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단 하나의 말: 필로FILO 8호 [도서]

글 입력 2019.07.07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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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와 언어와 사랑의 탐색지’ 매거진 필로FILO 8호를 봐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리스트에 있는 세 개의 영화 때문이었다. 폴 슈레이더의 <퍼스트 리폼드>, 이시이 유야의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하마구치 류스케의 <아사코>.

 

세 영화를 다루는 두 비평에서 묘한 공통점을 찾았다. 예술가는 평생 단 하나의 말을 하고, 비평가는 여러 영화에서 단 하나의 말을 찾는다는 것.




1. 단 하나의 말, 예술가의


절멸을 우회한 사랑: 폴 슈레이더의 <퍼스트 리폼드>, 그 집요함이 주는 감동에 관하여 - 허문영



사실 이 영화에 관한 감상은 당시 매우 불쾌했다. 그리고 이번에 이유를 찾았다. “극복되지 못하는 그 무능력과 자기파괴에 이르는 충동의 기록, 어떤 실패의 기록”이라는 텍스트에서 직감했다. 불쾌함은 곧, 나의 (생존)본능이 실패에 관한 감각을 그토록 강하게 밀어낸 방증이겠다고.

 

그만큼 새로웠던 또 다른 사실은 폴 슈레이더는 쭉 ‘그래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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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이 예술가의 현현이라면, "자신의 현존 감각을 회복하려는 시도의 실패"는 곧 폴 슈레이더 자신의 경험인가? 다른 말로, 그는 자신이 이 세상에 발 딛고 서 있다는 감각을 무진장 느끼고 싶어 하지만 끝내는 그렇지 못한 결론에 다다르나?

 

일부 공감한다. 나도 살면서 무엇이, 언제, 어디가 현실인지 종종 헷갈린다고 느낀다는 사실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말 그대로 현실감이 없을 때가 자주 있다. 삶이 한 순간 꿈같기도 하다. 길을 걸으면서, 밥을 먹으면서,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일상에서 맑은 정신으로 그런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이상한 감각이 아니다. 하지만 슈레이더와 같이 그 감각을 결론으로 내리기는 쉽지 않았다, 언제든, 마치 방어기제처럼. 그와 같은 결론으로는 일단 나는 살 수 없다.

 

공감하면서도 그 한 가지 감각을 70세가 되기까지 이끌어내는 힘이랄까 고집의 원천이 궁금한 이유는 주제가 ‘희망’이나 ‘사랑’이 아닌 ‘실패’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굳이 반복하고 싶지 않을 내용. 그는 어쩌다 아마 인생에서 자기만의 가치관을 정리하는 시기일 지금까지 그 주제를 놓지 않게 된 것일까.

 

어쩐지 폴 슈레이더의 행보는 내게 유언 같은 말의 성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한 사람이 세상을 살다 떠나며 남길 단 하나의 말은 무엇일까. 어쩌면 예술가는 그 말을 죽기 직전에 하지 않는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살면서 내내, 죽는 마지막에 남을 단 하나의 말에 초점을 맞춘다. 도리어 그 말이 삶의 이유가 되기라도 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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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의 방법’은 많은 작품이 취하는 형태로써 관객이 확실한 무엇을 손에 쥐려고 하는 순간 미끄러지게 만드는 예술가의 놀이이다. 이 놀이는 단순 유희가 아닌 목적으로 작품에 사용되는데, 특히 <퍼스트 리폼드>에서 더 탁월하게 이용된 것 같다. 슈레이더에게 그래서 당신은 “자기 부재의 감각을 견디는 삶”을 어떻게 살아낼 것이냐 묻고 싶지만 물어도 들을 수 없을 것이란 직감이 대답을 대신하기 때문이다. 조금은 얄밉다.

 

예술가의 현현인 작품은, 예술가로 회귀하지 않는다. 작품으로만 생존한다. 감독이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는지, 현실을 비관하는지 긍정하는지는 작품 다음의 이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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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비평은 아무튼 허공에 떠다니는 이미지를 문자라는 개념에 잡아두려는 채집 같다. 그런데 이 비평글 마지막 문단의 마지막 문장처럼, 확실한 판단보다 비평의 일환으로 차라리 시나 노래가 더 낫다고 느껴질 때도 있다. 아마 어떤 영화는 채집되길 더욱 강하게 밀어내기 때문이 아닐까. 그 묵언의 거부가 어쩌면 비평 방향까지 제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 단 하나의 말, 비평가의


두 개의 장면, 실력의 정체: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와 <아사코>에 관하여 - 정한석



