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더럽혀지지 않는 흰 이야기들 – 흰 [도서]

삶을 껴안기 위해 애쓰는 너에게 건네는 흰 것들
글 입력 2019.05.19 23:35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아무 생각 없이 읽기 시작한 책이 놀라울 정도로 깊은 울림을 주는 때가 있다.


3년 전 <채식주의자>와 함께 샀던 이 책은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잊혀진 책이었다. 지하철에서 읽을 책을 고르느라 책꽂이 앞에서 고민을 거듭하다 결국 이 책을 집어 든 이유는 단순했다. 얇고 가볍고 하얀, 한강 작가의 책이니까.


그러나 혼잡한 지하철 안에서 한 시간 만에 단숨에 읽어 내린 이 책은 생각처럼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니었다.




소설이자 시, 수필인 흰 이야기



novel-7-korean.jpg
 


한강 작가의 <흰>은 ‘흰 것들’에 대한 65편의 이야기를 묶은 작품이다. 표지에 ‘한강 소설’이라고 적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흰 것들’을 함부로 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이 어려워진다.


<흰>은 내가 무엇을 읽고 있는 것인지 모호하게 느껴질 만큼 시 같기도 하고 수필 같기도 하며, 한편으로는 한강이라는 한 사람을 읽는 것 같은 기분도 드는 작품이다.



boat-1600173_960_720.jpg
 


<흰>은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 숨을 거둔 언니와 작가가 그녀를 떠올리며 느끼는 상념에 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는 한강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녹아 들어 있기 때문에 어떤 챕터에서는 이것이 소설이라는 사실을 완전히 잊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묘하게 느껴지는 것이 오직 장르의 모호함 때문만은 아니다. 짤막한 이야기가 보여주는 이미지들은 어렴풋하게 한강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딘가 연결되어 있는 희미하고 연약한 것, 넋이나 혼에 관한 이야기는 1980년 광주의 5월을 다룬 소설인 <소년이 온다>의 연장선처럼 느껴진다.


또 성에, 서리, 눈을 바라보며 떠올리는 단어와 문장, 언어에 대한 관념들은 <희랍어시간>의 분위기를 흐릿하게 소환하기도 한다.



winter-260817_960_720.jpg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눈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며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 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P.21


이 책은 한 시간 반 정도면 금방 읽을 수 있는 짧은 이야기의 묶음이다. 그러나 나는 그 짧은 시간 내내 목이 메이고 눈에 열이 올랐고, 어딘가로 흐릿하게 흩어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내가 <소년이 온다>를 읽으면서 느꼈던 것과 매우 비슷한 경험이었다.


한강 작가는 2016년에 열렸던 낭독회에서 <흰>은 <소년이 온다>에서 어린 동구가 엄마의 손을 잡고 기왕이면 해가 비치는 쪽으로 가자고 말하는 대목에서 출발한 소설이며, 작가의 내면으로 깊게 들어가 밝지만 그 안에 삶과 죽음이 다 들어있는 흰 것에 대하여 썼다고 설명한다.



winter-landscape-2571788_960_720.jpg
 


내가 한강 작가의 모든 작품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여태 읽은 몇 권의 책에서 느낀 정경은 잠든 아기를 안았을 때 전해져 오는 뜨끈한 열기와 희미하고 연약한 숨결 같은 것이다. 특히 고요하고 연약하지만 온기를 갖고 맞닿아 있는 어떤 것들이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책 역시 읽는 내내 곤히 잠든 아기를 품에 안은 것처럼 조심스럽고 목이 메이기도 하는 벅찬 감정과 동시에 희미하고 연약한 것을 껴안는 처절한 감정도 느껴졌다.



treatment-1327811_960_720.jpg
 


죽지 마. 죽지 마라 제발.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어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P.128


<흰>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희끗하고 연약하고 따뜻한 무언가를 한강 작가에게서 건네 받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생명인 것 같기도 하고 방금 작별한 것 같기도 하고 절박하기도 하고 어른거리기도 하는 ‘흰 것들’이다. 소중하게 품에 안은 ‘흰 것’의 숨결이 오래도록 목에 닿는 것, 이 여운이 내가 한강 작가를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이유이다.





이현지.jpg
 



[이현지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아트인사이트 (ART insight)
E-Mail : artinsight@naver.com    |    등록번호 : 경기 자 60044
Copyright ⓒ 2013-2019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트(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