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S] 세련되고 담백하게 무대에 오른 근대소설

연극 '한 개의 사람' 리뷰
글 입력 2019.09.29 1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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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사람





연극이 된 소설들

<운수 좋은 날>, <태형>, <감자>. 세 가지 단편 소설이 불러일으키는 공통된 느낌이나 이미지가 있다. 참고서처럼 말하자면 1920, 30년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힘겹게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의 삶을 현실적으로 다룬다고 할 수 있겠고, 다소 거칠게 말하자면 불행한 주인공들이 썩은 동아줄만 잡다가 무엇도 극복하지 못한 채 더 불행해지며 끝나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교과서 단골손님으로, 제목만 봐서는 내용이 기억나지 않을지라도 줄거리를 듣는 순간 모두가 어렴풋하게나마 떠오르는 게 있다는 것도 특징이다.

그런 이미지 때문에 이 소설들이 무대에 오른다고 했을 때 궁금하면서도 어딘가 기운 빠지는 느낌이 들었던 게 사실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근대소설을 발굴하는 것도 아니고, 모두가 알고 있고 그 이미지까지 어느 정도 굳어버린 소설들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무엇을 더 표현하고 관객에게 전할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조명이 꺼지고 어둠 속에서 등장한 배우가 첫 대사를 내뱉았을 때, 모든 건 기우였다는 걸 알았다.

고전처럼 누구에게나 익숙한 작품을 무대에 올릴 때, 신선해야 한다는 강박에 무리하게 연출가의 해석을 더하거나 새로운 연출을 시도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그 의도가 작품에 잘 스며들면 다행이지만 때로는 원작의 의미조차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난해한 작품이 되기도 한다. 양손 프로젝트는 소설을 연극으로 바꾸며 섣불리 대단한 모험이나 과한 덧붙임을 시도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연극에 화려한 무대장치나 난해한 연출은 없다. 작품당 배정된 시간은 20여분, 각 작품마다 등장하는 배우도 한 사람 또는 두 사람이 전부다. 무대는 무대라고 정했기에 무대일 뿐, 조명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다.

단순한 무대처럼 인물의 대사도 원본 소설 텍스트에 충실하다. 내용의 반전이나 변형은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이야기는 흘러간다. 여러모로 기본과 원작에 충실한 연극이지만, 양손프로젝트의 <한 개의 사람>은 텍스트 안에서 독특한 변형을 꾀한다. 서술이 없고 인물의 말과 행동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 보통의 연극과 달리 소설에서처럼 서술자의 역할을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이를 테면, <운수 좋은 날> 원작 소설은 3인칭 관찰자 시점에서 전개되지만, 이번 연극에서는 특이하게도 2인칭으로 전개된다. 즉, 배우가 김첨지 본인이면서 동시에 그런 본인은 '너'라고 칭하며 서술한다. 1인칭도, 3인칭도 아닌 2인칭으로 진행되면서 관객은 김첨지의 상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동시에 배우가 '너'라고 말할 때마다 관객 각각은 자신이 호명되는 기분을 느낀다.

<태형>은 전통적인 소설처럼 '나'가 등장한다. 소설에서의 1인칭 주인공 시점처럼 주인공은 자기 자신이면서 동시에 자기 자신을 서술한다. 목마름과 더위에 지쳐가는 '나'의 모습은 붉은 조명 아래에서 극대화된다.

처음 본 두 작품이 모두 1인극이라서 당연히 마지막 작품 역시 1인극이겠거니 생각하던 차, <감자>는 처음으로 두 사람이 무대에 동시에 등장하며 느슨해진 흐름을 다시 조인다. 주인공 복녀를 앞에 선 다른 배우가 서술한다. 삶에 치여 자신이 원하지 않는 선택을 강요당하는 복녀의 모습은 그를 좌지우지하면서 동시에 그 모습을 서술하는 다른 배우의 존재로 더 강조된다.



한 '개'로 존재하는 인간

모든 예술은 결국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연극도, 소설도 마찬가지다. 거추장스러운 장치를 모두 제거한 연극에서 돋보이는 건 그 무대를 오롯이 채우는 사람이고 그 사람이 내뱉는 대사다.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 <한 개의 사람>은 그 무엇보다도 인간 존재에 집중한다.

