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싱스트리트(Sing Street, 2016): 당신들의 런던은 어디인가 [영화]

그곳으로 가자, 그대가 슬퍼도 괜찮을 곳으로.
글 입력 2019.02.20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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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의 뜻을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어린아이의 마음'(童心), 둘째, '마음을 같이 함'(同心), 셋째, '자극을 받아 마음이 움직임'(動心)이 그것이다. 존카니 감독이 그려내는 홍조 띈 소년, 코너의 이야기인 '싱 스트리트'를 쫓으며 우리는 코너의 심리와 동화한다. 영화에 말미에 다다르며, 그 동화의 순간이 축적되면, 우리의 마음은 선명히 움직인다. 결국 '동심'(童心)으로.



'어쩌면 긴 뮤직비디오'


싱스트리트 영화 줄거리.jpg
 

누군가는 '싱 스트리트'를 성장영화라 말한다. 작고 왜소한 체구와 그에 비례하는 소극성을 뽐내는 소년코너가 소녀 라피나를 만나, 사랑을 매개로 한 음악을 매체로, 세상을 향해 그 자신을 노래하는 이야기라고. 또 어떤 이는 이를 창조적 히어로 영화로 정의한다. 가족과 사회 그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던 한 소년이 기타를 매고, 노래를 부르며 자신과 바깥의 세계를 변형해 나가는 이야기라고. 모두가 옳다. 그렇기에 양자의 공통점을 도출해보면, '음악'을 그 중심에 둔 '작은 소년의 성장담'이다. 그래서 나는 이를 '어쩌면 긴 뮤직비디오'라 부른다.

영화의 줄거리는 가볍다. 1985년, 경제불황으로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아일랜드의 소년 코너는 금전적 문제로 전학을 가게 되고, 그 곳에서 모델 지망생인 라피나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저 그녀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너무도 소극적이었던 코너는 자신의 밴드 활동을 꾸며내고, 급기야는 라피나에게 뮤직비디오의 출연을 제안한다. 코너는 다소 허술한 방식으로 금새 밴드 '싱 스트리트'를 꾸려내고, 락음악 애호가인 형 브랜든의 도움을 받아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다. 라피나를 향한 첫 노래를 시작으로 코너와 그의 음악은 점차 자라나고, 코너와 라피나의 사랑 또한 무르익어, 둘은 함께 꿈을 쫓아 떠난다.

'싱 스트리트' 내부에서, 뮤직비디오는 라피나와 코너, 그를 넘어 싱스트리트 밴드 사이의 매개체로 역할한다. 라피나를 향한 코너의 구애라는 목적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뮤직비디오의 제작은 라피나로 시작해 라피나로 종결한다. 그녀를 염두에 둔 코너의 음악은 라피나의 미장센에 의해 영상으로 창조된다. 라피나는 코너의 뮤즈이며, 라피나의 연기는 코너의 음악에서 출발한다. 둘은 예술이라는 목적지를 함께 향하는 선원이며, 영화는 그 항해의 과정을 적합한 사운드 트랙과 함께 잔잔하고도 강렬히 그려낸다. 그리고 그들의 길 위에 자리한 몇 가지의 은유는 코너와 라피나의 세계를 보다 공고히 구축한다.



하나. '갈색 구두', 정체성


싱스트리트 갈색구두.jpg
검정 구두들 사이 코너의 갈색 구두는
외롭게도 선명하다.
 

형편이 어려워 전학을 감수한 코너에게, 권위주의의 전형인 벡스터 교장은 교칙에 따라 검정 신발을 착용할 것을 강요한다. 영화 초입의 수줍은 소년이 아닌, 밴드 '싱 스트리트'의 음악으로 말문을 틔워 나가던 코너는 벡스터와의 이어지는 대면에도 해당 교칙의 준수를 피한다. 코너는 벡스터에게 어려운 형편으로 검정 구두를 사지 못한 일에 대한 이해를 권유하나, 물론 극 중에서 코너가 자신의 부모에게 검정 신발을 요구하는 장면은 그려지지 않는다.

