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흔적 남기기 [여행]

글 입력 2019.01.24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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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두 번째 수능을 마치고 자전거와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샀다. 각 지역의 지도를 모으고 여벌 옷을 꾸렸다. '언젠가 한 번은'을 다짐하던 자전거 여행. 도서관과 집을 지겹게 전전한 지난 1년을 마무리하기에 알맞은 여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매서운 겨울 날씨 덕에 여정은 편치 않았다. 기대했던 낭만 따위 느낄 여유 하나 없이 열심히 페달을 굴리던 7일째, 마침내 목표했던 한반도 땅끝 해남에 도착했다. 땅끝 전망대에 도달하기 마지막 고갯길에 이르자 찻길 옆 시멘트 벽을 따라 수많은 낙서가 보였다. 앞선 여행자들의 방명록이었다. 여기까지 왔다는 성취감과 나도 있었다는 자부심에 내 이름 석 자 남기려 돌 하나를 주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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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거기 낙서하면 안 돼!"

커다란 트럭에서 내린 한 아저씨가 다그쳤다. 덕분에 나의 흔적은 남지 못했고, 여행이 끝나 집에 돌아와서도 그것이 못마땅했다. 소나무같이 살아 숨 쉬는 생명도 아니고 오래된 유적지도 아닌, 그저 길가에 늘어진 시멘트벽이었을 뿐이다. 빼곡한 글자 사이로 세 글자 더 추가된다고 더 나빠질 건 또 무엇인가. 오히려 땅끝마을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뿌듯한 낙서를 남긴 것이고, 이것이 이곳의 가치가 될 수도 있지 않나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서야 그 생각들이 이기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알량한 만족을 방해받아 부린 치기였다. 그 벽은 나의 것이 아니었고, 공식적으로 낙서가 허용된 곳도 아니었다. 내가 그곳에 흔적을 남길 권리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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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부끄러움 때문인지 어디서든 낙서를 볼 때면 마음이 불편하다. 특히 해외에서 만나는 한글 낙서만큼이나 얼굴 붉히는 일은 없다. 그 낙서를 보는 외국인들의 따가운 눈총이 마치 나를 향한 것과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수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낙서를 하는 것일까. 자신의 이름과 연인의 이름을 보고 많은 이가 눈살 찌푸리는 건 결코 기분 좋은 일이 아닐 텐데 말이다. 간혹 어글리 코리안으로 언론에 소개되는 사건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지난 흔적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 소설가 김영하는 불안정한 자들에 대한 연민의 시각으로 낙서를 바라봤다. 작가다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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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무언갈 남기려 한다. 사회생활을 하는 것, 나를 표현하는 것, 어쩌면 아이를 낳는 것까지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시도라고 했을 때, 낙서를 남기는 것 또한 인간 본성의 발현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물론 인간이라는 동물이 본성만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니기에 모든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본성은 종종 윤리의 울타리 안에 제어되어야 한다.

그날 이후 여행지에 낙서를 남긴 적은 당연히 없다. 하지만 타지에 흔적을 두고 오고자 하는 욕구는 언제나 있었다. 스위스에 있는 동안 나와 친구는 항상 눈사람을 만들었다. 눈 덮인 산에 올라 어린아이 마냥 눈사람을 만들고 그 지명을 따 이름 지었다. 돌을 모아 내 이름을 만들었고, 모래 위에 추억을 남겼다. 물론 그것이 오래가지 않을 것을 안다. 모래사장의 글씨는 곧 다가올 밀물에 깨끗이 씻길 테고, 작은 돌멩이는 어린아이가 휘두른 손에 산산이 흩어질 것이다. 눈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그것들은 금방 사라지지만 그 순간은 사진으로, 이야기로 남아 추억이 된다. 윤리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의 이 정도 흔적 남기기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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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이 정도의 순수함만을 즐기고 싶다.


[정영동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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