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시대 속에서 '나'로 살 용기를 보여주다, 연극 - 여전사의 섬

'여전사의 섬'에 당도한다는 것
글 입력 2019.03.29 14: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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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여전사의 섬>은 서울시극단 ‘창작플랫폼-희곡작가’ 프로그램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이다. “한국 연극의 미래가 될 수 있는 신진 예술인을 발굴하고 양성"하기 위한 이 프로그램은, 작가가 활동 기간 내 집필에 전념할 수 있도록 창작지원금과 전문가 지도 및 리딩 공연을 지원한다. 기존에 증명된 작가도 아니고 신진 작가에게 작품을 쓰고 공연에 올리는 과정을 돕는 것은, 연극계의 현실이 너무나도 힘들기 때문이리라. 예술을 아끼는 분들의 긴 호흡과 배려로 탄생한 이 연극은, 그 과정의 절실함을 증명했다.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2015-2018년도는, 우리 사회에 페미니즘이 리부트 되던 때였다. 프로그램을 멘토링한 고연옥 작가는 극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시대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강력한 사회적 발언’을 하긴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강력한 사회적 발언’만이 꼭 답은 아니다. 오히려 방향성을 고민하는 연약함이 이 시기에 미덕으로 작용될 수 있다. 연극 <여전사의 섬>은 이 연약함을 연대하고자, 먼저 피해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귀 기울임’이 현재의 상황에만 적용된다면 차별의 문제를 미시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같다. 차별의 구조적인 문제에 응답하기 위해선 계보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계보의 역사를 추적하는 것은, 현재를 거시적인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여전사의 섬>은 여성으로서 차별받는 지니와 하나의 문제를 먼저 그리고, ‘엄마’라는 존재를 소환하여 차별의 계보를 추적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답을 구하고자 한다.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단체.jpg
 

극이 시작할 무렵, 취업에 계속 낙방하는 지니는, 자신이 취업에 떨어지는 이유를 '엄마'라는 존재에게서 찾는다. 어릴 적 헤어진 엄마가 자신의 인생에 '결핍'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빠는 지니의 갑작스러운 물음을 거부하지 않고, 엄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빠는 자신의 순수한 사랑을 찾으러 우크라이나로 원정 결혼을 떠났다. 무작정 사랑 고백을 하는 40대 남성을 ‘순수함’으로 포장하기엔 많은 공백이 있지만, 아버지는 엄마를 보자마자 반했다. 엄마는 여전사의 섬 이외에 다른 것엔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씨를 받으면 여전사의 섬에 갈 수 있다는 생각에 그와 결혼한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녀는 아이를 낳아도 여전사의 섬에 가지 못한다. 실망한 엄마는 가정을 두고 홀연히 떠난다.

지니, 아빠와 엄마의 관계성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던 점이 아쉬웠지만, 하나의 이야기로 극은 보다 명확해진다. 하나는 승무원으로 결혼을 앞두고 있지만, 예비 시부모님은 가부장적이다. 여성들은 결혼하고 ‘며느리’가 되는 순간, 자신의 위치가 은연중에 낮아지는 걸 감각적으로 느낀다. 그런 하나의 처지를 설명해줄 사람이 부재한 상황에서, 하나는 ‘엄마’라는 존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렇지만 가족을 꾸려야 하는 상황에서 이를 버리고 떠난 엄마의 존재가 부담스러웠는지 무관심하게 대한다. 말은 안 해도 스스로 어떠한 여성적 정체성을 갖고 싶은지, 욕망과 의무 사이에서 누구보다 많이 고민했을 테다.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지니(허진) 하나(김유민).jpg
 

계속 취업에 성공하지 못한 지니는 파트타임 일을 구한다. 사장은 금전적, 성적으로 아르바이트생을 괴롭힌다. 퍼스트 클래스에서 난동을 부른 승객에 테이저 건을 쏜 하나는 직장에서 권고 퇴사를 당한다. 예비 시부모는 하나의 행동을 ‘일’로 보지 않고, 개인의 폭력성이 표출된 것이라고 판단한다. 승무원을 전문적인 직업이 아닌 '예쁜 여성'이 서비스를 하는 것쯤으로 여긴 것이다. 이 두 가지 일에는 모두 여성으로서 겪는 차별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일을 ‘성차별’적인 일로만 여기는 것은 조금 단순해 보였다. 지니와 하나는 왜 ‘노동자’로서의 의식을 가지지 않았을까? 그들에게 ‘여성’이라는 자아만 있고, ‘노동자’의 의식은 없나? ‘애인’,‘아내’, ‘며느리’, ‘가족’이라는 의식은 어떠한가. 한 가족의 구성원이 될 사람이 부당해고를 당했는데 로펌, 사업 고객이라는 이유만으로 침묵을 강요했다. 나를 위로해주긴 하지만, 분노하지 않는 애인을 보며 상대가 나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 볼 수는 없었을까.

극이 하나의 일관성을 유지하려면 이러한 코드를 다 담을 수는 없을 테다. 실제 이 연극은 하나의 주제의식을 속도감 있게 전개하는 것이 큰 장점이었다. 여기에 여러 코드가 들어가면 전개가 엉키거나 지루해질 수 있지만, 그럼에도 ‘여성’ 하나만을 가지고 간다는 것이 현실적이지는 않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가해자의 모습이 '악마'처럼 그려지는 것 또한.


[세종] 서울시극단_여전사의섬_엄마(김원정)2.jpg
 

그래서 마지막에 '주체됨'을 선언한 두 사람의 모습은 조금 당황스러웠다. 폭력을 부정하는 것이 곧 주체됨을 의미하진 않는다. '나'로서의 의식을 가지고 폭력에 대항하는 것과, 단지 폭력이 무섭고 싫어서 빠져나오는 것은 다르다. 싸우는 일의 고단함과 '나'의 여러 자아를 고민하는 일이 생략되고, '나'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일은 조금 맥이 빠지는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인상 깊었던 것은, '주체됨'을 선언하는 것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폭력을 당한 사람은 대개 가해자와 세상에 강한 적개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거기서 빠져나와 다시 세상과 타인에게 애정을 갖는 건 정말 많은 수련의 시간을 거쳐야 한다. 고로 미덕이지 의무는 아니다. 둘의 선언엔 '나'는 있지만, 미덕의 제스처는 없다. 이를테면, '좋은' 나, '멋있는' 나, '훌륭한' 나는 없다. 이효리가 "뭘 훌륭한 사람이 돼? 그냥 아무나 돼"라고 그랬듯이.

시대에 응답하면서 개인을 잃지 않는 태도는 연극 <여전사의 섬>이 내게 던진 숙제와도 같다. 여기저기 혐오의 제스처가 범람하는 상황에서 극이 '균형감'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은, '연약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 메시지가 자신처럼 가늘고 길게 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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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빈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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