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를 몰라도 재밌게 읽히는 책 - 야한 영화의 정치학

글 입력 2020.01.18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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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비디오’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과거 빨간색 비디오테이프 안에는 빨간색만큼이나 자극적이고 화끈한(?) 19금 성인물이 들어있었다. 비디오 테이프의 거칠거칠한 표면을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세대도 ‘응답하라’ 시리즈와 같은 복고풍 영화나 드라마를 본 사람에게 빨간 비디오는 낯설지 않은 소재다. 특히 중, 고등학교 성장기의 남학생들이 주요 인물로 등장할 때 뒤통수가 불쑥 튀어나온 컴퓨터 혹은 테레비에 빨간 테이프를 밀어 넣고 치직치직거리는 살색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장면은 진부하리만치 익숙하다.


하지만 성인물을 관람하는 남성들을 보여주는 렌즈에 비해, 그들이 바라보는 화면 속 여성들을 담아내는 렌즈는 얼마나 존재했는가? 여성들은 주로 렌즈에 ‘비춰지는’ 대상이었다. 이는 물리적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는 의미를 넘어, 대상화된다는 것을 뜻한다. 스크린 위에서 남성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는’ 편이었다면 여성은 남성의 시선에 의해 ‘그려지거나 조작되는’ 위치에 있었다.

 
영화가 여성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이해하려면 우선 다양하고 복잡한 기준들이 존재한다는 걸 인지해야 한다. 단순히 여성이 나체로 등장한다고 해서 여성을 비하하거나 대상화시켰다고 할 수는 없다. 남성 감독의 작품이라는 이유로 여성을 남성의 시선으로 그려냈다고 하기도 무리가 있다. 여성에 대한 강간이나 폭력, 살인이 자행되거나 매춘부나 내연녀가 등장한다는 자체만으로 반페미니즘적이라는 딱지를 붙일 수도 없다.


따라서 여성, 성, 섹스를 담아내는 영화를 분석하기란 절대 단순하지 않다. 그럼에도 지금부터 소개하고자 하는 <야한 영화의 정치학>은 191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총 44편의 영화를 아우르면서도 영화가 여성을 다루는 시선의 변화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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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하는 것        



<야한 영화의 정치학>과 함께 시대순으로 영화를 훑어가면서 발견하는 가장 큰 재미는 단연 여성과 섹스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쫓아가는 재미일 것이다.


1910년 등장한 영화 <내 아이들은 어디있는가>에서 여성 주인공인 왈튼 부인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 시대에 앞서가는 여성처럼 그려진다. 하지만 저자는 이러한 여성캐릭터의 표면적인 속성 이면에 배태된 당대의 관습적이고 보수적인, 심지어는 우생학적인 면모를 지적한다.



영화는 표면적으로 진보적인 주제를 다루고는 있으나

캐릭터의 설정과 이야기의 결말은 진보적인 방향과 거리가 멀다.

낙태를 받은 여성은 죽음으로 죗값을 치르고, 공모했던 여성은 영구불임이 된다. 

 

더 큰 문제는 이 영화가 낙태를 정당화하는 기제로,
노동계급의 출산은 막고 상류층의 출산은 장려하는 우생학적인 접근을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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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자는 영화 <내 아이들은 어디있는가>의 왈튼 부인과 비슷한 영화 <애마부인> 속 애마부인에 대해서는 왈튼 부인보다 진일보한 여성 캐릭터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근거가 꽤 흥미로운데, 여주인공의 설정이 시골에서 상경해 생계문제로 매춘부를 택한 캐릭터와 달리 중산층 가정 주부로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과도기적 캐릭터의 진보적인 면모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침착한 시선으로 애마 부인이 가진 한계 역시 지적한다.

 


특히 생각해볼 문제는, 이 영화가 (일반)여성의 성적 욕망을 그려냈다는 점에서 

과연 진보적인 여성상에 접근했는가라는 이슈다. 

