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미션] #5. 내가 겨울을 좋아하는 단 하나의 이유 - 뮤지컬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올 겨울도 천사들과 함께 보내게 되겠지요
글 입력 2019.10.31 2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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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또 1년이 저문다는 뜻이겠다. 날이 갈수록 짧아지는 낮과 길어지는 밤을 보며 삼삼한 감성이 고개를 든다. 딱 이맘때만 느낄 수 있는 간절기의 감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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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극, 좋아했던 극, 그리고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로 글을 쓰자 마음먹었을 때는 수십, 수백 가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좁고 깊게 사랑하는 편이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지 않았다. 몇 편 쓰지도 않았는데 벌써 소재가 떨어져갔다는 의미다.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속담이 아닌 듯하다. 이 극은 너무 좋아하는 극이니까 나중에 시간 여유가 많이 될 때 열심히 써야지, 하면서 미룬 소재만 열 손가락을 넘어가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따지고 보면 ‘쓸 게 없다’라기보다는 ‘지금 쓸 게 없다’가 맞는 말인 것 같다.


그래서 이제 슬슬 아껴두었던 극을 한 개씩 풀어보기로 했다. 이 극 이야기를 하기 위해 날씨가 추워질 때까지 기다렸는데, 이제는 때가 된 듯싶다. 마침 오늘이 핼러윈이기도 하고, 내일이면 11월로 접어들어 겨울이 한 발짝 더 다가오기도 하고, 여러모로 이 계절과 잘 어울리는 극이다.

 

“내 친구 앨빈 이야기, 한 번 들어보실래요?”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 내 인생의 이야기



눈송이가 하나 둘 떨어지는 것만 같은 클라리넷과 피아노 소리, 곧이어 등장하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 “죽으면 좋은 얘기만 해주네?” 순진하고 천진한 아이의 대사가 공연장을 에워싸면 나도 모르게 가슴 한 켠이 간질간질해진다. 다 큰 성인 토마스가 무대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어른과 아이의 시간차를 생각한다.


“오늘 우린 앨빈 켈비의 생애를 기념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둘도 없는 친구의 장례식에서 송덕문을 낭독하기 위해 펜을 잡은 베스트셀러 작가 토마스 위버. 어떤 말로 운을 띄워야 할지, 어떤 이야기로 친구의 생애를 추억해야 할지, 어떤 변명으로 그간의 무관심과 관계의 공백을 설명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하다. 마음을 다잡고 차근차근 어린 시절을 추억하다가도, 크리스마스 이브에 다리 위에서 강으로 뛰어든 친구의 선택을 이해할 수가 없다. 천사의 날개를 가지지도 않았고 나비처럼 가볍지도 않으면서, 내 앞에서는 마냥 어리고 순수했던 친구가 대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따져 묻고만 싶다. 종이는 여전히 백지, 가뜩이나 일도 손에 잡히지 않는데 인생은 더욱 꼬여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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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의 대략적인 줄기는 이렇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함께한 앨빈과 토마스는 크리스마스 이브마다 영화 ‘멋진 인생’을 보고 하얀 눈밭에 누워 천사를 만드는 전통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흘러 점점 어른이 되어간 토마스와 달리 앨빈은 언제나 예전 그 자리에 서서 토마스와의 추억을 간직한 채 아이의 감성을 유지하는데, 그 간격은 점차 넓어져 관계까지 소원해지기에 이른다. 그리고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앨빈은 영화 ‘멋진 인생’의 주인공 조지 베일리처럼 다리 위에서 몸을 던진다.


토마스는 앨빈과 만들었던 소소한 추억을 소재로 책을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었다. 토마스의 인생에는 언제나 앨빈이 있었지만 앨빈‘만’ 추억하기에는 인생이 지나치게 복잡했다. 앨빈이 제 이야기의 시작임을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인정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의 이야기, 내가 쓴 나의 책, 나만의 성과에 매몰되어 주변을 볼 여유를 잃어버린 것이다. 사람도, 감정도, 애정도 잃어버리자 이야기마저 잃게 되었고, 토마스는 슬럼프에 빠진다.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를 관람하고 나면 토마스를 미워하기 힘들다. 누구나 실수를 하고 누구나 상실을 겪기 마련이니까. 일부러 시간과 체력을 들여 주위를 돌아보지 않으면 풍경은 금세 스쳐가고 사람은 금세 사라지기 마련이니까. 상실은 스친 후에나 빈자리가 드러나는 법이다.