비평가 정한석은 두 영화가 문득 가닿는 같은 지점에 초점을 맞춘다. 바로 영화의 두 남녀가 각각 같은 곳을 ‘함께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 그의 말에 따르면 "모종의 구체적 사태" 즉 작품의 특정한 장면에서 발현되는 것이 실력이고, 이 실력의 관계와 실행에 의해 우리의 감정과 느낌은 형성된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실력의 정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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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와 <아사코> 라스트 씬에서 발휘된 실력은 주인공 두 남녀가 무엇을 견디는 안간힘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하지만 분석에 따른 결론은 전혀 다른 곳에 이른다. 영화는 유사한 형상으로 다른 상태의 장면을 말할 수 있다. 인물들의 심리로, 장면과 숏의 원리를 이용해 '함께 바라보는' 시선을 담아내면서도 '시선의 회피'를 말할 수 있다. '함께 바라보는' 장면 하나가 영화적 맥락에서는 허공에서 분실되는, 미완적인 시선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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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흐름을 보면 두 영화에서 비슷한 두 장면으로, 두 장면의 공통점(시선)에서 장면의 성질(무엇을 향한 시선인지)로, 성질의 차이에 대한 분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남는 건 하나의 개념이다. 바로 각각 서로의, 세상을 향한 안간힘.


이와 같은 시도를 좀 더 보편적인 차원에서 '영화에서 비평가의 말 찾기'라 할 수 있을까. 이 비평의 단초는 두 영화의 라스트 씬이었다. 글은 영화의 두 장면을 일단 묶어 놓았다가 각 영화의 맥락에 따라 장면을 분석하며 천천히 경계를 지어 나간다. 하나의 말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처럼 비평은, 단 하나의 말을 (그럴 의도가 없이 만들어진)두 개 이상의 영화에서 찾기도 한다. 그리고 끝내는 독자로 하여금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도록 길을 내고 인도한다. 이것은, 영화의 힘인가 비평가의 힘인가. 이 실력의 정체도 궁금하다.






필로 <FILO>


<FILO>는 '영화'를 뜻하는 'film'과 '어떤 것을 좋아하는'이란 뜻의 'philo-'를 결합한 말로 영화에 대한 사랑을 글의 행로로 옮겨보고자 하는 격월간 잡지다. 현역으로 활발히 활동 중인 5명의 영화평론가 남다은, 이후경, 정성일, 정한석, 허문영이 국내 고정 필진으로 참여하고, 매호 다양한 해외, 초대 필진이 함께 최근까지 상영되었거나, 앞으로 상영될 가능성이 있는 동시대 영화를 중심적으로 다룬다.

<키노>가 씨네필 문화를 이끌고, <씨네21> <필름2.0> <무비위크>라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영화주간지 전성시대였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함에 따라 긴 호흡과 깊은 통찰이 담긴 글보다 포털사이트 별점, SNS상 정보, TV 프로그램, 시네토크, 팟캐스트로 영화 감상을 정리하는 일이 흔해지지면서 여전히 이런저런 원칙과 논리에 의해 외면당하는 영화마저 끌어안으려는 영화비평은 설 곳을 점점 잃어가고 있다. 그래서 <FILO>는 '영화비평'을 중심으로, 어딘가에서 영화비평의 지속을 기다리고 응원하고 있을 독자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탄생되었다. '영화와 언어와 사랑의 탐색지'라는 슬로건을 걸고, 우리 시대의 좋은 영화, 중요한 영화, 특별한 영화에 글과 사랑을 아끼지 않는 잡지가 되고자 한다.

5월 10일 발간된 FILO 8호(2019.5.6)에서는 2019 전주국제영화제 리뷰, 故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추모 기사,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를 제작하는 데 영감을 준 대상들에 관한 글, <왕좌의 게임> <퍼스트 리폼드> <아사코>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라스트 미션> <유레카>의 작품론, 배우 기주봉에 대한 글을 담았다.

참여 필진으로 고정 필자인 영화평론가 남다은, 이후경, 정성일, 정한석, 허문영을 비롯하여 <카이에 뒤 시네마>의 편집장을 지낸 프랑스 영화평론가 장미셸 프로동, 일본 영화배우 카세 료,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의 감독 테리 길리엄, 문학평론가 정홍수가 함께 했다.


목차

5
EDITORIAL
이실직고

6
INSPIRATION 테리 길리엄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

14
FESTIVAL 남다은 | 2019 전주국제영화제
불운과 행운

34
CURRENT 이후경 | <왕좌의 게임>
귀가의 계절

56
CURRENT 허문영 | 폴 슈레이더 <퍼스트 리폼드>
절멸을 우회한 사랑

68
CURRENT 정한석 | 하마구치 류스케 <아사코> 이시이 유야 <도쿄의 밤하늘은 항상 가장 짙은 블루>
두 개의 장면, 실력의 정체

86
CURRENT 정성일 | 클린트 이스트우드 <라스트 미션>
툼스톤 블루스 인 더 가든

106
OBITUARY 장미셸 프로동 | 아녜스 바르다
아녜스 바르다, 위대한 삶

126
SERIES 정홍수 | 아오야마 신지 <유레카>
집은 어디에 있나

138
ACTOR 카세 료 | 기주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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