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나의 삶을 온전히 나의 삶으로 살 수 없는 우리에게 -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

예술이 우리 삶에 존재하는 이유
글 입력 2019.05.15 0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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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 사는 데에는 별 필요가 없습니다”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에 가기 전 쓴 프리뷰 제목에는 굉장히 날 것의 질문이 걸렸었었다. 그리고 꽤 시간이 지난 리뷰를 쓰는 시점에 와서야 이런 생각을 했다.


“나도 모르는 질문을

내가 쓰는 글의 제목으로 쓰다니”


아마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라는 이름이 가진 발칙함 혹은 그 대담함에 나도 괜히 용기를 얻었던 것 같다. “예술? 사는 데에는 별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전시회나 문화 예술 콘텐츠를 위한 프리뷰에서는 절대로 이런 발언(?)을 글로 쓰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반대로 내가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 덕분에 해방감마저 느껴지는 듯한 제목과 함께 예술과 삶에 대한 나의 이야기를 비로소 꺼낼 수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가 궁금해하던 질문이지만 쉽게 꺼내지 못했던, 하지만 한 번이라도 나눠보고 싶었던 이야기를 말이다.


그런 글을 쓰고도 나는 여전히 이 질문 앞에서 혼란스럽다. 질문도, 대답도 쉽게 떨어지지 않는 문장. 그렇게 모든 생각에 “-일까?” 밖에 못하는 나는 늘 다른 이들의 온점 찍힌 저만의 결론들을 궁금해했다. 그런 나였기에,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는 내가 언젠가는 가게 될 전시였을지도 모르겠다. 벌써 제목부터 아무렇지 않게 “원래 그렇지 않은가요?”라고 하듯이 완성된 문장으로 자신을 소개하고 있으니까.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는 전시라고.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

_서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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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나의 삶을 온전히 나의 삶으로

살 수 없는 우리에게



오랜만에 간 서울미술관. 나는 지금 안 봐도 사는 데 지장 없을 것에 시간을 기꺼이 바치러 가고 있었다. 흠, 시간을 바친다는 말이 거창해 보이려나? 하지만 사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사는 데 지장 없는 것에 늘 시간을 바치고 있지 않았나? 그냥 생각을 지나간다.


일상을 격하게 지내온 몸은 진지하게 미리 뭐라도 생각하려 하기엔 이미 피곤함에 찌들어 있었다. 멍하게 버스를 타고 가며 머릿속에 아무렇게 담겨있던 것은 무엇을 만날 것이란 기대나 설렘이 아닌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라는 전시회 제목 혹은 모든 전시회의 민낯을 드러낸 이름만 가득 차 있었을 뿐이었다.


거기에 일상과 예술의 사이를 살펴보겠다는, 나의 관심을 당연하게 끌 수밖에 없던 전시회의 주제를 함께 떠올려본다. 전시회를 가는 오늘의 일상에는 분명히 예술이 함께할 것이었다. 무슨 작품을 만나게 될까, 내가 무슨 생각을 하다가 올까. 늘 하던 소소한 질문을 허공에 띄우는 동안에도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라는 낯선 제목이 늘 하던 것을 조금 생소하게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사는 데 예술이 왜 필요해?”


끝으로 지금까지 나에게 은근한 압박감을 주던 질문을 간신히 떠올려 보면서 나의 갈망하는 마음을 조금 더 수면 위로 올려놓고 전시회에 입장했다. 이 전시회와 나 사이에서 어떤 대답이 만들어질지 도통 예상이 되지 않는 가운데서.



1

“숨어있던 꿈, 아니 순간, 잊고 있던 찰나”


사실 이번 전시회에 참여하는 작품 중 정말 반가운 작품이 있었다. 2년 전인가, 우연히 만나고 나서도 잊지 못하고 있을 정도로 정말 다시 보고 싶던 작품이었다. 바로 황선태 작가님의 작품이었다. 그때 첫 만남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자칫하면 그저 스쳐 지나갈 수 있었던 작품이었는데, 발길을 멈추고 다른 세계에 들어간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작품은 자신이 담은 풍경으로 나를 끌어당겼었다. 이번에 또다시 만난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에서의 황선태 작가님의 작품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조용하고, 어떻게 보면 더 어울리는 공간에서 더 고요하고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황선태_빛이 드는 공간, 2015, 강화유리에 샌딩, 유리전사, LED116x73x4cm.jpg
황선태, <빛이 드는 공간>


