제는, 아무도 숨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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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후세계를 둘러싼 내면의 긴장


 

'사후 세계'만큼 인류 역사에서 오랫동안 호기심을 자극한 주제가 또 있을까? 사후세계의 존재는 현대의 진일보한 과학 기술로도 입증이 불가한 영역이기에, 어느 누구도 진실을 찾을 수 없을 영원한 난제이다. 과학자들은 '기적이 눈앞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는 논지를 펼 테고, 종교인들은 아마 '진정으로 믿어야만 기적을 경험할 수 있다'며 논지의 순서를 바꾸려 할 것이다. 나이젤 워버튼의 글 '어느 철학자의 죽음'에 나오는 철학자 흄의 견해에 따르면, 사후 세계가 존재할 가능성은 날개 달린 돼지가 존재할 가능성만큼이나 희박하다. 흄과 교회의 목사가 대화를 나눴다면, 목사는 분명 흄에게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를 먼저 버리라'고 충고했을 것이 분명하다.

 

사후 세계를 둘러싼 이성과 감성의 긴장 속에서, 나는 언제나 전자를 택하는 편이었다. 사후 세계의 존재에 관한 논증이 턱없이 빈약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는 나를 무신론자로 만든 이유이기도 했다. '신은 악(惡)이 없는 세상을 창조하는 대신 악(惡)이 부분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을 만들어, 인간이 이를 극복하도록 하는 편이 결과적으로 가장 큰 선(善)을 창출해낼 것이라 생각했다'라는 항변도 궁색하다고 생각했다. 당연히 처음부터 악함과 추함, 질병과 기아, 전쟁과 범죄가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더 낫지 않은가?

 

그러나 요즘은, 이러한 과거의 내 태도가 근대 철학자들의 독선과 닮아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인간의 이성으로 알아내지 못할 진리는 없다고 여기는 태도는 인류에게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뉴필로소퍼에 실린 '사후세계는 존재할까'라는 글에는 실존주의 기독교인 우나무노의 견해가 등장한다. 우나무노는 '영생을 열망하지 않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의견을 거부하면서, 자신의 철학자로서의 이성을 영생을 바라는 본능이 이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는 불멸에 대한 '반이성적' 신념을 옹호했고, 내세에 대한 믿음이 두려움에서 탄생한다는 관념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성의 쉼없는 질문을 멈추는 편이 더 삶의 지혜에 부합하는 순간도 분명 존재한다. 어차피 내세에 대한 진리를 알 수 없다면, 사후세계에 대한 믿음을 철저히 거부할 필요도, 그렇다고 타인에게 강요할 필요도 없다.


 



[이창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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