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조심스럽지만, 신선한 시도 "새벽의 방문자들" [도서]

테마소설 페미니즘은 처음이지?
글 입력 2019.09.0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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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감각이 점점 둔해지는 시기다. 생각을 끊고 주어지는 상황에 맞추어 생각하는 날들이 많아졌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할 지 모르는 시기가 오면 그냥 조심스레 이전에 ‘글을 써야지’ 생각했던 메모들을 꺼내 본다. 머릿속에 여러 가지가 스칠 때 조용히 눈을 같이 굴리다 보면 가장 많이 생각했지만 가장 풀리지 않는 이야기가 하나 떠오른다. 오늘 할 이야기는 ‘페미니즘 테마소설, 『새벽의 방문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처음 산 건 6월, 한창 더위가 기승을 부리려고 할 때였다. 매달 한 두권씩 서점에서 책을 골라오는데 소설 코너를 기웃거리다 조금 독특한 표지에 눈이 갔다. 무언가 한 가득 사연을 지닌 듯한 여성의 뒷모습, 호수 아래 비치는 잔상, 그 위로 펼쳐지는 구름이 휘날리는 하늘. 아, 이번 달은 이 책이다! 그렇게 표지에 홀리고 페미니즘 테마소설이라는 다소 특이한 소재에 책을 집어들었다.



 

새벽의 방문자들



『새벽의 방문자들』은 표제작인 장류진 작가의 <새벽의 방문자들>을 필두로 6편의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소설집이다. 6편의 글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페미니즘’, 여성 화자이거나 여성의 문제를 다루는 ‘여성적’ 경험을 다루는 소설이다. 애초에 ‘여성스럽다’거나 ‘남자답다’거나 하는 편견을 조장하는 단어 자체를 지양하지만, 여전히 사회에 잔존하는 ‘여성이기에’ 겪는 이야기를 담은 이야기들을 다루는 책이기에 부득이하게 이런 표현을 쓰고자 한다.

 

사실 이런 종류의 테마소설에서 가장 조심해야하는 요소는 객관성이다. 여성들이 사회에서 겪는 문제와 기존 문단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감정과 상황을 밝히고 고발하는 과정은 필수적이지만 이 과정에서 과도한 치우침과 작위적인 연출이 발생할 경우 오히려 이야기를 전달하기도 전에 큰 반감을 주기도 한다. 이 책 속 6편의 소설들은 그래도 다소 유연한 형태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가장 눈에 들었던 소설은 맨 앞 장에 실린 <새벽의 방문자들>, 남자 작가분이 쓰신 점에 인상 깊었던 <유미의 기분>, 다소 위험하지만 강렬한 <누구세요?>다.




가장 강렬하고, 찝찝하게


 

<새벽의 방문자들>은 책을 집어든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읽어 내려 갔던 소설이다. 사실 이 책을 내 책장으로 들고 오게 만든 이유가 바로 이 소설이라 할 정도로 이 이야기는 신선했다. 주인공인 여자는 인터넷 상에 차고 넘치는 성인광고를 지우는 일을 한다. 끊임없이 발달하는 차단 기술과 그에 뒤질세라 교묘하게 규제 망을 피해나가는 ‘수십개의 하룻밤과 원나잇과 모텔과 여대생과의 환상적인 밤(<새벽의 방문자들> p9)’들에 매일 매일 치이는 여자에게 어느 날 한 남자가 찾아온다.

 

새벽 1시 언저리, 갑자기 울린 초인종. 생전 처음보는 남자. 부술 듯 문고리를 돌리고 비밀번호를 미친 듯이 누르는 상황. 숨막히는 상황을 활자로 읽을 때 발끝에서 쫙 끼치는 소름에 스스로가 놀랐다. 여성이라면 한 번쯤 겪었을 위협감과 불안함이 활자를 타고 전해져 왔다. 그렇게 한 두번씩 계속 그녀의 집에는 매번 다른 남자들이 초인종을 누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의 반응이 이상하다. 여자는 처음 겁먹었던 상태를 벗어나 점점 그들을 관찰하고 그들이 성을 매수하러 왔다가 호수를 잘못 찾았다는 확신을 가진다.

