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과 운명을 마주보는 흔들림 없는 응시,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영화]

스스로 신화가 되기를 선택한 두 여성의 사랑
글 입력 2020.01.28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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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은 여성 감독, 여성 서사, 시대극, 퀴어 영화이다. 이 네 가지 키워드만으로도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은 걷잡을 수 없이 증폭되었고, 영화는 그 기대보다 더 큰 것을 안겨주었다. 칸에서 각본상을 수상할 만큼 탄탄하고 섬세한 이야기는 물론이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연출까지 정말 '좋다'라는 말 이외에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다'라고만 쓸 수는 없기 때문에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키워드로 나누어 어떤 부분들이 좋았는지 소개하려 한다. 물론 스포일러가 다수 포함되어 있으니, 영화를 보고 나서 읽는 것을 더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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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과 응시


 

마리안느는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만 하는 귀족의 딸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한 섬으로 가게 된다. 마리안느가 그린 엘로이즈의 첫 초상화는 그 그림의 주인공에 의해 혹평을 받는다. 엘로이즈는 그 그림에는 생명력과 존재감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후, 두 번째 그려진 초상화는 이전과 인물, 구도, 포즈 등은 변하지 않았지만 엘로이즈는 비로소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한다. 그것은 그림을 그리는 마리안느의 ‘응시’에 달려 있다.

 

전통적인으로 ‘본다’라는 행위는 주체의 위치를 대상보다 우위에 두며 주체의 눈에 보이는 것이 곧 그 대상의 전부라고 판단해 왔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대상의 주체성은 부재하기 마련이며, 이것은 대상화의 폭력을 야기한다. 라캉은 이러한 전통적 방식을 비판한다. 그는 보는 주체를 사방에서 응시되는 존재라고 설명한다. 자신도 타자로부터 시선을 받을 수 있는 존재임을 자각하게 되면, 주체는 타자를 인식하게 되며 동시에 타자에 의해서 나를 인식하게 된다.

 

마리안느의 첫 번째 초상화는 전통적 단계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엘로이즈의 이목구비를 몰래 훔쳐보고, 그녀의 이마, 눈, 코, 턱 선, 귀 등 그녀에게서 발견해낸 순간적인 이미지들을 조각내어 여러 장의 스케치를 그려낸다. 엘로이즈의 모습은 마리안느의 시선에 의해 파편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파편화된 조각들은 마리안느가 말하는 그림의 '규칙, 관습, 이념'과 만나며 남성적 시각에서 대상화된 엘로이즈이지만 엘로이즈가 아닌 초상화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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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서로의 시선을 교환하면서부터 마리안느의 그림은 달라진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를 응시하며 알게 된 그녀의 사소한 습관들을 나열하자, 엘로이즈도 지지않고 마리안느의 작은 습관들을 나열한다.

 

“당신이 날 볼 때 나는 누굴 보겠어요?”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말에 크게 동요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가장 큰 키워드가 바로 이 “응시”에 있다. 서로를 대상화하지 않고 오롯이 바라보는 시선. 눈으로 인식할 수 있는 외적 형태를 넘어 어떤 대상화도 없이 한 존재 자체를 바라보는 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응시이며 사랑이다. 엘로이즈는 사랑에 빠지는 감정을 무언가를 창조하는 느낌과 연결 짓는다. 영화 속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의 시선 속에서 서로를, 스스로를 창조하며 사랑을 키워간다.


 

 

저항과 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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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소피를 돕기 위해 세 여성은 하나가 되어 움직인다. 일종의 연대적 공동체를 만들게 된 것이다. 이 연대 앞에서는 귀족과 하인이라는 계급적 차이는 사라지고 평등적 관계만이 남게 된다. 엘로이즈는 수녀원에서 지내던 시절을 “평등이 주는 안락함”이 있었던 시간으로 추억한다. 원치 않은 결혼을 피하기 위해서는 죽음밖에 선택할 수가 없었던, 허락 없이는 집 밖으로 나갈 수 없었던, 중요한 주제는 그릴 수 없어 숨어 그려야 했던 그 시대의 여성들은 연대를 통해 서로를 지지하며 선명한 정체성을 획득하게 되고 평등에 발을 내딯게 된다.

 

또한, 18세기 프랑스라는 강력한 이성애 중심 가부장 사회에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사랑은 혁명보다 더 큰 힘을 가지게 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미시사가 18세기 프랑스라는 거시사를 삼키게 되며 그들의 관계 자체가 일종의 급진적인 저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색채의 대비


 

영화는 파란색과 빨간색, 두 가지 색채를 두드러지게 대비시켜 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상징을 만들어 낸다. 엘로이즈는 (초상화를 그릴 때를 제외하고) 항상 파란색의 옷을, 마리안느는 빨간 색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또한, 이 각각의 색채는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공간들을 상징하기도 한다. 영화의 공간은 크게 저택 밖의 바다와, 모닥불이나 촛불이 켜져 있는 어두운 저택 안으로 나뉘는데, 파란색의 엘로이즈는 물을, 빨간색의 마리안느는 불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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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과 불은 필연적으로 함께 할 수 없다. 이러한 둘의 대비되는 속성은 그들이 처한 시대적 배경을 떠오르게 한다. 하지만 사랑의 영역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물을 상징하는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 마리안느를 상징하는 불이 삽시간에 옮겨붙은 것처럼 그들의 사랑은 그렇게 속수무책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음악


 

이러한 시각적 연출과 더불어 영화에서 음악적 연출이란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인물의 감정이나 시공간의 분위기 등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논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음악이다.

