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자화상, 거울 밖의 나는

나를 사랑하나요?
글 입력 2019.11.01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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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모든 사람이 명작이라고 감탄한다고 해도 사람에 따라 감상이 달라질 수 있다. 모든 사람의 감상이 천편일률적이라면 얼마나 재미없을까. 당장 나에 대한 평가도 사람마다 다 다르기 마련이다. 예술가조차도 모두 똑같은 평가를 늘어놓는다면 그리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이 내게 그랬다. 모두가 대단하다고, 멋지다고 말하지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미술 역사에 큰 의의가 되었다는 건 부정할 수 없었으나, 그림을 볼 때의 감상은 항상 타인과 달랐다.

 

별이 빛나는 밤을 처음 본 건 초등학생 때였다. 짧고 거친 붓질로 이루어진 그림은 어딘지 우울하고 차갑고 무섭게 느껴졌다. 비가 오고 난 뒤 축축한 밤을 연상시켰고 외롭고 고독하게 보였다. 별빛은 잉크에 눈물이 닿아 번진 것처럼 빛이 퍼져나갔고 바람은 한자리에서 웽웽 불었다. 반 고흐의 작품은 대부분이 볼 때마다 불안했고 불편했고 기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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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는 빈센트 반 고흐를 가장 좋아했다. 미술 수업 때 그의 그림을 모작할 정도였다. 그와 나의 취향이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는 있었지만, 어디에서 매력을 느끼는지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반 고흐의 그림을 좋아한다면, 나도 좋아할 수 있지 않을까. 친구의 휴대전화기 액정 너머로 여전히 뒤틀리고 우중충하게 보이는 카페 그림을 보며 생각했다.

 

굳이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보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들른 건 오직 뮤지컬의 영향이었다. 뮤지컬 자체에 깊게 빠지진 않았는데, 가사가 좋아서 들을 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아져 오랫동안 좋아했다.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의 넘버에 이런 가사가 있다. 형 그림에는 다정함이 느껴져. 다정함은 사람을 감동하게 하잖아? 그런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는 것이다. 어디에 다정함이 있는지. 내가 본 고흐의 그림은 여전히 어둡고 무서운 이미지가 강렬했으니까. 흥미가 없으니 작품명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반 고흐를 검색하면 나올 만한, 유명한 작품 모두 그렇게 무서웠다. 호기심과 오기가 생겼다. 왜 세상 사람들 다 아는 반 고흐 그림의 다정과 따뜻한 이미지를 나만 모르나. 어쩌면 사람들은 평론가 몇 명의 말에 그렇다니까 그런 거겠지 수긍하는 걸지도 몰랐다. 만일 그런 거라면 반 고흐는 내 취향과 맞지 않고, 어둡게 느껴진다며 내 안의 작은 사건에 종점을 찍을 요령이었다.

 

반 고흐의 그림을 실제로 본 건 암스테르담에서가 아니었다. 런던 내셔널 미술관에 걸려있는 작품은 멀리서 봐도 반 고흐의 그림이었다. 반복적인 붓질로 다양한 색을 담아내면서 질감까지 드러내는 건 반 고흐의 그림이 아니면 보기 힘들었으니까. 초록색 배경에 놓인 게였다. 자리에 한참 멈춰있었다. 다른 것은 없고 그저 게가 그려져 있을 뿐인데 시선을 움직일 수 없었다. 등껍질에 반사된 노랗고 하얀 색감이 그랬는지, 반복한 붓칠이 광기에 어린 행동보다 섬세한 작업처럼 느껴져서 그랬는지 모르겠다. 따뜻했다. 코가 시큰했다. 웃음이 났다.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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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으로 접한 작품은 오르세 미술관에 있는 “정오의 휴식”이었다. 짚을 침대 삼아 누워 곤히 잠든 두 일꾼은 평화로워 보였고 화가의 시선도 퍽 다정했다. 전문적으로 그림을 읽는 기술이 없어 그때의 감동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그 외에도 가는 미술관마다 반 고흐의 그림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몇 번의 행복한 경험을 하고, 암스테르담에 도착하기도 전에 이미 반 고흐의 작품을 좋아하게 되었다.

