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사랑의 회초리라는 이름을 붙인 건 맞는 아이가 아니다 [도서]

도서 이상한 정상가족을 읽고
글 입력 2020.01.07 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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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도서 <이상한 정상가족>을 읽고

작성 되었습니다.

 

 

 

언니인 제 맘대로 때려도 된다고요?


 


네가 우리 집 장녀니까, 동생들이 네 말 안 들으면 때려도 돼.


 

나와 일곱 살 나이 차이 나는 동생들이 머리가 커지기 시작하면서, 동생들과 다툼이 잦다고 호소하자 엄마께서 말씀이었다. 그 말을 들은 내가 아연실색해서 ‘나한테 애들을 때릴 권리가 어디 있냐.’라고 말씀드렸다. 그 말을 듣고 엄마는 내가 말을 안 듣는 동생들도 때리지 않는 착한 언니라며 칭찬을 해주셨다.

 

당연한 말을 한 것뿐이었는데 ‘착한 언니’가 된 나는 우리나라에서 아직 이런 사고방식이 팽배해 있지 않나 생각해보게 되었다. 연장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때려도 된다는 사고, 버릇이 없는 건 때려서 교정이 가능하다는 사고, 부모님이 자식을 때릴 수 있는 권리를 장자에게 양도해줄 수 있다는 생각, 이 중에서 정작 맞는 주체인 동생들의 의견은 찾아볼 수가 없다. 내가 언니라는 이유만으로 어떻게 그 아이들의 의사 표현도 없이 나에게 저절로 ‘때릴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질 수 있는 걸까? 거기엔 부모는 자식을 때릴 수 있다는 전제가 이미 존재하기에 가능한 것일 테다.

 

 

 

맞을 짓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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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벌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더 큰 이유는 아이들에게 폭력도 사랑이라고 가르치며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 책이 처음에 체벌에 대해 다루기에 나도 내가 어릴 때 맞았던 경험들을 머릿속으로 주욱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나는 ‘그래도 나는 내가 잘못해서 맞았지.’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회초리로 내 몸을 이곳저곳 막 때리신 게 아니라, 주로 나를 엎드려뻗쳐 시킨 뒤 특정 부위만 때렸기 때문에 그건 정말 훈육이었다고 느꼈다. 친구들끼리 부모님으로부터 맞아본 경험 이야기를 나누면 ‘나 정도면 신사적으로 맞았구나.’ 생각이 들도록 이곳저곳 무차별적으로 맞은 친구들이 흔했다. 그런데 이 책을 계속해서 읽어나가면서 서서히 나의 생각이 달라졌다.

 


상대방을 때리려고 위협하는 행동은 폭력이라고 응답했다. 그러나 부모 자녀 관계에서는 생각이 달랐다. 자녀의 습관 교정을 위해서는 부모가 자녀를 때리고 위협해도 된다고 답한 비율은 48.7%이었다. 오직 아이들만이 훈육이라는 이름으로 때리는 것이 용인되는 유일한 집단이다.


 

특히 이 부분을 읽었을 때 어떤 이유로든 부모님의 체벌은 인격체에 대한 구타이고 폭행이라는 것이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어릴 때 나는 젓가락질을 올바른 방법으로 안 한다고 식사하다가 맞은 적이 많았다. 그래서 어릴 때 나에겐 식사 시간이 아빠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공포의 시간이었다. 수학 문제를 잘 못 푼다고 틀린 개수대로 맞았던 일도 생각났다.

 

어렸으니 젓가락질이 서툴렀을 수밖에 없었고, 그때의 나에겐 그 어려웠던 수학 문제들이 노력한다고 단박에 맞출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런 체벌이 이루어지는 게 가능했던 건, 일단 첫 번째로 어린아이였던 내가 약자이고, 두 번째로는 부모님께서는 너는 내 자식이니까 내가 그럴 수 있지라는 가치관 때문이었을 거다. 그때만큼은 내가 박해윤이라는 개인 인격체가 아니라, 부모님의 자식(소유물)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말한다. 자식을 올바르게 키우기 위해서는 체벌이 필요하다고. 그런데 ‘그 맞을 짓’의 기준은 부모가 정하고, 그 부모님의 기준은 너무 주관적이기도 하다. 그때 당시 아빠에겐 자식이 젓가락질을 서툴게 하고, 수학 문제를 못 푸는 건 아주 큰 문제이고 그건 맞을 짓이라는 판단 하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때리는 주체에게는 자신의 기준에서 맞을 일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되면 아주 손쉽게, 언제든 매를 들 수 있다.

 

무엇보다 그 ‘맞을 짓’은 강자에겐 통하지 않는 언어이다. 부모님들도 사람이기에 분명 실수를 하실 수도 있고, 심각한 잘못을 저지를 때도 있다. 하지만 자식들인 우리들이 부모님을 향해 ‘맞을 짓’ 하셨네,라고 말하진 않는다. 결론적으로 맞을 짓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행위를 하는 자가 약자이기만 하다면 어떤 이유로든 성립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맞을 짓은 강자인 이가 어떤 잘못을 해도, 명백한 잘못을 한다 할지라도 붙여지지 않는 표현이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면 죽어나가는 생명들이 생긴다.




울산 아동학대 사망사건(37) 반면 아이는 죽도록 맞으면서도 계속 가해자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했고, 요리도 잘하는 예쁜 엄마라고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 데이트 폭력의 피해자는 연인을 잃는 게 두려워 가해자의 말들을 내면화했다면, 학대로 희생된 아이는 살아남기 위해 가해자의 논리를 내면화했다.


