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이제는 갖기 힘든 마당에 [사람]

지나쳐온 집에 대한 단상
글 입력 2019.02.21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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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만으로 당시의 향기와 온도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기억이 있다. 코스모스 꽃밭 옆에서 아빠의 무릎을 베고 누워 귀를 맡기던 기억. 아빠 무릎을 베개 삼아, 꽃 향기 섞인 봄바람을 이불 삼아 잠에 들던 일곱 살 정도의 나. 그때의 회상은 스물일곱 지금의 내게도 마치 스르륵 잠에 들 때의 기분처럼 완벽한 평온을 느끼게 한다.



마당.jpg


 
최초의 집

이 기억은 우리 집 마당에서 만들어졌다. 우리 가족은 그곳에서 13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 이사를 했고, 그곳이 내겐 최초의 집이 되었다. 당시 우리 집엔 에어컨이 없었다. 때문에 여름이면 온 가족이 나시 차림을 하곤 마당으로 나섰다. 파라솔 밑 평상에 누워 엄마표 오렌지맛, 포도맛 하드를 나눠 먹고, 아빠가 마당 한쪽에 만들어준 풀장에서 삼 남매는 열심히 살갗을 태웠다. 5월 내 생일 즈음엔 철쭉꽃이 선물처럼 피어났고, 할머니가 감이 익었나 감나무를 연신 살피는 일은 겨울의 시작을 알렸다. 이외에도 철마다 토마토, 완두콩, 가지, 오이, 당근 등. 열대과일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작물이 태어났다. 이렇게 마당은 우리 가족을 응집시킬뿐더러 한 발자국 앞에서 계절을 학습하게 했다. 또한, 동네 사람들을 잇는 역할에도 충실했다. 어른들은 우리 집 담장을 사이에 두고 길을 지나던 이웃들과 연신 대화를 나눴다. 그곳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어른들에겐 친구나 다름없던 이웃이었다. 마당에서 그들과 자주 모여 음식을 나누기도 했다.

당시 나는 우리 집에 이런 마당이 있다는 것이 늘 자랑 거리였고, 마당에 얽힌 추억은 말수 없는 나도 수다쟁이로 만들 만큼 여전히 아름답고 풍요롭다. 그런데 이런 추억을 뒤로하고, 어른들은 바로 옆 동네에 아파트가 생긴다는 소문이 돌던 때부터 별안간 이사를 계획했다. 그리고 난 엄마가 날 낳던 해의 나이에 가까워진 지금에서야 그 계획이 급작스럽지 않은 것이었음을 안다.

우리 집은 나의 아빠의 아빠의 아빠가 나고 자란 아주 오래된 기와집이었다. 그럼 백 년쯤 된 곳이었으려나. 나름 편의를 위해 현대식으로 고쳐 생활했지만, 가옥의 구조는 어찌할 수 없었나 보다. 마당을 포함해 140평 정도 되는 아주 너른 집이었다. 부엌 한쪽엔 가마솥이 있었고, 안채에서 부엌, 내 방을 오갈 땐 신발을 신고 다녀야 했다. 비밀의 방 같은 창고도 몇 있었다. 모든 공간의 난방은 역시 수동식이었다. 때문에 엄마는 겨울이면 매일 싸늘한 부엌에서 딸각딸각 아침을 짓고, 가족들이 따뜻한 단잠을 잘 수 있도록 밤마다 연탄불을 살폈다.

대략 50평이 넘는 마당을 관리하는 일은 할머니가 도맡았다. 동네에서 '감나무 집'으로 불리던 우리 집은, 겨울마다 할머니의 지휘 하에 온 가족이 감 300개쯤을 따야 했다. 할머니는 마당의 작물이 잘 자라도록 거름을 주고 매일 텃밭을 살폈다. 흙이 많은 집이어서인지 속눈썹만큼이나 풍성한 다리를 가진 벌레가 출몰하는 것도 부지기수였다. 아파트로의 이사는, 나 조차도 아파트에 사는 다른 친구들의 삶이 궁금할 때쯤 이 생활을 가장 오래 한 할머니의 결단이었다. 흙과 가까운 생활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나, 그만큼 몸이 고된 것은 사실이니까.



50cm만큼의 거리

건축가 유현준의 지론에 따르면 아파트 구조는 전통 가옥의 구조가 반영된 것이라 한다. 방과 방을 잇는 거실이 옛 가옥의 마루 역할을 한다고. 당시 마루는 우리 집 마당처럼 다양한 기능을 했고, 방마다 마루 쪽으로 창이 나있어 각자 방에 있어도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한다. 하지만 아파트 방 벽엔 거실을 향한 창이 없고, 거실은 옛 마루에 비하면 많은 기능을 상실했다.

아파트에선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을 나서기 전까진 계절을 느끼기도 쉽지 않다. 이제 창을 넘어 보이는 것은 숲처럼 들어선 아파트와 고층 건물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또한 공간적 제약이 생기니 가족들의 행동도 제한되었다. 계절마다 다른 행동을 했던 우리 가족도 이제는 봄여름 가을 겨울 부동의 자세로 티브이만 본다. 더군다나 마음을 먹지 않고서는 주변 이웃들을 알기가 쉽지 않아 졌다. 아래층 아저씨와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이였는데, 어제는 "학교 가니?" 라 물었던 그가 오늘은 "출근하니?"라 물었다가 내일이면 다시 "이제 고등학교 졸업하니?"라 묻곤 했다. 아파트의 층간은 대게 50cm다. 그와 꽤 오랜 시간을 50cm만큼의 거리에서 지내면서도 이름과 나이조차 몰랐던 것은 돌이켜보면 아파트가 단절된 사회를 형성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와중에도 엄마들은 남다르다. 4층 아줌마가 이번 연도 동장이 되었고, 11층 첫째가 어느 대학을 가며, 5층 신혼부부가 얼마 전 쌍둥이의 부모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다. 놀랍게도 엄마들은 외출 시 엘리베이터를 우연히 같이 탔을 뿐, 엘리베이터가 아닌 곳에서 만난 적은 없다. 이제 나는 엄마가 또 몇 층 누군가의 소식을 알려올 때마다 '엘리베이터가 현대판 마당인가', 라는 생각도 든다. 오래 머물 수 없는 1평짜리 마당. 엄마는 이렇게 아파트의 단절된 생활 속에서도 이웃들에 관심을 기울일 정도로 안식을 찾았고, 할머니는 바쁘게 움직이던 옛 생활이 몸에 배어서인지 아파트로 온 지 13년이 된 지금도 거실에서 화분을 가득 가꾸고, 달에 한 번씩 김치를 담그는 등 늘 일거리를 찾는다. 그렇다 해서 마당집이 절대 그립진 않다고 말한다.

*

옛 집에 비하면 너무나도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는 지금의 내겐, 마당집에서의 풍요로운 추억과 불편했을 기억이 조리 없이 오간다. 반면에 어른들에겐 그곳에서의 기억이 불편했던 기억에 가깝다니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든다.

아빠가 내게 선물한 기억처럼, 이제는 내가 어른들에게 평온한 기억을 선물하고 싶다. 고된 기억이 아닌, 회상만으로 오래도록 미소 짓게 하는 그런 기억.

그 방법을 생각하니 편리한 도심 속 유유자적한 전원생활만 떠오른다. 일곱 살의 나처럼 아무런 걱정이 없는 상태에서야 행복한 기억이 만들어질 테니까. 이제는 그런 풍요로운 공간을 갖기 힘든 마당에 말이다.


[김선영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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