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추상적 대상의 형상화. 문학과 예술에 빠져간 이유 [공연예술]

<엘리자벳: 죽음마저 사랑에 빠지게 한 아름다운 황후> 돌이켜본 리뷰
글 입력 2019.11.15 0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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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이었다. 당시 ‘추상적 대상의 형상화’ 개념 설명은 황진이의 시조로 시작되었는데 이 배움은 내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말로 의미를 전한다는 게 그렇게도 매력적인 일인 줄에 대해서 말이다.

 

예전부터 나는 글쓰기를 좋아했지만 논리적인 논평이나 설명문을 읽기에 바빴고 특히 차가운 문체를 본받고 싶어 했다. 감정은 읽을 수 없고 사실과 핵심만으로 상대를 확실하게 설득시켜버리는 말투에 반했었다. 문학에선 감성을 배우고 타인의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논설문만큼의 시니컬한 말투와 냉정함은 부족했기에 내 이목을 끌진 않았었다.

 

동짓(冬至)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구비구비 펴리라

 

[동짓(冬至)달 기나긴 밤을/황진이]

 

애틋함이라는 감정을 이렇게도 매끄럽게 포장할 수 있다니. 수업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나는 감정이 직접적인 단어로 전해짐을 쑥스러워했던 거였다. 시조를 보면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지만, 문장 전체를 통해서 의미는 전해진다. 내용에는 은유적으로 모든 게 숨겨져 있지만 추측을 통해 쉽게 의미 파악이 가능하다. 동짓날은 1년 중 가장 밤이 긴 날이고, 그런 날을 봄까지 보관하고 있다가 임이 오는 날 밤에 길게 보내고 싶다고.

 

사실 이 시조를 시작으로 추상적 대상을 형상화해버린 작품과 상황을 나는 점차 찾아내기 시작해갔다. 이별을 시간과 슬픔이 입을 맞추었다고 표현한 가사와 선과 악, 원고를 의인화한 작품까지 접하면서 암호 아닌 암호 찾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시니컬한 문체에 빠져 감정을 절제하고 중립적인 삶을 사는 게 가장 멋있는 건 줄만 알았는데 나는 나름 특이한 방법으로 변화하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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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엘리자벳: 죽음을 형상화하다.

 

 

사람들은 눈으로 보지 않거나 직접 경험하지 못하면 잘 믿지 못한다. 특히나 어떤 개념을 전달하고자 할 때 그것이 추상적이라면 전달받는 이의 이해도는 낮아진다. 무대 위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작품의 메시지를 관객들에게 좀 더 확실히 전달하기 위해, 공연계에서는 예전부터 추상적인 개념을 의인화하는 방법을 택해왔다고 한다.

  

유럽 제일의 명문가, 오스트리아의 함스부르크 왕가에는 프란츠 요제프 황제와 ‘씨씨(Sisi)’라 불리던 “왕실의 가장 아름다운 여인” 엘리자벳 황후의 ‘러브 스토리’가 존재한다. 자유분방한 삶을 영위하던 소녀는 어린 나이에 사랑에 빠지고 그 후 엄격한 규율과 의무만이 강조되는 궁정에 갇힌 황후가 된다. 아름다운 황후에게 쏠리는 대중의 지대한 관심은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시어머니 소피 대공비의 억압과 훈육을 더욱 심하게 만들었고, 아이들마저 빼앗기고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황후는 점차 소피 대공비와 맞서기 시작했다.

 

사랑만을 믿었겠지만 현실은 변해갔고, 숨 막히는 감시와 남편의 외도, 어린 딸의 죽음을 겪으며 황후 엘리자벳은 처참히 무너져갔다고 한다. 결국 황후는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내려놓은 채 극소수의 수행원만을 대동하고 유럽의 여러 도시를 떠돌다 이탈리아의 무정부주의자 루케니의 칼에 찔려 사망하였다.

 

황후가 꿈꾼 건 단 하나, 자유로운 삶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황후가 어쩌면 죽음을 스스로 원했을 거라는 상상력을 바탕으로 마침내 뮤지컬이 탄생되었다. 즉 엘리자벳 황후의 삶에 드리워진 죽음과 비극의 그림자를 토드(죽음을 의인화)라는 인물의 유혹과 둘의 만남으로 표현하였다.

 

대다수의 평을 보면 ‘죽음’이라는 존재가 엘리자벳의 주변을 맴돌고 그녀가 불안한 선택을 하거나 고통에 흔들릴 때마다 자신과 함께 춤을 출 것을 요구하고 유혹한다는 설정은 꽤 섬뜩하다고 한다. 나 또한 섬뜩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지만 최고의 매력을 가진 유혹이 아닐 수 없다고 여겼다. 너무 힘든 상황에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음을 떠올린 적은 있지 않을까? 실제로 자살을 시도하진 않지만, 현실에서 버티고 견뎌내는 것보다 이럴 바엔 죽는 게 낫다고 추측하거나 이를 말로 뱉어버린 적은 많을 것이다.

 

내가 겪기도 주변에서 보기도 했던 사실이기도 하다. 그래서 줄거리에 집중했고, 뮤지컬 관람시에도 의미를 같이 느끼고자 했었다. 이전에 깨달은 바지만 나는 감정이 직접적인 단어로 전해짐을 쑥스러워하기에, 죽고 싶다고 처절하게 울부짖는 주인공을 보는 것이 아닌 의인화된 대상으로 나타난 죽음과의 만남을 주의깊게 바라볼 수 있었다. 내게 의미는 작품 전체를 통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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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드(죽음)는 매력적이다. 어쩌면 죽음은 엘리자벳에게 현실을 회피하고 삶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존재처럼 비치기도 하지만 사실 그가 대변하는 것은 궁극적인 삶의 끝과 그녀의 진실을 의미한다.

 

작품에서 죽음은 인간이 아닌 '죽음' 그 자체다. 그러다 엘리자벳을 만났고, 엘리자벳을 따라다니며 그녀가 자신을 택하기를 바랐는데, 결국 엘리자벳이 죽음을 택하는 상황 그 이후부터 자신은 엘리자벳을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된다.

 

자신은 죽음 그 자체이지 사후세계가 아니니까, 정말 죽는 그 찰나에만 엘리자벳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작품에서는 엘리자벳과 토드의 입맞춤으로 엘리자벳의 죽음을 표현했다. 입을 맞추는 찰나의 순간이 토드가 엘리자벳을 가졌다고 볼 수 있고 그 후부터는 만날 수 없었다고 바라보는 게 정확하다.

 

죽음이라는 추상적 관념을 의인화시켜 작품에 녹여냈다는 점만으로도 나에게는 꽤나 신선했다. 추상을 구체화한다고? 그것도 간접적인 은근함이지만 결국 모든 이가 파악 가능한 표현으로.

 

이보다 더 섬세한 작업이 있을까. 내가 감성을 드러내고자 노력하고 문학과 예술에 눈 뜨게 된 시점은 추상적 대상이 눈에 보여진 그때부터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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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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