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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에세이


 

누군가는 청춘을 성장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가능성이라 부른다.

   

더 나은 도시, 더 큰 가능성, 더 눈부신 미래. 우리는 여전히 탈출을 꿈꾸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그 방향은 언제나 비슷하다. 지금 있는 곳을 벗어나는 것. 어쩌면 청춘이라는 단어 자체가 하나의 탈출 서사일지도 모른다.

 

<올 그린스>가 ‘초록’이라는 단어에 기대는 방식은 생명이나 희망 쪽이 아니다. 아직 익지 않은 것, 탐욕스러운 것, 그리고 손에 쥐는 순간 이미 변질되기 시작하는 것. 영화는 지금의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은 충동을 가장 불온한 방식으로 꺼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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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세 여고생을 중점으로 흘러간다.

 

보쿠 히데미는 가정과 학교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힙합이라는 언어 안에 스스로를 가둬왔고, 미루쿠는 밝은 표정 뒤에 발설할 수 없는 무언가를 켜켜이 쌓아왔으며, 이와쿠마는 재능이 있음에도 그 재능을 어디로 향해야 할지 알지 못한다. 세 인물이 대마초 재배라는 선택으로 묶이는 과정도 생각보다 납득 가능하다. 영화는 이들의 선택을 정당화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쉽게 단죄하지도 않는다.

 

다만 판단을 유예한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것은 우정이 아니라, 각자의 결핍이 서로에게 맞물리는 방식이다. 그리고 그 결합이 만들어내는 것은 연대이자 공모다. 단숨에 삶을 바꿔줄 수 있을 것 같은 거금. ‘초록’을 통해 만들어낼 수 있는 일확천금의 가능성은 이들에게 출구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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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핵심은 ‘청량함과 불미스러움의 공존’이다.

 

표면적으로는 여름의 공기처럼 가볍고 투명한 청춘 영화의 결을 띠지만, 그 내부에는 끊임없이 어긋나는 윤리와 욕망이 자리한다. 예컨대 <스윙 걸즈>(2004)가 음악을 통해 공동체의 긍정성을 회복하고, <릴리 슈슈의 모든 것>(2001)은 청춘의 고립과 파괴를 인터넷과 음악이라는 감각으로 확장했다면, <올 그린스>는 이 두 축 사이 어딘가에 서 있다. 함께 무언가를 도모한다는 점에서는 전자와 닮아 있지만, 그 목적과 방향은 후자에 훨씬 가깝다.

 

‘함께’이지만 결코 구원으로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 이 영화의 불온함은 어둠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밝음에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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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초를 키운 비닐하우스가 터지며 일종의 ‘파티 현장’이 된 졸업식. 질서와 규범이 뚜렷해야 할 공간은 순식간에 무너진다.

 

이 장면이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해방감을 느낀다. 강당에 깔리는 테크노 음악은 사회적 역할과 규범이 일시적으로 사라지고, 그 안에서만 허용되는 감정의 과잉을 의미한다. Daft Punk나 일본 테크노 신의 반복적인 비트처럼, 이 장면의 음악은 사고를 멈추고 감각을 전면으로 끌어올린다. 그래서 이 장면은 단순히 ‘마약의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청춘이 잠시 경험하는 무중력 상태, 즉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무엇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순간을 시청각적으로 구현한다.


카메라는 이 장면에서 히데미, 미루쿠, 그리고 이와쿠마를 각기 다른 공간에 둔다. 원인과 결과 사이에서 의도적으로 행위자를 지우고, 각자의 공간에서 각자의 미래를 맞이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학교 밖으로 탈출을 감행하는 히데미, 누군가를 진심으로 응원하는 미루쿠, 만화를 그리자는 이와쿠마. 세 사람은 같은 시간을 공유하지만, 같은 장면 안에 있지 않다. 편집은 이 세 개의 순간을 교차시키면서도 하나로 봉합하지 않는다. 공모는 끝났고, 각자의 다음이 시작된다.

 

세 학생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방향키를 돌렸다는 사실만을 연기와 불길, 그리고 학생들의 웃음으로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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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 관용어로 ‘All Green’은 신호등이 모두 초록불인 상태, 즉 아무런 제지 없이 나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시에 ‘green’은 미숙함과 탐욕을 암시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여기에 영화 속 대마초라는 물리적 초록이 겹치면, 제목은 세 겹의 의미를 동시에 품게 된다. 거침없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그 욕망이 아직 미숙한 판단에서 비롯된다는 사실. 전부, 완전히 온통 초록으로만 가득 찬 세계. 그러나 온통 초록인 세계는 역설적으로 가장 위험한 세계다. 경고도, 정지도 없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청춘을 하나의 완결된 이미지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끊임없이 깨지고, 반사되고, 왜곡되는 거울 조각에 가깝다. 때로는 산산이 부서지기도 하지만, 다른 조각들과 이어 붙일 때 비로소 하나의 상을 이룬다. 히데미, 미루쿠, 이와쿠마,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은 각자의 파편을 들고 서로에게 다가가고, 그 불완전한 조합 속에서 잠시 ‘전체처럼 보이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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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올 그린스>는 탈출에 대한 영화라기보다, 탈출을 가능하게 만드는 감정에 대한 영화에 가깝다.

 

왜 우리는 그렇게까지 해서 떠나고 싶어지는가. 그리고 그 욕망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이 영화는 그 질문에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가장 위험하고 가장 눈부신 순간을 길게 보여준다. 선택이 윤리로 환원되기 직전의 시간, 감정이 아직 판단되지 않은 상태를 보여주며 다시 관객에게로 질문을 돌린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게 된다. 잘못된 선택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선택이 가능해지는 감정에 공감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청춘은 늘 그런 식으로 지나간다. 옳고 그름이 아니라, 가능성과 충동의 형태로. 그리고 우리는 그 조각들을 뒤늦게 이어 붙이며, 그때의 나의 ‘초록’이 무엇이었는지 찾는다.


초록은 종종, 가장 눈부신 얼굴로 우리를 배신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배신 속에서, 비로소 무언가를 선택할 용기를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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