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사랑은 당신에게 외로움을 주는 일

글 입력 2019.11.01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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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구름 섞인 파란 하늘보다 먹구름 껴서 잿빛 형형한 하늘을 더 좋아합니다. 그게 나한테 어울리고 우리에게 어울리는 하늘이라고 생각합니다. 파란 하늘은 해사한 표정 하나만 가진 것 같습니다. 맑고 밝고 빛납니다. 잿빛 하늘엔 색깔이 많습니다. 파란색이 있고 회색빛 도는 구름이 있습니다. 종종 검붉은 빛을 띠다가 재거름처럼 납빛이 됩니다. 나는 그 색깔들을 더 좋아합니다. 우리 표정 같아서 좋아합니다. 그것들이 삶의 층위 같다고 느낍니다.


해사한 빛은 마냥 밝아서 쳐다보지 못하겠습니다. 그리고 해사하게 빛나는 사람의 얼굴에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겠습니다. 내가 그 해사함을 더럽힐까봐. 나는 저렇게 빛날 수 없고, 저렇게 빛나기 위해 노력하지 못하고 지레 포기하는 인간이어서 그렇습니다.


그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는 마냥 웃었습니다. 진정해야겠다고 말하면서. 종종 다른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부정적이고 비관적이고 자존감이 없다고 진단합니다.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거 맞습니다. 다만 내가 자존감이 없다고 느낀 적은 없습니다.

 

자존감이란 건 자신에 대해 존엄성을 가지는 마음 아닌가요. 자기를 소중히 여기기 위해서 일단 자신을 아는 게 선행돼야 하는 거 아닌가요. 앞서 말한 것들은 내가 어떤 인간인지 설명해주는 건데 왜 당신은 그걸 보지 못하나요. 왜 일방적으로 진단하나요. 내 속은 뒤틀려 있어서 그렇게 되묻고 싶었습니다. 웃어준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습니다. 자기도 비슷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를 알고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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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처음 술 먹었을 때, 그는 자기 그늘에 대해 이야기 했습니다. 울먹거렸고,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습니다. 그의 말에 무엇을 어떻게 첨언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내 이야기를 했습니다. 내 그늘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사람에게 타인의 아픔을 감지하는 통각도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었습니다. 동정과 연민은 결국 자기만족입니다. 상대의 불행을 수단 삼아 자신의 불행하지 않은 위치를 확인하는 것뿐입니다.


통각을 통해 타인의 아픔을 감각하면 내 아픔 같습니다. 내 고통이 상기됩니다. 그가 아프다고 말했을 때 나는 그의 입을 봤습니다. 고통을 언어로 번역하는 것 역시 고통스러울 겁니다. 내가 그랬으니까. 입술이 떨렸습니다. 간혹 언어가 목에 걸린 듯 숨을 내쉬었고, 나는 그의 고통을 헤아리려 시도했습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이해하려 노력한 건 그때가 처음일 겁니다. 내게 통각이 있음을 감각한 것도 그때가 처음입니다. 그리고 그와 사귀고 나서, 생각해보면 나는 그때만큼 그의 고통을 내 아픔처럼 느낀 적이 없었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봤습니다. 그는 무릎을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500일의 썸머>를 봤습니다. 내가 보자고 했습니다. 두 번째 보는 것이었습니다. 누군가를 열렬히 좋아해 본 적 없고 사랑해 본 적 없지만 나는 사랑 영화를 좋아했습니다. 영화 속 그들은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내 삶에서도 저런 표정을 짓는 나날이 있을 거라 여겼습니다. <500일의 썸머>를 유독 좋아하는 이유는 마지막 즈음에 전개되는 장면 때문입니다. 톰과 썸머는 헤어졌지만 톰은 썸머에게 네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진심이라고 말합니다. 헤어진 연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무엇일까요. 그 마음을 알 수 없어도 나는 저런 사랑을 하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그는 무슨 마음이었을까요. 생각해보면 나는 제대로 물은 적 없던 것 같습니다.