왜 유독 이 작품 앞에서는 내가 가진 속도가 머뭇거릴 정도로 그런 차분한 정지를 가깝게 느끼는지 알 수 없었다. 작품은 분명 내 느낌이 반응하는 너무 익숙한 순간인데 동시에 너무 꿈인 것 같아서, 내가 일상에서 저런 꿈을 경험한 적이 있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햇빛의 고요함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저 공간에 어떤 소리의 고요함이 맴돌고 있을지 상상이 자연스럽게 이어질 정도로, 그대로. 지난 시간을 떠올리면 저런 차분한 빛을 직접 마주한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나보다 나의 감각이 먼저 그 꿈을 꾸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을 보다 보면 나를 저 작품 속 햇살 아래 눞히고 싶다는 마음마저 든다. 진짜 햇빛이 아니지만, 내게는 이미 그런 진한 느낌과 감동을 주고 있었다. 


내가 일상 속 햇빛이 닿은 순간을 기억해본 적이 있었을까. 그 사소한 일상의 축복마저 감각하지 못하고 일상을 달려가고 있는데. 특히 아침은 여유로운 시작이 아니라 피곤함과 급함의 상징이 된 게 진짜 일상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황선태 작가님의 작품은 일상이라는 느낌을 주어서 더 꿈이었다. 저런 풍경과 시간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일상을 내가 마주할 수 있을까.


경험했지만 기억하지 않으면 지금의 우리에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 된다. 반면 우린 꿈을 경험하면서도 꿈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황선태 작가님의 작품은 나에게 일상과 꿈을 동시에 끌어안은 순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고, 다가올 시간 때문에 기억하기에는 저 멀리 밀려난 순간이었지만 이 작품 앞에선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는 순간이었다.


들어오는 햇볕이 따스하다는 것을 느껴본 차분한 시간, 언제 한번 햇빛 잘 들어오는 창가 앞에서 뒹굴고 싶다고 말했던 사소한 소원. 작품과 나 사이에서 작지만 따듯한 기억들이 불려졌다. 결국 이 기억들이 일상이든 꿈이든 무엇인지 알 수 없든, 내가 나의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떠오른 것임은 사실이었다.


햇빛의 머무름을 담을 그 쉼표 같은 작품 앞에서 여러 모습의 삶의 조각들이 작품의 모습처럼 모아지고 있었다. 한번도 모아보려 생각도 하지 않은 삶의 순간들이. 매 순간을 천천히 느끼는 것에 매말라 있던 나의 감각은 그렇게 작품 앞에선 어쩔 줄 몰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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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의 풍경



이형준_시간의 풍경, 2017, Oil on canvas,162x 391cm.jpg
이형준, <시간의 풍경>


황선태 작가님의 작품이 따스한 아침의 찰나라면, 이형준 작가님의 <시간의 풍경>은 목적을 쫓는 우리의 속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을 당장 이해하려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아마 우리가 급하게 쫓는 일상을 느끼고 있는 감각이 보는 일상의 풍경은 이럴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첩된 기하학적 덩어리로 이루어진 화면들은 차마 가둘 수 없이 흘러가는 시간과 당연하다는 듯이 그 속도에 맞춰 자신을 이동시키는 우리의 모습을 겨우 붙들어 둔 것 같았다. 저 작품 속에서는 아무도 멈출 수 없다. ‘시간’의 풍경이기 때문이다. 순간을 기억하려는 감각이 겨우 급하게 도장을 마구 찍어 놓은 잔상만 남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잔상 앞에서도 그 풍경이 어떤 순간이었는지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느낌만으로도 작품 속 풍경을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던 것이다.


