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영화의 시각적 쾌락, 그리고 여성 - 야한 영화의 정치학 [도서]

<야한 영화의 정치학> 리뷰
글 입력 2020.01.15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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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국내외 주요 ‘야한영화’의 정치학적 분석

 

이 책은 1910년대부터 2010년대 이후까지 영화사에서 에로티시즘이 어떻게 재현되어 왔는지 시기별로 분석했다. 영화에서 여성의 (벗은) 몸은 정상적인 인간적 관계에서의 자리가 아닌, 카메라 앞의 (남성) 감독의 시선, 그리고 그의 배후에 수많은 남성적 시선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도식화되었다. 지난 한 세기 넘게 스크린에서 그녀들의 몸·성은 소비되고, 풍자되고, 전시되었으며 때로는 조롱과 욕망의 대상으로, 때로는 혁명과 진보의 전신(全身)으로 변이를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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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가 제공하는 각종 쾌락 중, 영화가 선사하는 것은 단연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서의 “시각적 쾌락”이다. 즉 관객은 영화를 통해 ‘보는 쾌락’을 충족시키는 것이다.

 

영화가 아이돌이라면 나는 한 분야를 깊이 파는 것이 아닌 다양한 영화를 즐겨 보는 이른바 잡덕이다. 그렇기에 진짜 영화애호가들이 영화의 어떤 부분을 중점적으로 ‘보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줄거리, 색감, 배우 등 다양할 테지만 본 도서를 읽으며 느꼈던 사실은 ‘보는 행위의 쾌락’에 대한 역사는 결코 여성의 (벗은) 몸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학창시절 영화 관련 교양 수업에서 이러한 ‘보는 쾌락’에 대해 배운 적이 있다. 보는 행위의 쾌락은 타인을 시선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얻게 되는 쾌락인 ‘시선애착증’과 거울을 바라보듯 완벽한 자신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데서 오는 쾌락인 ‘나르시시즘’ 두 가지로 나뉜다고 한다. 전자는 타인을 자기 시선 아래에서 부리고 누릴 상대로 ‘대상화’하는 데서 오는 쾌락이며, 후자는 대상과의 ‘동일시’를 통해 이상적 자아의 이미지를 보는 쾌락이다.

 

이때 타자의 대상화에서는 ‘보는 주체’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시각 권력의 구조가 형성되는 것으로, 가부장제 사회에서 보는 주체는 ‘남성’, 보이는 대상은 ‘여성’이 되는 것이다. 이로써 보이는 대상은 ‘볼거리’로 등장하게 된다.

 

하워드 휴즈 감독의 영화 <무법자(1943)>의 여주인공 러셀의 큰 가슴에 대한 논란은 이러한 ‘볼거리’를 잘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다. 러셀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그녀의 완벽한 가슴을 부각시키고 싶은 감독의 욕망에 의해 과한 기법은 물론, 특수 속옷까지 착용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여배우의 역할보다 ‘몸’에 시선을 집중시킨 대표적인 사례일 것이다. 결국 검열을 받았지만 오히려 그것을 이용해 영화는 대성공을 거둔다.

 

구스타프 마카티 감독의 <엑스터시(1933)>도 마찬가지다. 오르가즘의 첫 등장으로 영화사적 기록을 갖는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배우 헤디 라마는 평생 ‘오르가즘 배우’라는 멍에를 벗어나지 못했고, 사람들이 자신을 ‘연기하는 창녀’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고 연급하기도 했다. 그저 보이는 대상, 볼거리로만 존재할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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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엑스터시>의 여주인공 헤디 라마   


 

볼거리를 등장시키려는 의도에 의해 서사의 진행이 방해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할리우드 영화는 이러한 ‘충돌’을 피하기 위해 남성관객의 시선과 영화 속 남성인물의 시선을 일치시킴으로써 볼거리 여성을 제시하게 된다. 결국 영화는 남성관객으로 하여금 ‘볼거리 여성’을 대상화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주인공 남성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보는 쾌락’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처럼 볼거리로 대상화되는 여성은 단순히 쾌락만 주는 존재가 아닌, 불쾌감과 위협감을 줄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여성 그 자체는 남성에게 거세 위협의 상징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이 유발하는 결핍과 거세공포를 비켜갈 수 있는 방법은, 여성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작동하게 된다.