 

여자들만의 축제에 참가한 여성들의 하모니로 이루어진 곡인 La Jeune Fille en Feu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관계를 암시한다. 낮은 울음 소리로 시작된 노래는 점점 고조되며 아카펠라 합창이 되는데, 이 때 두 개의 라틴어 소절이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Non possum fugere (나는 도망칠 수 없다)

Non resurgemus (우리는 일어선다)

 

"나는 도망칠 수 없다"라는 가사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스스로에게서 발견한 사랑의 감정에서 도망칠 수 없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도망칠 수 없기 때문에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직시해야함을 노래한다. 일어나서 그들을 도망칠 수 없도록 하는 현실을 뛰어넘어 감정을 마주해야 함을, 그리고 그렇게 될 것임을 노래하는 것이다.

 

영화에서는 이 가사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노래는 신비로운 주술이나 종교적 의례와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입을 모아 하모니를 맞추는 수많은 여성들, 뒤이어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게 되는 두 사람의 모습을 통해 이 노래가 그들의 관계에 대한 어떠한 예언 혹은 지지를 노래한다는 것은 언어를 뛰어 넘어서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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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등장하는 음악은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으로, 성당에서 듣는 찬송가 말고는 음악을 들어본 적이 없는 엘로이즈에게 마리안느가 들려주었던 곡이다. "음악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며 서툰 피아노로 전했던 그 곡은 영화의 마지막에서 한 번 더 등장하게 된다. 웅장하게 들려오는 곡과 그 곡을 듣는 엘로이즈의 표정, 그리고 그것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는 마리안느의 시선으로 이 영화는 마무리가 된다. 천둥번개를 떠오르게 하는 빠르고 웅장한 곡은 서로를 그리워하는 감정이 관객들에게 밀려 들어오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두 곡은 적재적소에 완벽하게 배치되어 영화적 효과를 극대화한다. 하지만 이 두곡을 제외하고는 어떠한 사운드 트랙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조금 놀라웠다. 대사를 제외하고는 숨소리, 모닥불이 타는 소리, 파도 소리들이 적막을 메운다. 하지만 그 공백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음악을 최소한으로 사용하여 오히려 음악이 등장하는 부분의 효과를 극대화 하였을 뿐만 아니라, 음악을 사용하지 않은 부분 조차도 자연의 소리로 어떠한 영화적 리듬을 만들어 냈다고 느껴진다.


 

 

오르페우스 신화의 변주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서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오르페우스 신화의 변주에 있다. 엘로이즈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를 읽어주자, 소피는 그가 돌아봄으로 인해 에우리디케가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고 분노한다. 하지만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기존의 오르페우스 신화의 해석과는 새로운 의견을 제시한다.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봄으로써 그녀가 아닌 시인으로써 그녀와의 추억을 선택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거기에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뒤돌아보라고 말했을 것이라고 덧붙인다.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는 행위를 당하는 수동적인 인물이다. 겁탈을 ‘당할’ 위기에 처해 도망가다가 뱀에 ‘물리게 되어’ 죽고, 오르페우스가 ‘뒤돌아봄’으로 인해 또 한 번 죽음을 맞는 비극적 인물. 이 모든 사건들에 에우리디케의 의도나 선택은 부재한다. 하지만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새로운 해석으로 신화 속 에우리디케는 생명력을 지니게 된다. 그녀가 ‘뒤돌아보라’고 말하는 것은 곧, 사랑을 추억으로 남기겠다는 선택을 하는 행위이자 동시에 부당한 상황 속에서도 주체적 행동을 할 수 있는 인물로 새로 태어나는 것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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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았던 그들의 사랑도 초상화가 완성이 되며 이별을 맞게 된다. 도망치듯 저택을 빠져나가는 마리안느에게 엘로이즈는 "뒤돌아봐"라고 말한다. 뒤돌아보는 순간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되고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된다. 시대적 상황이라는 거대한 운명 속에서 이별하게 된 그들은 새로이 탄생한 오르페우스, 아니 에우리디케 신화와 결합하며 단순한 운명의 '희생자'로서 남겨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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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사랑을 추억으로 남기기를 선택한다. 마지막 밤에 서로에게 속삭인 약속처럼 그들은 후회하지 않고 서로의 모든 순간을 기억할 것이다. 마리안느는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은 바로 그리기를 그만두는 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림은 붓을 내려 놓는 순간 끝이 났지만, 그들의 마음 안에서 서로는 끝없이 그려지고 있기에 사랑은 결코 끝이 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떤 사랑은 이별 후에도 계속된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서로를, 그리고 운명을 향한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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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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