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항상 사람을 향했던 예술가, 툴루즈 로트렉전

글 입력 2020.01.21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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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아트인사이트를 통해 툴루즈 로트렉전에 다녀왔다.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던 툴루즈 로트렉의 삶이, 전시를 보기 전까지는 아주 기구하게 느껴지면서 의문이 들었다. 왜 그렇게 불나방 같은 삶을 살았나 하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던 것이다. 좀 더 안정지향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여력이 되는 그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러지 않았던 게 개인적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도슨트의 설명과 함께 전시를 보고 나니, 비록 그가 살았던 삶의 방식이 완전히 공감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풍요로움 속에서 결핍을 느꼈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다 가진 집안에서 가지지 못한 채로 자란 것이나 다름 없는 그로서는 그림이 거의 유일한 탈출구나 다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툴루즈 로트렉은 프랑스 남부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명예와 부귀를 모두 가진 집안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선천적으로 약하게 태어났다. 귀족 집안의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되었던 근친혼으로 인해 유전적인 취약점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설상가상으로 한창 성장기였던 14살 그리고 15살에 양쪽 허벅지 뼈가 부러지는 바람에 그는 신체적인 성장까지도 멈춰버리고 말았다. 그가 결핍되기 시작한 건 어쩌면 이 때부터라고 볼 수 있겠다. 이는 비단 그가 신체적으로 불편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가 후천적인 장애를 가지게 되자 그의 아버지가 그를 외면해버렸기 때문이다.

 

로트렉의 아버지는 귀족적인 허세가 가득했던 사람인 듯하다. 자신의 아들이 넘어져서 허벅지 뼈가 부러졌다는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할 때 괜히, 승마 중 낙마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라며 포장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듯한 아버지의 모습에서, 로트렉은 얼마나 큰 실망감을 느꼈을까. 체면을 차리기에 급급한 귀족사회에 대한 환멸까지도 더해졌을 것이다. 사고 후로는 자신을 사실상 버리듯 대하는 아버지로 인해 상처받고, 그는 이후 자신의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와는 다른 성에서 생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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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valier

 

 

그렇게 거동이 다소 불편해진 툴루즈 로트렉은 다리를 다친 이후로 한동안 침상생활을 한다. 그 때 툴루즈 로트렉은 그림을 시작하게 된다. 그를 처음으로 가르쳤던 사람은 아버지의 친구이자 청각장애를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과는 또 다른 형태로 장애를 가지게 된 로트렉에게 연민을 가졌고, 자신이 주로 그렸던 동물들을 그리는 법을 로트렉에게 전수해 주었다. 이 영향을 받아, 로트렉은 초기에 곰이나 말과 같은 동물 그림을 주로 그렸다. 시작이 동물 그림이었기 때문인지, 그의 작품 속에 녹아들어있는 동물의 형상은 항상 역동적이었다.

 

로트렉의 첫 스승은 그에게 동물 위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알려준 동시에, 그의 건강 상태가 괜찮을 때면 종종 그를 데리고 서커스를 관람하러 나가곤 했다. 침상생활을 하던 그가 스승의 손에 이끌려 나간 밖에서 본 그 화려한 서커스의 모습은 얼마나 인상적이었을까. 훗날 물랭 루즈를 속속들이 담아내는 화가로 그가 자리매김한 배경에는 이처럼 어린 시절 기억에 남은 쇼 비즈니스의 화려함이 있지 않을까 하고 유추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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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es

 

 

로트렉은 18세에 파리로 넘어가 본격적으로 다양한 화실의 화풍들을 접하기 시작했고, 그렇게 쌓은 그의 실력은 물랭 루즈가 개관하면서 더욱 빛을 발한다. 만국박람회가 열리던 시기, 에펠탑이 세워졌고 물랭 루즈도 개관하면서 파리의 사교계는 들썩였다. 그 가운데서 로트렉은 물랭 루즈에 자신의 지정석을 만들어놓고 매일같이 출석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때 자신을 희화화하고 낮추면서 사람들에게 편하게 다가갔고, 귀족임에도 불구하고 귀족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사람들을 매료시켜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파리의 사교계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수많은 사람들과 가까워지면서 로트렉은 자신이 보고 느끼는 것들을 그림으로 담아냈다.

 

쇼 비즈니스 세계의 화려한 모습을 담아낸 그는 그 화려함에만 매몰되지 않았다. 한동안은 아예 화류계 여성들이 거주하는 곳에 들어가 그들과 숙식을 함께 하면서 그들의 일상을 담아내기도 했다. 물론 순수하게 그들을 관조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고 그 중 일부와는 교제를 하기도 했다. 문란한 삶이긴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화류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모습을 자신과 동일시했다. 그들도 자신도 결핍된 자로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그런 그들의 삶을 에로티시즘의 시각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건조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욕심을 가졌던 것이다.

 

물론 당시에는 로트렉이 화류계 여성을 그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외설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Elles 연작 시리즈를 보면, 정말 다양한 모습들이 있었다. 어느 여성이 머리를 묶고 있는 모습, 지친 듯 그저 침대에 푹 퍼져 있는 모습, 청소를 하는 모습과 같이 그저 일상적인 모습들이 가득했다. 로트렉이 문란하게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물론 그런 면도 있었지만, 그가 나름대로 자신의 삶과 그들의 삶을 동실시하며 풀어냈던 연민이 와닿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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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lin Rouge, La Goulue

 

 

툴루즈 로트렉이 19세기 말 파리의 일약 스타 화가가 되었던 것은 비단 물랭 루즈의 화려함을 화폭에 담아냈다는 단순한 차원에 기인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현대의 시점에서 보아도 감각적일 정도의 포스터들을 선보인 놀라운 화가였다. 물랭 루즈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며 자신이 화가인 것을 밝히고 자신의 작품들을 보여주기도 했던 로트렉은, 아리스타드 브뤼앙과 같은 거물들로부터 출연작의 포스터를 그려줄 것을 부탁받곤 했다. 그렇게 부탁을 받아 선보인 로트렉의 포스터는 파리 시민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 그가 그린 석판화 포스터가 시내에 붙으면 이를 떼어가 모으는 수집가들이 생길 정도였다고 한다.

