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우리네 상실의 역사를 노래하다,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공연]

잘 짜인 극본의 힘,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리뷰
글 입력 2018.12.28 0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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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현대사는 비극의 연속이었다.


일제의 통치 아래 나라 잃은 백성의 삶은 처참했고, 그토록 바라던 광복 후에도 정치적 혼란 속에 무고한 희생자가 속출했으며, 이념이란 이름 하에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이 벌어졌고, 민주주의를 부르짖은 청춘들은 독재의 칼날에 스러졌다. 가깝게는 노란 리본으로 기억되는, 시간 속에 잠든 어린 영혼들까지. 그야말로 상실의 역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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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썬샤인의 전사들'은 작가 한승우의 소설 쓰기를 따라 약 70년에 걸친 한국 근현대사 속 개개인의 삶, 그 작은 조각들을 관객들에게 보여준다. 관객은 작가의 시선을 따라 여러 시기를 살다 간 다양한 인물들을 만나보게 된다. 그들은 역사라는 커다란 파도에 힘없이 휩쓸려버린 나약한 조개껍데기같다.


제주 출신 소년병 선호, 동굴 속에 영원히 잠들어버린 꼬마 해녀 명이, 한국 전쟁에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순이,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던 중공군 호룡, 만주 위안소에서 일하던 식모 막이, 문학을 사랑하던 의대생 시자, '뺀졸'을 외치는 교수이자 극작가 시춘, 윤동주의 시 '자화상'을 좋아하는 대학생 대길까지. 여러 인물들의 안타깝고 처참한 삶의 이야기들은 가장 먼저 등장하는 선호의 수첩을 따라 이어진다. 가장 극적인 상황에 처한,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찰나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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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놉시스


인기 소설가 한승우는 3년전 일어난 사고로 아내와 어린 딸을 잃고 슬픔에 빠져 절필한다. 그를 쫓아다니는 의문의 상자를 두드리는 소리, 그리고 꿈에 나타난 봄이의 부탁으로 어렵게 다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병 선호의 수첩이 흘러간 여정이 승우의 소설을 통해 펼쳐진다. 4.3사건으로 가족을 모두 잃고 카투사가 되어 한국전쟁에 참전 중인 선호, 제주도의 동굴 속에 잠든 꼬마해녀 명이, 나무상자에 갇혀버린 전쟁 고아 순이, 화가가 꿈이었던 조선족 중공군 호룡, 만주 위안소의 식모 막이, 시를 쓰는 의대생에서 인민군 군의관이 된 시자. 수첩의 여정이 끝에 다다르면서 승우는 또 한 명의 상자 속에 갇힌 이를 만나게 된다.



한승우는 딸 봄이를 잃고 상실감에 빠진 유명 소설가다. 좋아하던 만화 '썬샤인의 전사들'을 흉내내는 딸의 환영을 보며 괴로워하던 승우는 오랜 시간 묵혀왔던 소설을 써내려간다. 그의 소설 속 인물인 선호는 제주 4.3사건때 부모와 어린 여동생 명이를 잃고 남북전쟁에 참전한 소년병이다. 극장 한켠의 스크린을 이용해 당시 상황을 지도로 보여줘 관객의 이해를 도왔다. 선호와 명이가 동굴에 숨어있었다는 것은 4.3사건 당시 일부 도민이 일명 '다랑쉬굴'에 숨었던 것을 반영한 듯 했다. 이전에 글자로, 사진으로 알았던 역사 속 요소들이 눈 앞에서 생생히 펼쳐졌다.


연극은 승우의 현재 상황과 소설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실 극 초반에는 개별 인물들의 이야기들은 보는 내내 마음 아프지만, 기존에 다른 창작물들에서 접했던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느낌도 받았다. 연극 속에서 승우가 "이제 이런 이야기는 한 물 갔나?"하고 말한 것처럼 역사적 상황 속 개개인의 아픈 이야기는 자주 쓰이는 소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연극의 특별함은 이 긴 시기의 다양한 이야기를 극 전반에 걸쳐 긴밀히 엮어 놓은 스토리 구성에 있었다. 수첩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각 인물들의 이야기 사이의 긴밀성과 동떨어져 있는 것 같았던 소설가 한승우의 이야기가 연결되는 순간. 그리고 이 연결을 억지스럽지 않게 매꿔주는 내면적 성장의 서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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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을 나와 후기를 쓰기 위해 극을 되돌아보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이 작품이 몇가지 설정을 통해 단순한 '아픈 우리 역사극' 이상의 것을 꾀했다는 점이었다. 대학생 대길이 가장 좋아하는 시라며 윤동주의 '자화상'을 교수 시춘 앞에서 낭송하는 장면, 승우가 딸의 환영과 함께 하던 만화 '썬샤인의 전사들' 흉내 놀이에서 악당을 거울로 비춰 무찌른 자들이 괴물로 변해버리기 시작했다는 설정 등은 현재의 승우와 과거의 대길이 서로를 마주하는 마지막 장면과 연결되며 부끄러움을 인지하고, 자기 스스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 한 단계 더 성장하는 극복 과정을 그려내기 때문이다.


승우의 소설 속 각 인물들의 마지막은 비극적이라 현실적이다. 버젓이 존재하는 역사적 비극 앞에 힘없는 개인의 삶이 안타까운 결말을 맺는 것은 슬프지만 가장 만연할 것이다. 김은성 작가는 이에 억지스럽게 '기적'을 집어넣는 대신 승우라는 인물의 성장을 통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우리가 기나긴 상실의 과정을 겪은 후에도 계속 살아냈던 것처럼. 비록 두 뺨에 눈물 자욱이 남았지만 어쩐지 후련해진 마음으로 극장 밖을 걸어나왔다.






썬샤인의 전사들
-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레퍼토리 선정작 -


일자 : 2018.12.08(토) ~ 12.30(일)

시간
화-금 오후 7시 반
주말, 공휴일 오후 4시
월요일 공연 없음

장소 : CKL스테이지

티켓가격
전석 30,000원

주최/주관
달나라동백꽃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한국콘텐츠진흥원

관람연령
만 13세 이상

공연시간
155분 (인터미션 : 15분)



[박찬희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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