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야한 영화가 보고싶어졌다 - 야한 영화의 정치학 [도서]

글 입력 2020.01.17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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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흐름 위에


 

지나간 과거를 아는 것은 중요하다. 그것은 곧 내가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냉철한 현실인식과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은 내일로 이어진다. 현주소를 확인하고 인정할 때, 우리 앞에는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초석이 놓인다.


어떤 주제가 시대별로 어떤 흐름으로 이어져왔고, 현재 어떻게 변화-발전해나가고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곧 나아가야할 길을 제시하는 작업과도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야한 영화의 정치학’은 표지에서 밝히는 것처럼 ‘191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영화를 통해서 성의 현대사를 짚어보는 책’이다.



야한 영화의 정치학 입체표지.jpg


 

문화는 어떤 역할을 해야할까.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 문화는 단순한 유희거리가에 그치지 않는다. 즐거움과 감정을 전달하는 역할도 있겠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그래서 베르돌트 브레이트는 그의 시 ‘후손들에게‘에서 이렇게 노래하기도 했다. 일부를 인용한다.

 


“참으로 나는 암울한 세대에 살고 있구나! ...중략... 나무에 관해 이야기 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


 

다소 과격한 표현이긴 하다. 그러나 직면한 여러 사회문제 앞에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해 논하는 것조차 일종의 직무유기처럼 느끼는 저 안타까움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가 노래하는 시에는 예술을 통해서도 세상을 변혁할 수 있다는 희망과, 변혁해야 한다는 의무가 동시에 존재한다.


예술은 오랜 역사에 걸쳐 지속적으로 그런 역할을 해왔다. 생각해보면, 우리 나라의 일제 강점기 시대에도 칼과 총으로 싸우는 분들이 있으셨는가 하면, 윤동주 시인이나 김수영 시인처럼 시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분들도 있었다.



김수영 풀 전문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랍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문학에는 옳은 해석이 없다. 다만 더 좋은 해석은 존재할 것이다. 그 기준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첫 번째로는 타당하고 논리적이어서 그런 해석이 가능하다고 여겨져야 한다. 그리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의 변화까지 촉구할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작품의 기준의 하나가 될 것이다.


김수영의 <풀>은 일반적으로 동풍은 억압으로, 풀은 민중으로 해석되어 동풍(바람)에 의해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생명력을 지닌 민중의 생명력을 노래한 시라고 해석되는 경우가 흔하다. 이 해석은 위에서 언급한 두 조건을 만족시키는 좋은 해석이지만, 이처럼 지배적으로 인식되는 해석이 있을 경우 그 그늘 때문에 다양한 해석이 나올 가능성을 차단하게 될 수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이 시를 이런 관점으로만 바라보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더 많은 좋은 해석도 있을 것이다.


사족이 길었으나 이 작품 역시 예술이 할 수 있는 일, 해야하는 일에 대해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금기와 위반의 담론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예술에서의 ’금기와 위반’이라는 주제가 중요함은 틀림없다. 그것이 예술이 해야하는 중요한 역할의 한 축을 담당하기 때문이다. 금기와 위반은 인간 본능의 원초적인 충동을 건드리는 흥미롭고 때론 깊이 있는 주제일 뿐 아니라, 불합리한 사회에 대한 고발의 메세지가 되기도 한다.


꽤 오랜 시간동안 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금기시되어왔다. 유교사상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나,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서양은 물론 많은 문화권에서 ‘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표현하는건 종종 금기시되거나 억압받곤 했다. 그럴수록 ’섹스‘는 그 자체로 금기를 위반하고 억압에서의 해방을 꿈꾸는 주제가 되기도 했고, 저항과 자유 등 각종 담론의 은유가 되었다.


‘야한 영화의 정치학-책을 내며’ 부분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대의 지배 담론과의 충돌 혹은 대항으로 잉태된 문화적 산물임과 동시에 억압이 생산의 근거로 기능했음을 예시하는 사료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영화 속 섹스는 때로는 저항과 혁명의 기제로, 자유의 암시로, 그리고 삶과 죽음의 메타포로 쓰이며 성적 엑스타시의 재현 수단을 초월하는 기능을 하는 것이다.”


 

지배 담론과의 충돌이 오히려 급진적인 주제와 예술적인 은유의 표현 탄생에 기여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시대에 따라 총 6장으로 나누어진 이 책은 영화를 통해 성이 어떻게 위치되고 전달되는지, 또는 억압-해방되거나 소비되는지에 대해 다양한 관점으로 성의 역사를 풀어낸다.

 

 

 

야한 영화를 다시 쓰기


 

총 마흔네 편의 영화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을 받자마자 내가 한 행동은 마흔네 편 중 내가 본 영화가 몇 편인지를 세어보는 것이었다. 부끄럽게도 본 영화가 거의 없었다. 유명해서 누구나 이름을 들어봤을 만한 몇 편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 처음 들어 본 영화였다. 더 많이 공부해야겠다는 반성이 들기는 했지만 흥미가 가는 제목과는 달리 학술적인 책이어서 꽤 부담스러운 책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인상과는 달리 생각보다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었다. 작품을 두고 하는 글쓰기(대표적으로는 비평)이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으려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글이어야 한다. (비평을 읽기위해 작품을 보는 경우도 간혹 있겠지만 흔치 않은 일이다. 그래서 비평을 읽기위해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비평가에게는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대부분의 영화를 아예 모르는 상태에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논의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큰 글씨와 삽입되어 있는 사진들은 책이 독자들에게 너무 부담되지 않도록 배려한, 성공적인 출판 편집 전략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작품을 두고 쓰는 글-비평은 인기 없는 글쓰기다. 그 자체로 분석적이고 어려워지기 쉬운 글이고, 작품을 보지 않은 독자가 비평을 읽게 되는 경우도 많지 않다. 간혹 있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작품을 찾아보기 보다는 쉽게 이탈해버린다. 게다가 작품을 본 사람들 중에서도 비평을 찾아보는 경우는 많지 않기 때문에 독자를 확보하기가 어렵다.


그렇지만 이런 유형의 글들을 작품을 새로운 혹은 깊이 있는 시각으로 다시 한 번 볼 수 있게 만든다. 비평이 작품을 낳는다고까지 표현하는 이유는 그 글쓰기가 작품을 매개체로 세상을 보게 만들거나 세상을 매개체로 작품을 다시 보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야한 영화의 정치학’은 쉽지 않은 책이지만 야한 영화를 통해 세상을 다르게 보게 만들거나, 현대사의 흐름을 통해 야한 영화를 다시 보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런 말로 리뷰를 마치면 적절할까. 나는 이 책을 읽고 몇 편의 영화를 보고 싶어졌다.

 


[김인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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