 

별이 빛나는 밤을 실제로 본 건 그보다 한참 뒤였다. 처음 반 고흐의 작품을 실제로 보았을 때처럼 놀랍고 찌릿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간 이 평화로운 밤을 오해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해야 했다. 비가 온 뒤의 축축한 자정, 귀신이 소리치는 듯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나는 밤이 아니라 아직 겨울이 오지 않아 적당히 선선한 밤, 바람이 잔잔하게 머리를 간지럽히고 멀리서 벌레 소리가 울리는 그런 밤을 연상시켰다. 나이가 들면서 시선이 변한 탓인지 실제로 보니 사진으로 본 것과 매우 달라서 그런지 알지 못한다. 반 고흐의 그림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하지 않았다면 여전히 그를 어둡고 음산한 그림을 그린 화가라고 생각했을 테다.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는 생각했던 것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수많은 자화상이 전시되어있었다. 투박한 얼굴이었지만 그를 있는 그대로 담은 그림엔 다른 작품처럼 온기가 느껴졌다. 자신을 온전히 바라보는 건 어떤 기분일까. 예전 한국에서 진행된 전시회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에 고흐처럼 자화상을 그릴 수 있도록 색연필이 준비되어있었다. 내 얼굴을 오롯이 바라보고 그림을 그린다는 건 상당히 간지러운 일이었다. 이 순간만큼 자신의 얼굴을 길게 바라본 적은 없는 거 같다. 그때 그린 자화상은, 날 가만히 마주 보던 시간은, 반 고흐의 작품을 이해하고 싶었을 때처럼 나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할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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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했듯이 내 얼굴을 오롯이 바라보고 있는 일은 상당히 낯간지러운 일이었다. 생각해보면 나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을 이해해보려고 한 적은 있지만 나 자신을 이해해보려고 한 적은 없었다.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경험에 빗대어 생각하거나 누군가 말해주기 때문에 몇 가지 툭툭 던질 수는 있었다. 하지만 정말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길 거부하곤 했다. 몰라. 그냥. 이런 대답은 날 알고 싶지 않아 툭툭 튀어나왔다.

 

나를 제대로 이해한 게 언제였더라. 그냥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또 그냥을 적었으니 좀 더 깊게 생각해보면 조금 부끄럽지만, 아마 처음으로 옷가게에서 원하는 옷을 샀을 때가 아닐까 싶다. 그간 옷에 관심이 없던 나는 가족이 사 오는 걸 입거나, 억지로 백화점에 끌려가 사주는 옷을 입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옷을 사는 건 어울리는 옷을 고르는 행위보다 사이즈를 체크하는 행위에 더 가까웠다. 최종적으로 사게 되는 옷은 대부분 가족의 마음에 드는 옷이었다. 옷에 대한 안목이 나보다 더 넓으니 뭘 사도 내가 고른 것보다 더 탄탄하고 예쁜 옷이었지만, 어찌 되었건 내 취향의 옷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

 

필요 때문에 혼자 옷을 사러 간 적이 있었다. 가게는 손님을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손님이 알아서 원하는 옷을 척척 골라 탈의실에 가서 입어보고, 선택한 것을 내밀면 결제만 해주는 식이었다. 여러 옷을 입어봤다. 취향의 옷, 유행인 옷, 독특한 옷, 예쁜 옷, 별로인 옷까지. 꽤 재미있었다. 내 취향이지만 나와 어울리지 않는 옷이나 그냥 보기엔 별로였지만 입으니 괜찮은 옷도 있었다.

 