결국 이 작품 속의 풍경은 익숙한 어떤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들의 익숙한 시간에 깊숙이 들어가 버린 삶의 파편이 돼버린다. 우리는 저 곳이 지하철 같은 공간이기 때문에 공감하기 이전에, 이 작품이 담고 있는 속도와 온도, 그리고 잔상이 주는 느낌에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핏 보면 낯선 이미지가 될 수도 있지만 가만히 바라보면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자연스레 드러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작품을 소개하는 시간이라는 단어는 일상을 살며 바삐 움직이던 나의 속도와 그때의 느낌을 다시 불러 일으켰다.


*


두 작품은 모두 예술로서 우리의 삶을 바라보고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담아낸 우리의 삶은 살기 위해 진행되는 일상과 삶 뒤로 밀려나 쉽게 잊힌 삶의 순간과 이면이었으며, 예술은 자신이 본 삶의 모습을 작품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 앞으로 다시 끌어 오고 있었다. 사람도 예술도 삶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다른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다름은 삶이라는 것에서 서로 공감할 수 있는 지점이 맺어지고 있었다.


같으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이 알 수 없는 경계 사이에서 나는 내가 얼마나 많은 순간을 저 뒤로 보내 버리고, 누가 정했을지 모를 삶의 속도에 쫓겨 살았는지, 얼마나 많은 느낌과 기억들을 그저 스쳐 지나가기만 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일상 틈에 간신히 끼어있던 그 찰나의 꿈, 공간이 아닌 순간들의 잔상, 모두 잊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을 비로소 작품 앞에서 다시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삶을 산다는 건 정말 무엇일까. 모든 순간을 붙들기에는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요구하는 삶은 오히려 우리의 삶을 쉽게 허락하지 않는다. 그렇게 알 수 없는 틀 안에서 나의 삶을 나의 삶으로 온전히 붙잡을 수 없는 지금의 우리에게 예술은 그 틀과 방식에 숨통을 하나씩 열어 놓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에겐 이런 삶의 풍경이 있었음을, 이런 꿈의 찰나가 있었음을 알려주면서.



3

우리의 삶이 예술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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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의민족, <2019년 일력 여기여기 붙어라>



배달의민족 공간에서는 일력의 형식으로 하루 하나에 일상적인 언어가 담긴 종이들이 빼곡히 벽을 채우고 있었다. 아마 이 일력을 어디 상점에서 봤다면 “오 기발한데?”로 그쳤겠지만 이곳에서는 달랐다. 이 일력이 삶과 예술의 관계를 살펴보는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의 맥락에 놓였다는 것은 분명 그 이유가 있을 것이며, 다른 흐름 속에 작품으로 있음으로써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또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게, 누가 나한테 말을 걸면 대답이 하고 싶어지잖아요? 그래서 마음 내키는 대로 그림도 그려보고, 말도 안 되는 낙서도 할 수 있게 <여기여기붙어라> 일력에는 넉넉히 대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렇게 매일 다른 대화를 버리지 않고 일력 박스에 차곡차곡 다시 모으면,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아주 특별한 책 한 권이 만들어집니다. 우리의 일상이 단출하지만 의미 있는 예술로 만들어지는 것이지요.


음식 배달 서비스만 하는 줄 알았던 ‘배달의민족’은 왜 이런 일력을 만들었을까요? 왜 굳이 (깨알 페이지 두 장까지 합치면) 267개나 되는 많은 메시지들을 고민하고, 이런 전시장에까지 모습을 드러낸 걸까요?”


-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 12:30 텍스트 중



앞선 작품들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쉽게 기억하거나 보지 못한 삶의 이면을 드러냈다고 한다면, 배달의민족은 오히려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예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라고 질문하며 익숙하고도 정말 쉬운 방법을 제안한다. 나의 일상을 기록하는 것이다. 너무 단순하고 평범해 보이지만, 그 방법을 먼저 실천한 일력 속 문장들을 보면 그저 단순한 기록뿐만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빼곡한 문장들은 단번에 잠시 우리에게 있었던 순간에 대한 기억을 불러 일으킨다. 마치 어릴 때 쓴 일기나, 심지어 우연히 발견한 오래된, 사소하기 짝이 없는 메모지만 봐도 괜시리 그때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설사 그 기록이 우연히, 특별한 마음 두지 않고 남겨진 것일지라도, 다른 시간을 사는 지금의 나에게 잊힌 그때의 감각과 시간을 불러와 준다는 점에서 나에 대한 기록은 비로소 나를 위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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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예술의 관계에 대해 말하는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에서 배달의민족이 일력으로 내놓은 대답은 사실 정말 멋진 대답이었다. 너무 일상적이고, 익숙한 방식일지라도, 사실 그것이 나를 위한 기록이 된다면 우리의 삶 또한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제안. 나에게는 예술을 정의하는 시선이 새롭게 전환되는 지점이었다. 아, 나를 위한 예술도 언제든지 존재할 수 있구나. 왜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나와 쉬지 않고 흘러갈 나의 삶을 기억할 수 있는 예술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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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나에서 바깥으로.

