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딴짓] 어쩌면 모든 관계는 연기지만, 그래도 괜찮다

글 입력 2020.01.30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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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 바움백 감독의 영화 <결혼이야기(Marriage Story)>는 사실 ‘이혼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일종의 클리닉에서 부부인 니콜(스칼렛 요한슨)과 찰리(아담 드라이버)가 결혼 생활을 정리하기 위해 상담사와 대화를 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여느 영화의 시작과 달리 영화 <결혼이야기>는 이혼의 시작, 그러니까 끝을 이야기하며 서사가 시작됩니다.


부부인 동시에 배우와 감독으로서 함께 작품활동을 이어온 니콜과 찰리는 공연 뒤풀이를 마친 후 서먹하고 지친 공기가 감도는 집에서 니콜의 연기에 대한 대화를 나눕니다. 찰리는 니콜에게 감정을 억지로 짜내는 것 같다는 지적을 조심스레 건네자, 니콜은 답합니다.

 

Well, you know I can’t cry on stage

당신 알잖아, 나 무대에서 못 울잖아.

 

하지만 담담하고 건조한 대화를 마친 니콜은 ‘Good Night, Charile’라는 말과 함께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눈물을 흘립니다. 무대에선 울지 못한다는 니콜이 찰리 앞에서도 울지 못했다는 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적어도 10년은 한 집에서 살았을 두 사람에게 집이라는 공간이, 관객들 앞에서 연기를 하고 평가를 받는 무대와 다르지 않다는 뜻이니까요.


그렇지만 무대가 무대인 것과, 집이 무대인 것은 천지차이입니다. 무대가 무대인 건 당연하지만, 집이 무대인건 사무치게 쓸쓸하니까요. 집이 무대가 되고, 가장 가까워야 할 상대에게 가장 솔직하지 못한 상황. 이 장면은 영화 <결혼이야기> 속 니콜과 찰리의 관계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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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결혼이야기>에는 연극 같은 연출이 자주 등장합니다.  영화의 첫 장면부터가 그렇습니다. 니콜 역의 스칼렛 요한슨이 어둠을 뚫고 등장하죠. 허공을 응시한 채, 무대 위의 배우처럼 말입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그녀의 직업이 배우이기도 하고요.


영화 <결혼이야기>의 연출은 어떤 면에선 조금 작위적입니다. 결혼과 이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안정감과 평화, 갈등과 체념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극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장면과 움직임들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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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와 하룻밤을 보낸 무대 감독 마리 앤이 찰리에게 다가가 말을 걸자 니콜은 즉시 뒤풀이 자리를 뜨고, 찰리는 그런 니콜을 뒤쫓아갑니다. 30초도 되지 않는 이 과정을 영화는 그보다 더 짧은 컷으로 끊어서 보여줍니다.


90년대 영화나 드라마에서 긴장감을 자아내기 위해 부러 인물의 움직임과 신(scene)을 빠르게 이어 붙여놓은 듯한 느낌을 줍니다. 2019년에 개봉한 영화임에도 이러한 기법이 사용되었다는 건, 보는 이가 둘 사이의 관계에서 이물감을 느끼길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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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이혼에 대해 주변 인물들이 뒷 얘기를 나누는 장면도 그렇습니다. 보통 영화나 드라마에서 엑스트라 정도의 역할은 NPC처럼 영화의 하부구조일 뿐이지 영화의 색채나 분위기를 결정 짓지는 않습니다. 생동감 있게 움직이되, 블러 처리된 배경처럼 존재하는 거죠. 하지만 영화 <결혼이야기>에서는 찰리가 운영하는 극단의 동료들이나, 니콜이 등장하는 TV프로그램의 연출진들이 비중 이 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영화 전체에 독특한 흐름을 만들어냅니다.


니콜과 찰리의 이혼을 두고 니콜은 LA에 계속 머무를 거다, 아들인 헨리는 어떻게 되는거냐 등등의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들을 삽입해 영화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다른 누군가에겐 일종의 soap opera라는 걸 암시합니다. 마치 드라마 줄거리처럼 가십거리가 되는 거죠. 이런 방식으로 영화 <결혼이야기>는 결혼은 연기고, 연극이며, 결혼생활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는 농도의 차이일 뿐 결국 ‘연기’라는 걸 주지시킵니다.