나는 여름을 싫어합니다. 덥고 눅진하고 내 몸에 열이 오르는 걸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름날 햇빛이 살에 닿는 게 불쾌하고 내 온도를 유지하는 것도 버거워서 온기 도는 무엇이 살갗에 닿으면 기함합니다. 그가 무릎 베고 누웠을 때도 여름이었습니다. 체온이 맴돌았는데 나는 싫지 않았습니다. 좋았습니다. 실은 그냥 다 좋았습니다. 목덜미를 조금 넘는 단발도 좋았고 턱도 좋았고 입 주변에 있는 점도 좋았습니다. 그를 구성하는 것들이 다 좋았습니다. 그가 있는 여름도 좋았습니다. 그때부터 그가 좋았습니다.


그가 언제부터 나를 좋아했냐고 물은 적 있습니다. 나는 우리가 처음 술 마신 때는 아니라고 거짓말했습니다. 나는 내 감정을 은폐합니다. 싸매고 서랍에 숨겨놨다가 타의에 의해 우연히 발각되는 것만이 진짜 ‘진심’이라고 여기는 인간입니다. 그냥 그때부터 널 많이 좋아했다고 말했으면 되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와서,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비슷한 맥락일 겁니다. 그가 이 글을 봤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진심을 알아주면 좋겠다고 느낍니다. 그가 그만하자고 했을 때 그만하기 싫다고 그 순간에 말하면 됐는데. 귀가 울렸습니다. 주저앉아 울고 싶었습니다. 사랑 역시 승패가 작동하는 걸로 여긴 나는 그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입을 깨물었습니다. 잘 지내라거나, 가지 말라거나. 아무 표현도 하지 않았습니다. ‘왜’를 규명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내가 이렇게 생겨먹은 인간이어서 그런 겁니다.


그와 사귀고 2년이 지났을 때, 그는 아프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타인의 아픔을 자기 것인 양 느끼는 인간을 기대했을 겁니다. 그때처럼. 똑같이 울먹거리면서 서로의 그늘에 전등 하나쯤 밝히려 시도하는 걸 기대했을 겁니다.


나는 퍽 짜증이 나서 너만큼 나도 아프다고 했습니다. 나도 좀 이해해주면 안 돼? 도대체 그 아픔이란 게 몇 년이 흘러도 유효한 건지. 고통 역시 크기를 측정할 수 있고 그것에 따라 소멸하는 시점이 있는 거야. 이제 그만하라고 말하진 않았지만, 마음으로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내가 싫어하는 사람이 돼가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너인데. 너의 아픔마저 내 식대로 재단하려 들었습니다. 그때만큼 내가 역겨웠던 적이 없습니다. 싸우고, 울고, 미안하다고 했지만, 이미 나는 그의 마음을 벤 겁니다. 가까운 사람만이 상처 줄 수 있습니다. 마음을 베고 휘두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뒤돌아서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내가 그의 아픔을 외면했을 때 그는 어떤 심상이었을까요. 이렇게 되뇌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여름의 초입에 헤어졌습니다. 이제는 도무지 여름을 좋아할 수 없게 됐습니다.

 

완성할 수 있는 사랑 같은 게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결혼 역시 사랑의 과정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랑을 두 가지로 분류합니다. 진행 중인 것과 헤어짐으로 귀결된 것. 두 개뿐일 겁니다. 거기 어떤 성분이 있고 도대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지만, 그리고 나는 헤어짐으로 종결된 사랑만을 겪었지만, 사랑은 당신에게 외로움을 주는 것입니다. 그가 없어서 외롭고, 보고 싶고 그렇지만 다시 돌아가기엔 너무 늦어서 이렇게나마 찌질하게 사랑에 대해 생각합니다.

 

언젠가 그는 우리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싶다고 했습니다. 도저히 소설로 쓸 수 없었습니다. 허구인 양 포장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얼마 전 <500일의 썸머>를 다시 봤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톰이 썸머에게 어떤 맥락으로 그런 말을 한 건지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네가 잘됐으면 좋겠습니다. 행복해졌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비겁하고 주관과 논리가 빈약한 사람이라 영화를 인용하지만, 그래도 진심입니다. 이 말은 진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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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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