 

70년대에 성행했던 호스티스 영화들이 그러한 작동방식의 대표적인 예시라고 보았다. 시골에서 상경해 힘겨운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성적⋅윤리적으로 타락했다고 여겨지는 여성들. 그들은 결국 죽음 혹은 실종(사회에서의 퇴출)으로 비참한 결말을 맞곤 한다.

 

<가시를 삼킨 장미(1979)>는 그러한 호스티스 영화의 기본 골자를 그대로 따르는 대표적인 영화다. 여자 주인공이 남자와 (성적인) 사랑에 빠지고 육체적인 쾌락을 탐하다 비참하게 맞는 죽음, 저자의 말처럼 현대의 시각에서 보는 줄거리는 참 낯 뜨겁지만 당시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한다(물론 영화사적인 의미는 있음이 틀림없다).

 

혹자는 남성 배우 중심이던 영화 세계에 여성을 메인 배우로 앞세웠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고 간주할지도 모른다. 다만 현대와 마찬가지로, 이 시기의 영화들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특히 “아파요. 꺾지 마세요.”(<꽃순이를 아시나요(1977)>), “우리가 버린 여자, 영자”(<영자의 전성시대(1975)>) 등의 문구는 명백히 남성 관객을 대상으로 한다(예시로 든 문구는 요즘 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다). 그리고 당시 이러한 영화들이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관객들이 영화에 무엇을 기대했는지 생생히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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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순이를 아시나요> 포스터


 

영화분석 수업에서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억난다. 세계적으로 대히트를 친 007 시리즈, 하지만 이는 ‘본드걸의 저주’ 또한 함께 가져왔다고 전해진다. 바로 007 시리즈에 본드걸로서 출연한 여배우의 바로 다음 영화는 흥행에 참패하기 때문에, 여배우들이 본드걸 역할을 고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수님은 ‘본드걸의 저주’는 할리우드에서 지어낸 말도 안 되는 핑계일 뿐이라고 지적하셨다. 첩보액션물인 007 시리즈에서 본드걸은 남성 관객들을 위한 볼거리 여성으로서의 역할을 할 뿐이며, 여배우들 또한 그러한 본드걸의 위치를 모르지 않기에 고사한다는 것이다. 여전히 남성 배우 원톱 중심인 역대 할리우드 영화와 그 속의 여배우들의 역할을 살펴보면 이 같은 의견은 어쩌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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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영화사에서 에로티시즘이 재현되어 온 방식을 1910년대부터 현대까지 시기별로 분석하고 있다. 하나씩 살펴보면서 가장 놀랐던 부분은 ‘보수적’이라고 여겨지는, 실제 검열이 철저했던 구세대의 영화들이 현대의 영화들보다 줄거리가 훨씬 자극적이고, 수위가 강렬하다고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당시 정권 아래 그러한 영화들이 상영되고 인기를 끌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지만 그만큼 관객들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자극적인 장면을 원한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하다.

 

*

 

평소 보는 영화 취향과 거리는 한참 멀지만 접하지 않았던 색다른 분야의 영화를 알게 되는 것은 흥미로웠다. 영화 분석보다 줄거리에 대한 설명이 각 꼭지의 절반 가까이를 차지하는 건 약간 아쉽기도 했다. 빠르게 변하는 세태만큼 영화 속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도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물론 아직은 갈 길이 멀지만 굴하지 않고 변화를 이끌어내려 노력하는 모든 영화인들에게 박수를 건네고 싶다.

 

 


야한 영화의 정치학

-191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영화로 보는 성의 현대사-

 

저자 : 김효정

쪽수 : 248

값 : 22,000원

판형 : 152mm * 225mm

출간일 : 2019년 12월 18일

분야 : 정치사회>페미니즘>, 예술대중문화>영화>영화평론

ISBN 978-89-98204-70-9 (93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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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혜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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