앨빈은 정상 범주에 속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앨빈의 세상은 엄마, 아빠, 그리고 토마스 셋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엄마는 앨빈이 여섯 살 때 하늘로 떠나버렸다. 핼로윈마다 엄마의 목욕가운을 입고 엄마 분장을 하던 앨빈은 기적처럼 토마스를 만난다. 엄마가 생전 가장 좋아했던 천사 클라렌스의 분장을 한 토마스를 마주했을 때 앨빈은 깨닫는다.

 

“그날 핼러윈 낮에 마주 앉은 두 눈에 우리 엄만 천살 보고 난 널 봤어.”


여섯 살 때 엄마를 떠나보내고, 어른이 된 후 아빠를 떠나보내고, 앨빈에게 남은 세상은 토마스뿐이었다. 책방 가득 꽂혀 있는 토마스 위버의 신작을 정리하며 앨빈은 여느 크리스마스 때와 같이 그에게 편지를 썼다. 답장 없는 일방적인 팬레터와 같았지만 앨빈에게는 제 세상과의 담화였을 테다.


토마스가 세상 밖으로 나갈 때 앨빈은 세상 안으로 들어갔다. 톰과 앨빈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어른이 되어갔고, 톰은 앨빈의 성장을 눈치 채지 못했다. 관계라는 게 이렇게나 어렵다. 시작은 같아도 과정은 다르기 마련이기에, 누군가가 흘려보낸 과거를 누군가는 생의 동력으로 삼는 셈이다.

 

 

 

겨울이 좋아졌습니다



나는 추위를 끔찍하게 싫어했다. 어릴 때부터 더위보다 추위를 더 많이 탔고 여전히 추위는 싫어한다. 겨울 특유의 분위기와 짧은 낮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그러던 내가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를 접하고 나서 겨울을 좋아하게 되었다. 애정이란 게 참으로 무섭다. 나도 모르는 새에 삶에 스며들어 온갖 습관과 취향에까지 물들어버린다. 이제는 찬바람만 불어도 토마스와 앨빈이 생각난다. 그들의 우정과 어긋남, 이 모든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와 갑자기 마음이 아련해지기도 한다. 크리스마스에는 캐롤보다도 이 작품의 넘버가 더 먼저 생각나고, 하늘에 눈송이가 흩날려도 이 작품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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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는 내가 가장 많이 본 극 중 하나다. 막공이 아쉬워서 혼자 맥주를 한 잔 마시며 대본을 기록해뒀던 기억도 있다. 이 장면에서 이 배우는 이런 대사를 했고, 이 배우는 이런 행동을 했고, 이 넘버에서 이 배우는 이 부분을 강조해서 불렀고, 이 장면의 조명은 어땠고, 이런 사소한 것들을 새겨두고는 극이 그리워질 때마다 꺼내 보곤 했다.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 없지만.


기억 하나에, 추억 하나에 의지해 평생을 버티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또 기억과 추억 하나가 평생의 계절을 바꿔버린 사람도 있는 법이다. 앨빈과 토마스처럼. 앨빈이 토마스에게 선사했던 유년의 기억이 평생의 토마스를 조각했고, 토마스가 앨빈에게 건넸던 손길이 평생의 앨빈을 지탱했다. 그러니 결국 이 극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점차 날씨가 써늘해지는 요즘, 어김없이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가 돌아왔습니다. 10주년이라고 하네요. 이번 겨울도 삼성동 백암아트홀에 참 많이 드나들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찾아 온 인터미션 넘버는 ‘눈 속의 천사들’입니다. “겨울 햇빛처럼 나를 감싸는 마법처럼, 그 어린 시절 바로 그때처럼 우릴 닮은 천사 모두 다.” 이 가사를 특히 좋아하기 때문에 골라봤습니다. 올해 겨울도 천사들과 함께 보내게 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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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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