애마는 그녀의 욕망을 능동적으로 표현하고 실현한다는 점에서
선대의 여성들 보다 진일보했다고 할 수 있으나, 

정작 그녀가 진정한 사랑을 만났을 때 그녀는 “가정을 지키기 위해” 남편에게 돌아간다. 


p.132



이처럼 <야한 영화의 정치학>은 영화에서 여성캐릭터가 형상화되는 방식을 넘어, 인물의 행동과 결말로 짐작할 수 있는 변화와 관습을 동시에 잡아내며 100년에 걸친 캐릭터의 변천을 예리하게 집어낸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것        


이처럼 시대의 물결에 따른 여성상에 천착하는 동시에, 100년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떨쳐내지 못하는, 떨쳐낼 수 없는 여성캐릭터의 그림자를 이야기한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그림자는 바로 ‘여자귀신’의 재현이었다.


 

저자는 사회에서 가장 억압받는 계층이 괴물, 혹은 귀신 등으로 영화화되어 재현되는 경향이 있다는 영화학자 로빈 우드의 말을 차용한다. 이를 바탕으로 여화 <구미호(1994)>를 사례로 들어 여성이라는 계층이 한국 영화에서는 여자귀신으로 형상화 되어왔음을 보여준다.

 


백문임은 여자귀신이 사또에게 한을 하소연하기 위해 밤마다 등장하는 것은

현생에서는 통제되는 여성들의 입과 귀가 죽어서야 그 기능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함으로써

억압된 여성의 삶과 욕망을 재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포 장르는 여성의 능동성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유일한 장이었던 것이다. 


p. 118



1994년 개봉한 영화 <구미호>로 대표되는 한 맺힌 여자귀신 캐릭터는 책의 말미에서 또 한 번 등장한다. 이 때 저자는 2010년 개봉한 영화 <하녀>를 사례로 가져온다. 영화 <하녀>에서 전도연이 연기한 ‘은이’라는 캐릭터는 부잣집 하녀로 들어갔다가 집안 절대 권력자인 훈(이정재)의 아이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이를 알게 된 집안 사람들은 은이를 강제로 낙태시키고, 훈의 아내가 출산을 축하하는 상황에서 은이는 저주를 퍼부은 뒤 자살한다. 이러한 결말을 두고 저자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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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가 목을 매고 분신하는 영화의 결말은
1960~1970년대에 한국에서 성행했던 여자귀신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살아서 갚지 못한 원한을 죽어서야 사또 앞에 고하는 여자귀신의 서사가
관습적인 치정극과 고급스러운 배경으로 환생한 것이다. 


p.224~225



책은 영화 <구미호>에서 등장한 여자귀신 포인트를 2010년 영화 <하녀>까지 끌고 와 환생시킨다. 이처럼 <야한 영화의 정치학>은 다수의 영화를 통시적으로 전개하면서도 맥락을 놓치지 않고 통찰의 에너지를 마지막 장까지 끌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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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영화에 대한 평론이나 분석을 담은 책에 쉽사리 손을 대지 못한다. 직접 보지 않은 영화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그렇다. 이들 책이 최선을 다해 영화의 줄거리와 캐릭터를 설명하고, 대단히 전문적인 분석을 내놓는다고 해도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해서는 공감 혹은 비판을 하기가 쉽지 않다. 아무리 좋은 노래라도 러시아어나 체코어처럼 알아듣지 못하는 언어를 가사로 하면 감명을 받는 데 한계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한 영화의 정치학>은 굉장히 흥미롭게, 호기심을 잃지 않고 빠르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이유가 44편에 이르는 영화를 '여성'이라는 주제로 정확히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영화가 여성을 대하는 태도가 궁금하다면, 그것이 100년의 시간동안 어떻게 변화했는지 궁금하다면, 주저없이 <야한 영화의 정치학>을 선택하기를 바란다. 때로는 거만하게, 때로는 에로틱하게, 때로는 처절하게 등장하는 다양한 여성들을 읽어내려가며, 지금의 여성캐릭터는 역사 속에 또 어떻게 그려질 것인가를 상상해보기를 바란다.


 



[반채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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