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전 제 그림이에요 : 영화 "고흐, 영원의 문에서"

글 입력 2019.12.25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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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보는 것을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어"


가난과 외로움 속에 살던 화가 빈센트 반 고흐는 운명의 친구 폴 고갱을 만난다. 그 마저도 자신을 떠나자 깊은 슬픔에 빠지지만, 신이 준 선물, 자연의 아름다움을 담기 위해 몰두한다.

 

불멸의 걸작이 탄생한 프랑스 아를에서부터 오베르 쉬르 우아즈까지... 빈센트 반 고흐의 눈부신 마지막 나날을 담은 기록.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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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소리가 들리는 아주 가까운 영화


 

멀미가 날 것 같다. 장면 하나하나를 담아낸 카메라는 아주 가깝고 또 불안정하게 움직인다. 고흐뿐 아니라 어떤 인물, 어떤 오브제를 담던 아주 가깝게 담아낸다. 영화가 시작하고 한동안은 적응을 하기가 힘들었다. 호흡은 아주 길다. 두 시간이 채 되지 않는 영화의 러닝타임은 세 시간처럼 느껴진다. 영화가 지루해서가 아니다. 가파르지만 아주 긴 숨을 이어가는 이 영화는 그를 바라보는 나의 호흡마저도 그렇게 만든다.

 

시선을 편히 둘 곳 없이 화각과 초점은 계속해서 변화하고 화면의 반이 뿌옇게 블러가 들어간다던가 화면이 모든 색을 잃어 모노톤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고흐가 바라보는 세상은 이리도 불안정했던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그것은 고흐 내면의 불안함 그 자체였을까.

 

적어도 확실한 것은 고흐가 보는 자연과 세상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고흐가 어떤 그림을 그렸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는 그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가를 보여준다. 신기하게도 영화가 끝을 내릴 때쯤 이미 나는 고흐가 되어 있었다. 총성이 들리고 양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자신의 그림에 둘러싸여 관에 누운 고흐를 봤을 때는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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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이상을 가진 두 화가


 

영화는 고흐가 태어날 때부터 눈을 감을 때까지의 전기를 그려낸 영화가 아니다. 고흐의 말년을 담아낸 이 영화는 고흐에게 떼어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인물인 고갱을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둘은 너무나도 달랐다. 고갱은 이를 베낀다고 표현했는데, 이미 완성되어 있는 작품을 자연에서 꺼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흐와 기억과 상상으로 새로운 것을 그려내고자 하는 고갱은 애초에 다른 이상을 꿈꿨다. 그러니 그들은 의견이 맞는 일이 없었다.

 

그럼에도 고흐는 고갱을 사랑했다. 집착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고갱에 대한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떠나야 함을 알렸을 때 고흐가 질렀던 비명과 메아리처럼 반복되는 고갱의 말들 그리고 초점 없이 흔들리는 화면은 고흐의 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실제 알려진 바로는 영화처럼 고흐 스스로 귀를 잘랐다는 이야기뿐 아니라 고흐와의 말다툼 중 화가 난 고갱이 고흐의 귀를 잘랐다는 이야기도 있다. 고흐의 죽음조차 자살이었는지 타살이었는지 불분명하다. 이렇게 선명치 못한 이야기들처럼 고흐의 기억도 참으로 흐릿했다.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선 사람 마냥 기억의 조각들을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이 비틀거리는 화가의 기억의 빈 자리는 자연이 대신하는 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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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후 빛을 발하다


 

고흐의 아버지는 목사였고 고흐도 한때 목사를 꿈꾸었다. 고흐 대사 중 예수의 말을 인용한 것이 많은데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정확한 대사는 기억할 수 없지만, 예수도 죽은 후 알려졌다는 사실과 함께 자신은 시대를 잘못 태어난 것 같다고(일찍 태어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는 고흐의 죽음에 대한 일종의 암시 같았다.

 

고흐의 작품은 죽음 후 테오의 부인인 요한나가 고흐의 작품으로 전시를 열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 고흐의 죽음이 자살인지 타살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고흐가 죽을 때까지 동생 테오에게 썼던 668통의 편지들을 읽어본다면 그가 얼마나 정신적이며 물질적인 모든 방면으로, 테오에게 의지했으며 숨김없이 자신의 이야기들을 나눠왔는지를 알 수 있다. 테오 앞에서 고흐는 무력한 아이 같아 보였다. 고흐에게 있어 테오와 테오의 부인은 고흐가 고갱에게 가졌던 애착만큼이나 아주 커다란 존재였을 것이다.

 

그의 인생은 부재였다. 그의 그림은 팔리지 않았고 고갱은 그를 떠났으며, 그의 이름조차 그의 것이 아니었다. 고흐보다 먼저 태어나 불행히 죽음을 맞이한 형의 것이었던 '빈센트'라는 이름은 후에 태어난 고흐의 것이 되었고, 빈센트는 형의 무덤에서 자신의 이름을 발견했다. 그렇기에 항상 그 자리에서 온전히 자신의 존재를 숨결로 답해주는 자연에 기대며, 그는 그때부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괴리를 느끼고 존재에 대한 물음을 끝없이 던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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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제 그림이에요


 

정신병원에 들어갈 때까지도 그는 그림을 그리게 해달라고 했다. 그 확답을 들으려 한 번 더 질문을 던질 정도로 그에게 그림은 전부였다. 그림은 그의 존재에 대한 부재를 잠시나마 해소해줄 수 있는 것이지 않았을까.

 

고흐는 아주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렸다. 이 때문에도 고갱과의 의견 충돌이 있었는데, 시도 때도 없이 산발적으로 퍼져 나오는 잡념들을 떨쳐내기 위해서였을까 다음 획을 긋지 않으면 이전의 그림이 모두 사라지기라도 할 듯 빠르고 두텁게 물감을 얹어냈다.

 

고흐는 자연을 그렸다. 존재하는 자연의 모습 그대로. 별이 빛나는 밤을, 꽃 피는 아몬드 나무와 복숭아나무를, 해바라기를, 그가 생을 마감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밀밭을 그리고 나무뿌리를 그렸다. 그렇게 붓을 들어 자연의 작품들을 하나 둘 꺼내주었다. 자연으로부터 꺼낸 것은 어쩌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이었을지도 모른다.


고흐는 노란색을 좋아했다. 작열하는 태양빛을 닮은 이 순색의 노랑은 고흐의 그림 이곳저곳을 가득히 채웠다. 그가 왜 이렇게 노란색을 사랑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아주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흐릿하고 불분명해서 손에 쥘 수 없는 덩어리 같은 고흐의 인생 속 매일 마주하는 팔레트에서, 침실의 창으로 들어오는 태양에서, 들판에서 가장 명료한 존재가 노랑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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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두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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