그때 옷 고르는 일이 즐거웠던 건 혼자 마음대로 입어볼 수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탈의실에서 고른 옷을 입었을 때, 치수가 맞지 않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옷을 다 입지 못한 채로 탈의실 문을 열고 치수가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 나보다 마른 가족은 다소 놀란 표정을 짓곤 했다. 그게 참 부끄러웠다. ‘보통’ 사람이 입는 옷이 맞지 않을 정도로 내 몸이 ‘보통 이상으로’ 살이 쪘다고 생각되는 게 싫었고, 쇼핑이 싫었다. 쇼핑이 즐거웠던 곳은 미국이었다. 날씨에 맞는 옷이 없어 어쩔 수 없이 쇼핑했는데, 뜻밖에 내 사이즈와 딱 맞는 옷이 있었다. 허리, 엉덩이, 다리 길이까지 정확하게 맞아 수선할 필요도 없었다. 사이즈를 신경 쓸 필요가 없으니 훨씬 자유로웠다. 내 몸이 보통 이상으로 뚱뚱하다는 불안은 사라지고 그저 이 치수구나 하는 이해만 남았다. 어떤 옷이 어울리고 어떤 옷이 취향인지 인지하는 일은 생각보다 즐거웠다. 그렇게 나는 날 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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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대해 알아보는 건 내면도 마찬가지였다. 누구나 그렇듯 나도 울적하거나 우울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오랫동안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찾아오면 잠으로 해결했다. 푹 자고 일어나면 그런 감정은 어느새 사라졌으니까. 왜 울적하고 우울한지 알지 못했다. 나중에야 잠으로 우울함을 회피하는 게 좋은 해결방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잠이 늘어나면서 무기력해지고, 할 일도 미루게 되었기 때문이다.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지만, 어느 날 이러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대화가 우울한 사고로 빠져들지 않도록 조절하는 게 제법 힘들지만, 차츰 나에 대해 알게 되는 중이다. 나는 내가 자존감이 높고 날 사랑한다고 생각했는데, 기실 그렇지 않았다. 사소한 일로 나에게 실망하고, 자꾸 위축됐다. 자주 과거를 떠올리며 실수와 후회되는 일을 늘어놓았고, 창피한 기억이 생각나면 즉시 퓨즈가 나가듯 끊어 부끄러움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나는 자신을 꾸미려는 나머지 사소한 잘못을 용서하지 못하곤 한다. 별일 아닌데도 실수 자체를 부끄럽게 여겨 소위 생각나면 ‘이불 찰 과거’로 둔갑시키곤 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창피한 기억을 맞닥뜨릴 때, 다른 생각하지 않고 그 기억을 살피는 건 무던히 힘든 일이다. 하지만 노력하는 중이다. 내가 나를 싫어하는 수많은 이유 중 대다수는 그때의 행동을 창피하게 생각하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생각하면 할수록 낯깎인 실수지만, 그렇다고 실수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니까. 그 기억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실수를 인지한다는 건 내가 더 성장했다는 증거니까.

 

외에도 나를 살펴보면서 알게 된 건 꽤 많다. 그게 무엇이든 3개월 이상 꾸준히 하는 걸 힘들어하기에 적당히 쉬어야 한다는 것, 혼자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한다는 것, 레이스가 달린 옷은 좋아하지만 주름 장식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어떤 음식에 한 번 꽂히면 식을 때까지 계속해서 넣어줘야 하며 그 음식이 행복과 직결된다는 것, 두 가지 일이 동시에 들어오면 예민해지므로 침착하게 하나씩 있다고 생각한 후에 진행해야 한다는 것, 이유 없이 우울할 땐 잠깐이라도 동물을 보거나 밖에 나가면 좀 나아진다는 것. 사소하고 다양한 것이 모두 모여 날 설명했다. 하나하나 왜를 붙일 필요는 없다. 물이 왜 투명하고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지 하나하나 이유를 물어볼 필요가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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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에 온기가 느껴지는 이유는 피사체에 대한 애정 때문일 것이다. 그는 자화상을 그릴 때 자신을 사랑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을까. 왜 이런 표정이고, 이런 눈을 하고 있는지. 반 고흐의 그림을 사랑하게 된 나는 그의 행동을 따라 해보려고 한다. 아직 낯부끄러워서 거울을 오래 바라보고 있진 못하겠지만, 하나의 이미지로 단정 짓던 일을 멈추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위해 노력해본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또 싫어하는지, 나아가 어떤 일에 행복을 느끼고 우울해지는지. 모든 사람은 세세하게 다르니 나를 알아가는 방법은 오직 섬세하게 살펴보는 방법뿐이다.

 

고흐의 그림이 수 없는 붓칠로 이루어진 것처럼 나도 수많은 사건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한 번에 모든 걸 알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혹은 천천히 나에 대한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게으르며 한심하게 보였던 내가 어느 날 누구보다 사랑스럽게 보일 수도 있다. 이미 무섭게만 보였던 반 고흐의 작품이 다정하고 사랑스럽게 보이는 변화를 맛보았으니 허튼 노력만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나를 사랑하는 날, 비로소 자화상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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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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