그는 교내 모두가 교장의 권위에 순종하여 검정 구두를 착용한 사실과는 다르게, 검정 물감으로 갈색 구두의 발등 면을 물들여 학교를 걷는다. 이를 보다 확장하여 해석하면, 우리 사회가 명시적으로 내지는 암묵적으로 강요하는 가치규범에 있어, 이를 거부하고 되려 창조를 통해 그들의 천편일률적 가치를 조롱하는 유희이다. 그러므로 갈색 신발은 코너의 정체성을 표상하며, 극의 결말부에 이르러 그는 갈색 신발과 갈색 자켓, 갈색 가방을 몸에 두른 채 아일랜드를 떠난다.

그렇다면 왜 갈색 신발은 정체성의 표상이 될 수 있는가. 우선 인간의 발은 고전적으로 정체성을 상징하는 은유적 소재로 사용되어 왔다. 단편적인 예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의 원형이 되는 설화를 들 수 있겠다. 더불어 갈색은 일반적이지 않은, 보다 예민한 시선에 포착될 때 비로소 검정색과의 구별에 따라 그 색을 선명히 한다. 사람의 외양을 묘사하는 경우, 갈색은 검정색으로 대체해서 쓰이는데, 예를 들어, 우리는 대부분 아프리카인을 흑인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그들의 피부는 진한 갈색인 경우가 그것이다. 또 하나로, 우리가 동양인의 검은 눈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자세히 보면 짙은 갈색으로 분류됨이 정확하다. 검정 신발을 가치의 기준으로 강요하는 사회의 표본인 학교에서 코너는 자신의 색을 잃지 않았고, 그렇기에 감독은 코너와 그의 예술을 응원한다.



둘. '런던', 슬퍼도 괜찮을 곳



"저기 맑은 날에는 실제로 영국 본토를 볼 수 있어요. 아일랜드는 웨일즈 해안에서 30마일 거리 밖에 안되요. 그건 몰랐을 거에요. 금방 비가 내려서, 공기 중에 먼지도 없어야 해요. 그럼 영국을 볼 수 있어요.", 코너



"형이 그랬어요. 모든 예술가들은 이 아일랜드를 떠나야 한다고요. 남아있는 예술가들은 모두 우울해져서 알코올 중독자로 변했어요.", 코너



극의 중반부에 이르러, 코너와 라피나는 아일랜드의 어느 곳에서 뮤직비디오를 촬영한다. 둘은 런던의 어딘가를 함께 바라보며 대화를 나눈다. 그들에게 런던은 꿈의 장소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아일랜드 더블린으로, 시간적 배경이 되는 1985년 당시, 극심한 경제적 불황에 놓인 채 청년들의 이민을 양산한다. 그들의 도피처는 약 30마일 거리의 영국에 자리한다. 비가 내리지 않는 맑은 날, 공기 중 먼지가 많지 않은 투명한 하늘 아래서야 비로소 그 자태를 보여주는 영국은 당시 희망이 보이지 않던 아일랜드의 청년들에게 있어 하나의 희망으로 남는다.

뮤직비디오 촬영의 대상이 되는 노래는 '행복한 슬픔'이라는 라피나의 언급에서 쓰여졌다. 사뭇 모순적으로 들리는 라피나의 말에 코너는 형 브랜든에게 도움을 청했고, 브랜든은 이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글쎄, 내 생각에는 그녀가 한 말의 뜻은 너의 인생에서 그곳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야. 너가 슬퍼도 괜찮은 장소 말이야.", 브랜든



이어 브랜든은 여동생과의 천직에 대한 언쟁을 벌인다. 천직이란 무엇이든 될 수 있는거라고, 심지어 예술가가 되는 일 조차도. 어릴 적 화가의 꿈을 조각낸 채, 건축가를 지향하며 자신의 '천직'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여동생에게, 브랜든은 기꺼이 언성을 높인다.