한 '개'의 사람이라는, 위화감 넘치는 연극 제목의 의미도 연극을 보며 깨달을 수 있다. 당장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 속에서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도구가 될 수밖에 없다. 열악한 감옥에 갇혀 그 감옥의 가장 약한 사람을 희생시키면서까지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된 <태형>의 '나'와 <감자>에서 도덕관념을 가지고 있다가 살아남기 위해 매춘을 하게 되는 복녀는 한 '명'이 아닌, 한 '개'의 사람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극중 <감자>의 복녀가 처음 매춘으로 돈을 번 후에 비로소 '한 개의 사람으로 거듭난 기분을 느꼈다'고 서술되는 장면은 참 많은 생각이 들게 한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 때는 한 개의 분량도 못되는 존재이지만 가치관을 버리고 돈을 벌어 자기 자신을 먹여 살리자 한 개의 사람으로 '승격'하는 현실은 아이러니하다.

이렇듯 연극에서 그려지는 인간은 <운수 좋은 날>에서 언급되듯이 '굶주린 창자' 그 자체이다. 인간의 존엄은 당장 육체적 욕구가 충족되지 않는 열악한 상황 앞에서 가장 먼저, 가장 아래로 쳐박힌다. 육체적 고통 앞에서 몸짓은 절박하고 눈은 번뜩거린다. 이를 모두 재현해내는 배우들의 연기와 입말의 맛, 적절한 움직임은 몰입도를 높인다.

인간성이라 여겨지는 많은 것들이 살아남겠다는 의지에 먹혀버린 인물들의 모습은 짐승의 그것을 연상케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은 사람이기에, 사람의 틀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다. 술집에서 아내가 죽었다며 엉엉 울다가 사실은 다 농담이라 말하는 김첨지의 도피적인 웃음소리, 같은 방 노인을 내쫓았지만 나중에는 죄책감에 휩싸여 떨구는 '나'의 고개, 매춘을 하던 왕서방이 장가를 들자 눈이 뒤집혀 그를 죽이러 달려드는 복녀의 고함이 그러하다. 인간과 짐승 사이에 선 인물들의 모습은 연민을 불러일으키고, 그 앞에서 우리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다시 한 번 고찰해보게 된다.

 

뉴트로의 시대, 근대 단편을 다시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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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백화점인 미쓰코시 경성점


세 편의 단편 소설이 전하고자 했던 내용은 100여년이 지나 연극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세 인물이 처한 각각 다른 상황은 시대를 넘어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이며 간으로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또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 인간의 지향은 무엇이여야 하는지 질문으로 확장된다.

2019년의 키워드 중 하나로 '뉴트로'가 뽑힌 적이 있다. 1920년대, 30년대 경성의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과 꾸며진 인테리어는 2019년의 우리에게 일종의 낭만으로 인식되고 유희거리가 된다. 일제강점기는 절대 '낭만적으로' 표현되면 안된다고 주장하거나, 대단한 역사의식을 가지자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다만 껍데기가 주를 이루는 뉴트로 홍수 시대에 <한 개의 사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새삼 새롭게 보인다.

모두가 알고 있는 이야기에서 나온 보편적인 질문이 관객에게 가닿을 수 있었던 까닭으로 담백한 무대 연출과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력 등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 눈에 띄었던 부분이 있다. 전체적으로 원작 소설에 충실한 이야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운수 좋은 날>의 원작에서 김첨지가 아내를 향해 내뱉는 욕설이나 아내를 때리는 장면은 사라졌다는 점이다. 사소한 부분으로 넘길 수도 있지만 과거의 작품을 현재로 갖고 와 또다른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꼭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생각된다. 인간을 이야기하고 인간에 대한 질문을 던지면서 혹시라도 어떤 인간은 배제해버렸다면 얼마나 텅 빈 연극이었을까 싶다.

최근 근대 단편 소설을 오디오북으로 만들거나 영상으로 만드는 작업이 종종 보인다. 소설은 당시의 사람들이 자신이 살던 현실을 포착해 기록한 것으로, 또다른 역사서이다. 그런 근대 단편 소설들을 진부하다거나 어둡고 축축 쳐진다고만 치부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읽고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양손프로젝트의 <한 개의 사람>은 그 모범답안을 제시한 좋은 선례가 될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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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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