 

이 소설에서 재미있는 지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초반에 생명의 위협을 느낄 만큼 불안했던 여자의 위치가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남자들을 관찰하고 평가하는 행위자로 변하다는 사실이다. 그녀의 가정이 다소 개연성이 없다고 평가할 수도 있지만, 소설은 ‘그녀가 그런 상상을 할 만한다’는 당위성을 전달한다. 하루가 멀다하고 뉴스를 차지하는 연예인들의 관련 이슈부터 인터넷 상에 포진된 수많은 ‘환상적인 밤’들은 그녀의 상상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증거가 된다. 더 소름이 끼쳤던 건 그녀가 성매매가 이루어지는 장소라 생각했던 옆 동의 1204호에 들이닥쳤던 장면이다. 거기엔 그녀가 생각했던 성매매의 현장이나 잔상이 아닌, 그저 평범한 한 여자만이 있었다. 분명히 성을 매수하러 온 사람들은 있지만, 그 현장이 없다는 이 설정은 미디어를 통해 불안감이 더욱 증폭되는 현상을 보여준다.

 

여성들이 말하는 ‘여성문제’에 있어서 가장 많이 들어오는 공격 중의 하나가 ‘전부 다 그런 건 아니야’라는 발언이다. 냉정하게 이야기해서 모두가 성범죄의 피해자가 아니고 모두가 범죄의 대상도 아니고 모두가 성차별의 대상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수많은 젠더 문제가 난립하고 많은 여성들이 성범죄의 대상이 되고, 스치듯 들리는 성매매 이야기가 버젓한 곳에서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고 이야기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일까. 차라리 옆 동의 1204호가 완벽하게 성매매가 벌어지는 곳이었다면 덜 찝찝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형체는 없고 의혹만 있는 그 풍경이 여전히 불안감에 떠는 누군가의 귀갓길을 떠올리게 해서 아주 오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심스러운


 

<유미의 기분>은 스쿨 미투를 다루는 이야기다. 6편의 소설 중 유일하게 남성 화자가 나오는 이야기이고 페미니즘의 주체가 오로지 여성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기능을 한다. 단순히 여성 피해자의 이야기를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 ‘청소년’이라는 보호의 대상을 기만하는 학교의 작태를 관찰자의 시점으로 보여주면서 그 속에서 혼자서 버티는 ‘유미’의 기분을 독자와 형석이 같이 짐작하게 만든다. 형석이 계속 유미의 이야기를 들었다라는 마지막 문장은 그저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유미(와 그녀를 비롯한 피해자들)를 바라보아야 함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 소설 <누구세요?>는 다소 위험할 수 있는 이야기다. 전 남자친구에게 가부장제 하 ‘여성의 역할’(현모양처)과 현대 사회에서의 ‘여성의 역할’(맞벌이)을 동시에 강요받다 차여버린 ‘지윤’은 억울함과 막막함에 새로운 인격을 만나고 만다. 미처 사회에서 내보이지 못했던 금지된 욕망이 새로운 인격이 생겨나듯 봇물처럼 터지면서 옆집 남자의 방에 들어가 도벽과 여러… 해선 안 될 일들을 벌인다. 이 소설의 메인 키워드는 ‘일탈’욕구다. 소설의 설정이지만 지윤의 행동은 명백한 범죄행위이기에 처음 그녀의 행동을 보곤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작가노트를 읽으며 이 설정에 고개를 끄덕일 순 있었다. 여성의 성이 한낮 유희거리로 매도 당할 때, 거기에 일일이 분노할 수 없다면 상황을 바꾼 미러링으로 대처하겠다는 셈인데, 이 부분이 일종의 폭탄 같았다. 누군가에겐 사이다스러울수도 누군가에겐 그냥 범죄를 미화시키는 행위일 것이다. 도발적이지만 아쉬운 부분이다.



“아마 이 소설집의 독자는 여성분들이 대다수일 거라 생각하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을 약자에 위치에 놓아볼 상상력이 없는 어떤 남성들에게 ‘옆집에 놀러갔더니 자고 있던’ 싱싱한 성적 대상이 되면 기분이 어떨지 짓궃게 묻고 싶었다.”


 

여섯 편의 소설을 읽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디까지를 설정으로 보고 비판할 지, 어디까지를 공감하고 받아들여야할 지 계속 고민하며 글을 읽었던 것 같다. 페미니즘은 지금 내가 마주한 문제이고 그래서 더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는 영역이다. 그 속에서 『새벽의 방문자들』은 식상함이나 강한 거부감보다는 일종의 신선한 시도로 여겨졌다. 무수히 듣고 들었던 이야기, 미처 듣지 못했던 이야기, 공감하고 비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있어서 오랜만에 치열하게 읽은 책이었다.



[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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