서울의 미세먼지는 갈수록 기승을 부린다. 세찬 비가 내릴 때에야 비로소 대기의 먼지는 조금 약세를 보이는데, 빗줄기 또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런던을 가려버릴 뿐이니, 도시의 청년들에게 런던은 그리 가시적이지 않은 듯 하다. "꿈이 없다"는 명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닌, 당연히 그러한 일이 되어간다.



셋. '조각배', 불안정한 이끔


싱스트리트 유람선.png
 

극의 말미에 이르러, 코너는 형 브랜든의 차를 타고 라피나와 선착장에 도착하고, 라피나와 함께 런던으로 출항한다. 조각배라고 불려야 마땅할 만큼의 작은 요트는 코너와 라피나를 실고 거친 물결에 휩쓸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항해 도중 마주한 유람선과의 충돌 위험 또한 코너의 기지로 무탈히 지나친다. 둘의 항해의 끝은 그려지지 않은 채, 그렇게 영화는 막을 내린다. 그들의 항해는 성공할 수 있는가.

감독은 열린 결말을 선택하는 것으로 하나의 메시지를 제시한다. 이는 우리의 삶은 모두 도상(道上)일 뿐이라는 하나의 조언이다. 감독은 "코너와 라피나가 런던에 무사히 발을 디디고, 그들의 예술적 행보 또한 순항을 했더라"는 결론이 아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지는 두 인물의 진취적인 변화를 중점으로 극을 전개한다. 이는 청중으로 하여금 그들의 삶을 낙관적으로 예측하도록 유도한다. 그리고 그 낙관의 전제는 는 물론 결말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코너와 라피나의 성장, 즉 앞서 그려진 그들 삶의 과정에 있다.

코너와 라피나의 항해에서 충돌의 위기를 수반하는 대상은 규모있는 유람선이다. 유람선은 앞서 극의 중반부에 또한 카메라의 시선에 포착되는데,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유람선의 표상을 자유로이 추측해 볼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된다. 영화의 시공간적 배경을 고려했을 때, 유람선에 올라탄 승객 또한 희망이 없는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을 향하는 이주민들임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두 코너 그리고 라피나와 같은 목적지를 지향한다. 그러나 유람선의 승객들에게는 자신들의 항해 경로를 주체적으로 결정할 권리가 부여되지 않는다. 그들은 배의 선장이 움직이는 키에 따라 그 안정성을 그저 신뢰하며 이끌리는 것으로 목적지에 도착한다.

이와 달리, 코너는 작은 요트에 올라타 배를 이끌 자유를 부여 받는다. 코너와 라피나는 항해의 과정에서 거친 물살과 직접 마주하며, 자신들이 설정해 가는 경로를 따라 목적지에 도달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차디 찬 물에 젖고, 찢어지는 바람에 얼굴을 내놓았다 한들, 누구보다 하얀 웃음을 보일 수 있다. 분명 위태로운 항해일지라도, 그들은 선명한 종착지를 향해 분주히 키를 움직이며, 결국 그곳에 다다를 것이다. 유람선이 표상하는 '안정된 이끌림', 작은 요트가 표상하는 '불안정한 이끔', 양자 중 무엇에 가치의 무게추를 올리는 지는 각 개인에게 달려있으나, 적어도 감독은 후자의 삶을 보다 긍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Go Now'


글이 길었다. 이제 몇 가지 화두를 제시하는 것으로 사견의 기록을 멈추고자 한다. 그대의 '갈색구두'는  아직 남아 있는지. 그대에게는 그 구두를 신고 나아갈 '런던'이 있는지. 코너에게 런던이자, 그대에게는 어딘가일 목적지를 향하는 삶의 항해에서 우리는 '조각배'의 키를 스스로 움직이며 항해하고 있는지.

위 질문에 어설프게나마 답할 수 있는 당신이라면, 그곳으로 가자. 그대가 슬퍼도 괜찮을 곳으로.


싱스트리트 결말 2.jpg


[송범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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