 

로트렉의 포스터는 현대 그래픽 아트의 시발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지금 보아도 전혀 촌스럽지 않다. 포스터에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 하지 않고, 로트렉은 오히려 필요 없는 부분을 과감하게 생략하고 동시에 표현하고자 하는 부분은 그 특징을 매우 잘 살려 담아냈다. 그뿐만 아니라 포스터 안에 들어가는 문구의 배치와 표현까지도 고심한 기색이 보인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또 다른 유명한 포스터 화가를 예를 들자면 알폰스 무하가 있다. 생각해보면 얼마나 대조되는 화풍인가. 무하의 작품은 아주 세밀한 부분까지도 모두 섬세하게 표현하고 있고 전체적으로는 매우 화려하다. 그리고 어쩌면, 파리 시민들에게 굉장히 익숙한 느낌의 화풍이기도 할 것이다. 로트렉에게 선배 포스터 화가 였던 쥘 세레의 화풍을, 알폰스 무하는 어느 정도 계승하는 차원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로트렉은 과감한 생략과 강조를 통해 한 포스터 안에 단촐하게 모든 것을 담아냈다. 그 색다른 매력에 시민들이 열광하게 되는 건 필연적인 운명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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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Jockey

 

 

그러나 로트렉은 끝없는 유흥생활로 인해 알코올 중독과 매독에 걸렸고 이로 인해 점점 정신적으로 피폐해져갔다. 한동안 정신병원에 갇혀 있어야 했을 정도로 그의 상태는 심각했다. 그리고 그 정신병원에서, 그는 젊은 시절 몽마르트의 화실에서 친해졌던 화가 친구를 다시금 만나게 된다. 바로 반 고흐다. 둘이 같은 시기에 정신병원에 감금되었다는 점이 참, 운명의 장난처럼 느껴진다.

 

로트렉은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 후, 그곳을 벗어나려면 자신이 그림으로써 정상 상태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꾸준히 말 그리고 말을 탄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전시관에서 그가 그렸던 수많은 습작들을 볼 수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치 어린 시절의 그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 함께 들었다. 실제로 그 당시 그에게는 청년기 보았던 물랭 루즈의 기억보다는 청소년기에 보았던 동물들과 동물 그림들이 더 선명했다고 한다. 동물을 그릴 때면 그가 가장 순수해졌던 게 아닐까.

 

다른 동물보다도 말은, 유독 그가 애정을 많이 가지고 그렸던 동물이다. 도슨트는 이를 두고, 로트렉이 장신이 탈 수 없었던 대상이자 아버지가 사랑했던 동물로서 말을 바라보며, 그가 말에 아버지를 투영했던 것이라고 부연했다. 자신을 외면하고 부끄러워 했던 아버지에 대한 미움이 가슴 한 켠에 남아 있으면서도, 그는 동시에 자신을 낳아준 아버지에 대한 마음 한 조각을 말에 투영해 계속 그려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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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촬영이 가능했던 전시 초입부 모습)

 

 

결국 로트렉은 정신병원에서 퇴원하고도 몸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서른 여섯이라는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의 생이 평생 풍요와 부족, 소유와 결핍이라는 모순된 것들로 가득했기 때문에 자신과 동일시하게 된 대상들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로트렉이 불나방 같은 삶을 살았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어느 순간에 삶이 끝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누군가는 갓 불붙은 불꽃처럼 순식간에 타오르는 삶을 살기도 하고 누군가는 숯 속의 불길처럼 은은하게 오래 가는 삶을 살기도 한다. 삶이 자신을 기만하는 것 같은 순간에도 그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 삶을 헤쳐나가며 살았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그가 가늘고 긴 삶을 선택했더라면 더 많은 그리고 더 인상적인 작품들을 볼 수 있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아니면 그가 굵고 짧은 생을 선택했기 때문에 그의 예술혼이 이토록 빛을 발했던 것일까? 예술가의 삶은 항상 알다가도 모르겠다.

 

*

 

전시 첫 주말에 갔는데도 툴루즈 로트렉전은 사전 홍보가 잘 되었던 것인지 사람이 많았다. 아무래도 방학 시기이기도 하니 관객들이 더 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조금 느긋하게 관람하고 싶다면 평일에 방문하는 것이 확실히 나을 듯했다. 일부 섹션에서는 도슨트와 이를 따르는 사람들로 섹션 공간의 절반 이상이 차기까지 했으니, 주말 관람은 인파를 각오하는 것이 좋다.

 

이번 전시는 오디오 가이드와 도슨트 해설이 모두 있다. 오디오 가이드도 좋지만, 만일 도슨트 시간이 맞다면 도슨트의 설명을 들으며 전시를 관람하는 것도 감상의 폭을 확장시키는 데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도슨트논 오전 10시 30분, 오후 1시, 3시 그리고 5시에 진행되며 공휴일에는 별도로 진행되지 않는다.

 

뜨거운 불꽃같은 예술혼으로 가장 낮은 곳의 삶들을 바라보았던 예술가의 삶. 5월 3일까지 툴루즈 로트렉전에서 확인할 수 있다.

 


[석미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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