일상 속, 우리를 둘러싼 예술.


영화 포스터는 일상에서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예술이다. 영화관, TV, 인터넷, 심지어 지나가는 버스에서도 볼 수 있는 예술. 사실 예술이라고 생각을 딱히 해보지 못한 예술. 그런 영화 포스터의 이야기를 담은 섹션이 전시회 중 "새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영화 포스터는 어떻게든 사람들이 자신을 보게 만들어야 한다. 굵직하고 선명한 글씨,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디자인, 어느 하나 흐린 것 없이 선명한 대조로 남기는 인상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다면 예술로서 바라보는 영화 포스터는 (특히 대중적인 영화 포스터일수록) 예술적 자유보다는 자신이 수행할 목적이 너무나 선명한 예술이었다. 예술성에 대한 욕구와 자신을 드러내고 각인되어야 한다는 목적 사이에서 영화 포스터는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 걸까. 세상 속의 영화 포스터는 예술로서 어떤 딜레마를 가지고 있다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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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풍찬사!”

“신화세례!”

“!대개봉!”

”흥행!”

”심장을! 울리는! 가슴을!”


라고 나는 이 전시 공간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의 시선을 피하고 눈을 돌린 포스터를 채운 인물들의 모습과 그 곁에 무려 형광색과 굵직한 글씨로 도배된 자극적인 단어들을 보며 말이다. 너무 대조적이었다. 포스터 속 인물은 어떻게든 자신을 보려는 이들의 시선을 피하려 하는데 주변의 문구는 어떻게든 사람들이 그를 보고 주목하게 만들고 있었다다.


한편 이 슬픈 포스터가 붙어 있는 벽 뒤로 넘어가면 이번에는 포스터가 온통 도배되어있고 같은 방식으로 자극적인 문구가 달려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반대의 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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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아까운"

“한숨나는”

“눈이썩는”

”핵노잼”

”발로만든”

”쓰레기”


이 단어가 선명하게 찍힌 거대한 스티커 뒤에는 무엇이 있었냐면, 우리가 그렇게 영화관에서 익숙하게 봐오던 영화 포스터들이 도배되어있었다. 왜 이 포스터들 앞엔 이 문장이 붙어 있었을까. 분리된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영화 포스터라는 예술을 둘러싼 외면과 내면이 얽혀있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오늘날 상업예술이 가진 딜레마일까. 목적에 맞추어 만들어진 포스터는 과연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가. 영화 포스터로서 추구할 수 있는 예술성이란 무엇일까? 떠오르는 질문들 중 명확하게 잡히는 것 하나 없었지만 어떤 방향으로든 예술로서의 영화 포스터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을 사실이었다. 우리가 일상적이어서 깊게 생각해보지 못했을 뿐, 영화 포스터 같은 예술도 저마다의 깊은 고민과 사색을 가지고 존재하고 있었던 것 같다. 여전히 궁금하다, 이 대조되는 외부와 내부의 포스터 배치와 문구의 배치는 무엇을 의미하고 있던 걸까.



“도시의 어느 거리, 사람들의 눈에 띄기 위해 아우성치는 포스터는, 다소 어색한 곳에 놓이게 될 지라도, 무심하게 지나치는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기를 바랍니다. 사업 시장 속 어려운 세상에서, 가장 만만하면서도 가장 강렬하게, 포스터는 그렇게 거리 한 켠을 지킵니다.”