 

어릴 때 엎드려뻗쳐를 한 상태에서, 빗자루로 맞으면 내 허벅지 부분은 빨간 선이 죽죽 그어지고 부어올랐다. 아빠는 그렇게 날 때리고 나시면 밤에 내 허벅지에 약을 발라주시곤 하셨다. 그때의 내가 그것에 크게 감동을 해서 친구들에게 일종의 자랑을 했던 일이 기억난다. 지금 성인이 되고 이 책을 읽으며 생각을 해보니, 어린 시절의 내가 부모님의 논리를 내면화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물론 약을 안 발라주시는 것보다는, 발라주시는 게 더 좋은 일인 건 자명하지만 이왕이면 약을 바를 일이 없게 해주셨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그때로부터 십여 년이 지나고 나서야 생각해보게 되었다.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영영 생각해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성인이 된 우리가 '그래도 자식을 키우는데는 체벌이 필요해' 라든가, '나도 맞고 자라서 잘 자랐어'라고 말한 다면, 그건 이미 폭력을 휘두른 주체의 생각이 우리의 안에 내면화 되었기 때문이다.

 


살인이 아닌 상해치사죄를 적용해 징역 6년을 선고한 일도 있다. 한 시간 반 동안 주먹으로 폭행하고 목검으로 온몸을 30여 차례 때린 행위를 부모의 설득과 훈육으로 볼 수도 있다니 그저 아연해진다. 자녀는 부모의 소유이고 부모가 가르치는 행위에는 폭력이 수반될 수도 있다는 통념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지를 짐작게 한다.


 

책 <이상한 정상가족>에서 판사가 살인죄를 물지 않고, 폭력을 훈육으로 바라본 사건이 소개됐다. 경찰에 수차례 신고했으나 집에 돌려보내져 사망한 아이들의 이야기도 읽게 되었다. 이 부분을 읽고 아이들을 위해서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예민하게 반응하고 용인하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겠다 생각했다. 그럴 수 있지, 잘 자라기 위해선 체벌이 필요해라고 넘기다 보면 불합리한 폭력에 노출되는 아이들이 생기고 끝내 죽음을 맞이하는 아이들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부모 체벌 금지법이 도입되길 꿈꿔본다.




부모 체벌금지법이 제정됐을 때 당시 한 프랑스 신문은 “미쳐버린 스웨덴인들” 같은 헤드라인을 붙여 보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초기의 비판과 회의에도 불구하고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스웨덴에서는 아이를 때린 적이 있다는 부모가 10%를 밑돈다. 아동학대로 인한 사망도 대폭 줄었다. 2000년 이후에는 학대로 숨진 아이들이 거의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시민의식이 우리나라보다 앞서있고 복지국가인 스웨덴에서도 부모 체벌금지법이 제정됐을 때 반발이 엄청났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부모 체벌금지법이 도입되면 어떻게 생각해보면 신문 헤드라인 제목이 벌써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내 자식도 내 맘대로 훈육 못해...' '국가의 심각한 사생활 침해...' 하지만 강자와 약자가 대립하고 있을 때 중립을 지키고 있으면 결국 강자 편을 들어준 것이라는 말처럼, 아이들은 가족 내에서 자신의 발언권 하나 내기 어려운 철저한 약자다. 그 아이들을 향한 폭력이 일어났을 때 국가라는 공공성의 개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친밀한 사적 공간에서 아이들은 자신이 폭력을 당해도 잘못되었다는 생각 자체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시행한 뒤, 학대로 숨진 아이들이 획기적으로 줄어들 수 있다면 도입이 필요하다고 본다.

 


심지어 부모와 자녀 관계에서도 서로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한 진정한 사랑은 불가능하다고 바라본다. 국가는 이런 굴욕감에서 개인을 해방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의존적이고 굴욕을 강요하는 권력관계에서는 진정한 사랑이 불가능하다,라는 부분을 읽었을 땐 코끝이 찡해지기도 했다. 그렇다. 권력관계에서 행해지는 어떤 행위든 그것은 사랑이 될 수 없다. 친밀한 공간에서 권력관계에 의한 모욕과 체벌이 일어난다면 그 불합리한 일을 막을 수 있는 건 국가뿐이다. 한 아이를 키우는데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을 뒤집어 보면, 한 아이를 죽이는데도 마을이 필요하다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 국가가 안전망을 만들어놓지 않고, 어떤 제재도 하지 않는다면 국가가 한 아이의 죽음에 공범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어린애가 아니라, 작은 인간. 개별적 인격체로 봐야 할 필요성


 

이 글에서는 체벌에 대해서만 다뤘지만, 아이를 살해 후 자살하는 것을 동반자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나, 과보호로 학원을 뺑뺑이 돌리고 좋은 성적이 나오지 않으면 언어적 폭력을 하는 것 등등 모두 아이를 개별적 존재가 아니라 부모의 부차적인 존재, 소유물로 인식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다.

 

나도 나의 동생을 지나치게 과보호하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내 동생들이 그리 어리지 않는데도 –동생들 표현으로는-‘애기 취급’을 한 적이 많았다. 그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동생들이 나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엄마랑 언니는 우리를 너무 애기 취급해, 아빠만이 우리를 동등한 사람으로 봐줘.


 

그 말을 듣고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을 받았다. 애기 취급을 하는 것은, 내가 동생을 사랑해서 나온 선한 의도와는 상관없이 동생들에게는 자신이 동등한 사람대우를 받는다는 걸 못 느끼게 하는 것이었다. 어린아이라는 틀에 맞춰놓고 나도 모르게 동생을 귀여운 대상, 내가 도와줘야 할 대상으로 보며 타자화를 하고 있었구나 반성하게 되었다. 아동은 어린애, 아기가 아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 몸의 크기만 작을 뿐 무한한 하나의 세계를 품고 있는 인격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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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윤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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