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누군가의 일상이었던 "서울의 전차" [시각예술]

도시의 기억과 시민의 일상을 담고 달렸던 서울의 전차
글 입력 2020.01.07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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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하면 떠오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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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 트램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 사람들은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까? 홍콩이나 유럽 어느 도시의 선로 위를 주행하는 트램의 모습을 가장 많이 떠올릴 것이다. 프랑스에서만 해도 19개의 시에서 트램을 운행하고 있다. 유럽에서는 트램이 운행하는 모습이 일상적이지만 우리에게는 이국적인 풍경이다.


3년 전, 혼자 처음 홍콩으로 여행을 떠났었다. 홍콩에서의 매 순간이 다 좋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은 당시 힘들었던 순간도 웃으며 떠올리고 나름 낭만적인 날들이었다고 여긴다. 힘들었던 기억은 좋았던 기억을 떠올릴수록 희석된다. 홍콩에서 트램을 탔을 때가 그 좋았던 기억들 중 하나였다. 트램 안에서 보는 홍콩이, 홍콩의 전경 속 트램이 주는 감상은 서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이기에 더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새해를 맞아 올해 열리는 전시회가 뭐가 있을까 찾아보며 이런저런 내용을 덤덤히 훑어보던 중 “서울의 전차”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서울역사박물관과 한국전력공사가 공동으로 120년 전 전차 개통을 기념하며 여는 전시회는 한성이 경성으로, 그리고 오늘날의 서울이 되기까지 전차의 개통과 운행 종료의 모습을 선보인다고 소개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는 알 수 없는, 서울에서 전차가 일상적인 시민의 대중교통이었을 때의 날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박물관을 방문했다.

 

 

 

서울의 전차, 그 시작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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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전차의 철로는 운반을 편리하고 빠르게 하여 백성과 나라에 이익을 주자는 것입니다.”


- 1899년(고종 36) 5월 30일

 

 

전시는 전차가 1899년 개통한 후 1968년에 운행을 종료하기까지 역사의 흐름에 따라 겪은 전차의 변화 및 그를 이용한 시민들의 일상을 조명한다. 그 시작은 1887년 경복궁 건청궁에 전깃불이 들어오고 1897년에 대한제국이 선포된 후 전차가 개통된 시점이다. 전기 및 전차의 등장은 당시 근대화를 이루려는 고종황제의 열망에서 비롯되었는데 이에 대한 사료 기록 및 한성전기의 미국 파트너였던 보스트워크가 소장했던 당시 모습이 담긴 사진첩 외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물자의 운반을 빠르게 하는 등, 신문물을 들여 나라를 발전하고 백성을 편하게 하려는 것이 고종 황제의 뜻이었겠지만, 모두가 전차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아니었다. 개통 10일째 되는 날에 5살 아이가 전차에 치여 죽은 사고가 발생한다. 이에 성난 민중들이 전차를 전소하는 등, 전차에 부정적인 시각 및 적시감을 드러낸다. 이는 전시되어 있는 관련 사고 및 사건이 담긴 기사와 자료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전차에서는 차비를 내면 누구라도 1등석에 탈 수 있기에 반상 및 여성과 남성을 나누는 공간의 구별이 무너지며 당시 사람들의 의식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우리는 여성들이 우리 차를 탈 수 있다고 광고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에서 여성의 권리를 향한 첫 걸음이다. 이전에는 여성들이 낮에 거리에 다니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다.”


- 보스트워크의 신문 인터뷰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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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시기에 4개였던 전차 노선은 한일병합 후 그 수가 늘어나 일제강점기 말인 1943년에는 그 노선이 16개가 된다. 대부분이 남촌과 북촌 노선 위주였는데 남촌 노선은 주로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했던 곳이었기에, 북촌 노선은 조선총독부에 출퇴근하거나 관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편의를 위해서 형성되었다. 철저히 일본인의 편의를 위한 노선이 늘어나는 과정에서 경성의 성문과 성벽은 훼손되었다.

 

시간이 흘러 경성의 행정구역이 계속 확장되며 동시에 교외 개발이 이어졌다. 전차 노선도 그에 맞춰 개발되었다. 교외로의 노선 부설은 시민들의 생활권을 확대했는데, 승객과 물자 수송이 주였던 전차의 임무는 경성의 오물 처리까지 맡으며 도시와 시민들의 생활에 더 깊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전차가 함께 했던 일상과 생활은 당시의 문학 작품에서, 또 유행가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도 전차는 수많은 사람들을 맞고 보내며, 전차도 자동차도 이루 어디를 가고 어디서 오는지, 심히 분주하다."


- 임화, <다시 네거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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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서울의 인구가 급증하며 만원 전차 문제는 시간이 흐를수록 극심해졌다. 더 많은 노선의 부설로 시민들이 다양한 여가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는 이점도 있었고 여전히 전차는 당시 대표적인 서울의 교통수단이었지만 점차 자동차 위주로 개편되는 도로 상황에 전차는 점점 설 곳을 잃게 된다.

 

버스를 중심으로 한 교통 시스템의 변화로 전차를 이용하는 승객 수는 점점 감소한다. 결국 서울시가 세종로 지하도 건설을 위해 한국전력으로부터 전차 사업을 인수한 후, 전차 운행을 일부 중단시키면서 전차 철거 수순을 밟는다. 그리고 1968년 11월 29일 운행을 마지막으로 근대화의 시작을 대표했던 전차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전차는 계명(啓明)의 역군(役軍)으로서 문명의 이기로서의 제 기술을 다하는 동안 서민들에게는 너무나 숱한 풍물화를 남겨두었다. 이제 68년의 묵은해와 더불어 70년의 노병은 고철만을 남기고 사라진다”


- <전차여 안녕...70년의 풍물지 남기고>, 1968년 11월 30일자 경향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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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의 과거, 그리고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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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의 외부에는 다른 야외전시물과 함께 전차 381호가 전시되어 있다. 전차 381호는 1930년대에 제작되어 1968년 11월까지 약 38년간 서울 시내를 운행했다. 현재 남아있는 전차 두 대 중 하나이며 다른 하나인 전차 363호는 국립서울과학관에 보존되어 있다. 전차 381호는 어린이대공원에 보관되어있던 것을 박물관으로 옮겨와 부식이 심했던 것을 자료 조사와 고증을 통해 복원한 것이다.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된 전차에는 헤어지는 가족의 모형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아들을 떠나보내며 배웅하는 엄마와 다른 가족, 곧 출발할 전차 안에서 그를 안타깝게 쳐다보는 아들의 모습이란. 대중교통은 사람들의 일상 외에도 만남과 헤어짐이라는 이야기의 장소가 되기도 하는데, 70 년간 도시를 누볐던 전차는 얼마나 많은 삶의 모습을, 만남과 헤어짐을 담았을까.
 
전시를 관람하며 대전광역시가 도시철도 2호선을 노면열차, 트램으로 2025년 개통할 예정이라는 소식이 떠올랐다. 트램이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이색적인 대전만의 풍경으로 자리 잡으며 긍정적인 홍보 수단이 될 것인지 아니면 우려하는 이들의 말처럼 도시의 교통 순환에 악영향을 줄 것인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전차가 함께했던 과거의 흔적을 돌아보며, 미래에 다시 등장할지 모를 전차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역시 상상해본다. 도시에 어떤 삶의 흔적과 기억이 또 새로이 남겨질지, 과거의 그것과 오롯이 같을 것인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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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지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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