 

결과적으로 스토리의 핵심인 니콜과 찰리의 이혼과정은 ‘감정을 얼마만큼 연기하는가’를 기준으로 환원되어 읽힙니다. 꽤나 점잖고 쿨한(?) 편에 속하는 니콜과 찰리는 처음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서로에게 이혼 절차를 밟아갑니다. 찰리가 그동안 힘써온 작품으로 큰 상을 수상하게 되었을 때도 니콜은 진심으로 그의 수상을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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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이 이혼 소송을 걸었을 때도 찰리는 이성의 끈을 붙잡습니다. 이혼하는 사람들이 맞나 싶을 정도로 두 사람은 서로에게 합리적이고 차분합니다. 두 사람의 이런 태도는 초반부에선 단순히 서로에 대한 배려로 보이지만, 뒤로 갈수록 ‘연기’에 가까워집니다. 영화 중반부까지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불만이나 분노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법적 절차를 위해 변호사를 구하고, 찰리가 헨리와 니콜을 보기 위해 뉴욕과 LA를  오가는 모습들이 반복되다 보니 관계를 정리하는 단계에 놓인 두 사람의 피로도가 부지런히 쌓여가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의 다정하고 침착한 모습들이 자연스레 ‘최대한 애쓰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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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와 감독인 니콜과 찰리의 ‘메소드 연기’는 후반부에서 결국 금이 가고 맙니다. 찰리가 LA에 새로 마련한 거처에서 니콜은 대화를 통해 두 사람의 본질적인 문제를 함께 찾아보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이처럼 건전하고도 이성적인 제안으로 시작한 두 사람의 대화는, 주먹으로 벽을 내리치고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는 것으로 마무리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의 ‘감정 연기가 폭발’하는 지점에서, 서사 속 니콜과 찰리는 ‘비로소 가면을 내던지는 것’입니다.

 

*

 

영화 <결혼이야기>는 이처럼 불편하지 않은 수준의 극적인 표현과, 배우와 감독이라는 설정을 통해 ‘우리는 모두 연기하며 살아간다’는 간단하고 자명한 진리를 세련되게 풀어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영화가 이를 비판하거나 자조적으로 바라보고 있진 않습니다. 영화 초반부에서 찰리는 니콜의 장점을, 니콜은 찰리의 장점을 하나하나 읊어내려 갑니다. 이는 부부 클리닉의 제안에 따라 서로의 장점을 메모에 적어둔 내용이었죠. 그리고 영화 말미에서 찰리가 그 메모를 우연히 발견하고 다시 한 번 읽어 내려갑니다. 니콜은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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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fell in love with him two seconds after I saw him. I’ll never stop loving him. 

Even though it doesn’t make sense anymore.

 ‘난 그를 본 지 2초만에 사랑에 빠졌다. 난 평생 그를 사랑할거다. 이젠 말이 안되긴 하지만’


찰리와 니콜이 서로에게서 사랑했던 모습들이, 그들이 결혼생활과 아들 헨리를 위해 최선을 다했던 순간순간들이 연기 였을까요. 설령 연기였다고 한들 두 사람의 결혼 생활이 무의미해지는 걸까요. 무엇보다도 두 사람의 관계가 감히 사랑이 아니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영화는 결혼을 비롯한 모든 관계가 연기라는 걸 직시하되, 진짜와 가짜를 판별하기 보다, 이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고 복잡하고 순수한 내면을 바라 보고 싶었던 건 아닐까요. 매 순간 연기를 하며 살아갈 지 언정, 그 안엔 날 것 그대로의 감정과 모습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 그것들이 복잡하고 뒤엉켜 발현된 것이 우리들의 모습이므로, 때로는 배신감이 들고 때로는 모순적이겠지만, 그래도 괜찮다고요. 그게 당연하다고 말입니다.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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