-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 2:45 텍스트 중




*

나의 삶을 온전히 나의 삶으로 살 수 없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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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이지 않은가. 나는 나의 삶을 나의 삶으로서 온전히 살 수 없다니. 하지만 이 말은 내가  작품이 말하는 우리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떠올린 것이었다. 작품이 보여주는 우리의 모습은 공감이 되면서도 일상을 살아가며 보면서도 보지 못한 것들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삶을 기억할 수 있는 한편으로 데려오지 못한 순간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렇게 많은 삶의 순간들이 잊히고 있었던 것이다.


한 사람의 삶으로서 내가 자라나는, 여전히 세상의 극히 일부일, 시간과 공간을 살면서 이미 내가 볼 수 있는 시선은 그만한 틀에 맞추어지기 시작하고, 동시에 일상마저 반복되는 틀에서 이루어진다. 저마다의 틀에 끼워져 있는 동시에 같은 틀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그 틀을 꽉 채우며 그 모양대로의 삶을 살아간다. 결국 그 틀 때문에 나의 삶을 나의 삶으로 온전히 누릴 수 없게 된다. 어쩌면 불가피한 것이고, 한편으론 당연한 것이라서 한 사람의 삶으로서의 모든 것을 느끼고 기억하는 삶이란 것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은 사람으로서 더 많은 것을 감각하고 느낄 가치와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텐데. 어쩔 수 없다는 생각들 끝에는 아쉬움 가득한 소원이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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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 우리 삶에 함께하는 이유는 여기서 나타난다. 그들은 기어코 그 단단하다는 표현조차 모자란 거대한 틀에서 저만의 방식으로 비집고 나와 그 너머의 것을 우리에게 말한다. “우리의 삶에는 이런 모습도 있어요!”라며 말이다.


반면 우리 일상 틈에서 존재하고 있던 예술은 묵묵히 우리의 일상을 조금 더 풍요롭게 하기 위해 곳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전시회에 미술 작품뿐만 아니라 일력이라는 일상적인 형식의 책, 게임, 책, 영화 포스터 등이 함께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우리는 당연하게 그런 것들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우리를 위해 세심하게 창조된 예술이라는 생각을 잘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다시 미술관에 작품으로서 놓였다는 것 자체만으로 우리에게 예술이 무엇인지, 더 나아가 예술이 얼마나 우리에게 가까이 있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내게 <안봐도사는데 지장없는전시>는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일상도 예술도 삶이라는 것 안에서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생각해보면 오히려 내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내 일상을 가둔 틀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는 데에 급급해서, 사는 데 지장 있다고 정의된 것을 챙기는 것조차 버거워서. 곁에 있는 것조차, 심지어 나의 삶조차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생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저번 프리뷰에서 일상과 예술은 모두 사람이 존재해야 의미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들이 모르던 둘만의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질문했었다. 지금의 나는 일상과 예술의 관계를 두고 일어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으로서의 일상과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삶을 보여주는 예술 모두 사람을 두고 ‘삶’을 찾아내기 위해 지금까지 역동해오고 있던 것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우린 앞으로도 나의 삶을 온전히 나의 삶으로 살 수 없을 것이다. 계속.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우리에게 쥐어진 기회인 것이다. 나의 삶이라는 것에서 더 무엇을 찾아갈 것인가. 쉽게도 꿈을 꾸던 예전과 달리 손에 쥐어진 똑같은 도장만 반복해서 찍고 있는 우리에게 예술은 우리가 보지 못한 삶을 묵묵히 담아내며 삶의 곁에서 존재하고 있었다. 예술이 그런 존재라면, 삶에서 잊힌 것을 다시 남길 수 있는, 그리고 지금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예술로부터 데려올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사실 그렇게 많은 삶의 순간들이 그렇게 조금 더 풍요로워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특별히 작품 앞에서 대단한 것을 느끼지 못한 순간에도. 그저 단순한 마음에 작품을 찾아간 순간에도 말이다.


이제 나는 다시 질문하고 싶다. 나에게, 그리고 예술과 함께 존재하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예술, 정말 사는 데에 별 필요가 없는걸까?”






대표 포스터 이미지.jpg
 



오예찬_문화리뷰단.jpg
 

[오예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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