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지중해도, 사람 사는 곳이었네요

어딜가나 존재하는 만고불변의 진리
글 입력 2018.12.1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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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두 달의 유럽 여행 동안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역시 사람 사는 덴 다 똑같네’였습니다. 아직 유럽 여행을 못 간 사람에게는 환상 와르르맨션인 얘기겠지만, 사실이 그랬습니다.


도시마다 다른 풍경, 다른 사람들, 다른 문화가 있었고 그 하나 하나가 너무 아름답고 감탄스럽고 경이로웠지만 결국 만고불변의 진리가 있었습니다. 사람의 본성이라든가, 어딜 가나 돈이 최고라든가, 산도 바다도 이제 다 비슷해 보인다든가, 너무 유명한 맛집은 맛집이 아니다 같은 것들이요.



 

『지중해의 영감』



프랑스 에세이스트이자 철학자 장 그르니에도 비슷한 생각이었나 봅니다. 그는 에세이 『지중해의 영감』에서 지중해 국가를 여행하며 관광지의 다양한 풍경, 사람, 문화를 묘사하기보다 그것들을 접하며 느낀 자신의 철학을 그려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철학자인데…

 

그의 철학은 한번에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하루의 첫 새벽, 완벽히 홀로인 채 팔라티노 언덕의 부러져 누운 기둥들 사이를 거닐면서도 런던의 피카딜리 광장이나 대도시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서보다 더 많은 것들에 둘러싸여 있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 … 우리는 절대로 혼자일 수가 없다. 함께 있을 상대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로마보다 함께할 상대가 많고 다양한 곳은 없다.


- p.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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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다시 가고 싶은 나라를 고르라면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고를 것입니다. 스위스는 입이 벌어지는 자연환경 속에서 정말 여유롭게 힐링하고 싶어서이고, 이탈리아는 오래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움 가득한 발걸음을 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 친퀘테레 등 많은 도시를 방문했음에도 이탈리아는 왠지 더 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습니다.


특히 로마가 그랬습니다. 새파란 하늘 아래 명품 거리, 줄 서서 젤라또를 사는 관광객들, 온갖 상점, 그런데 조금만 눈을 돌리면 도시 가득 고대 문명의 기운이 넘쳐 흘렀습니다. 한낮에 땀을 뻘뻘 흘리며 ‘팔라티노 언덕의 부러져 누운 기둥’을 지날 땐 왠지 모르게 오싹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온갖 신전을 방문하며 느낀 묘한 중압감도 새롭게 다가왔습니다. 절대 외로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곳에 가서 살리라! 이것은 젊은이라면 누구나 갖는 첫 번째 욕망이다. 그렇다면 젊은이는 다른 곳으로 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행복해지고 사랑하기 위한 어떤 장소가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것일까? 그러나 그는 이런 질문을 해대는 사람들쯤은 우습게 여긴다. 젊음은 그 자체만으로 정당화되는 고유한 특권을 가지고 있다. 젊음은 젊음이 존재하기 때문에 믿고, 그래서 스스로 믿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 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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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해지고 사랑하기 위한 어떤 장소가 따로 있든 없든, 젊은이에게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입니다. 청춘은 청춘이기에 떠날 권리가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그 외에 이유는 필요 없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자유로울 때 해볼 수 있는 것은 다 해봐야 합니다. 조금만 나이가 들면 겁이 많아지고, 책임이 생기고, 떠날 수 없는 이유가 늘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영원히 살든, 잠깐만 살든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욕망을 마음껏 펼쳐도 괜찮은 청춘입니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해외에서 한 달 살아보기 도전이 유행한다고 합니다. 역시 장 그르니에 시절이나 지금 시절이나 사람의 기본적인 욕망은 변하지 않네요.



 

그러나 그리스에 대하여 말하려고 하면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없다. 어떤 사람을 사랑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가 없게 되고, 그의 이미지가 마음속에서 커지면서 눈앞에서는 지워져버리듯 그 이미지들이 어떤 감정으로 대치된다. 헐벗은 풍경들, 돌투성이의 언덕들, 장난감처럼 연약한 신전들. 커다란 고통들 같은 극도의 단순화. 나 자신과 인간의 우연한 일치.


- p.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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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다녀온 후 어떤 장소, 혹은 어떤 물체를 구체적으로 묘사해보라고 하면 정확히 묘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형태는 머릿속에 어렴풋이만 남아있고 그것을 봤을 때의 감정만 생생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스핑크스를 봤을 때의 감동, 친퀘테레 풍경을 봤을 때의 감탄, 피에타를 봤을 때의 경외와 같은 감정은 생생히 살아있지만 스핑크스, 친퀘테레, 피에타가 어땠냐고 물어보면 “좋았어”, “쩔었지”라고 밖에 대답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라고 할까요.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을 떠올리면 생김새, 성격, 행동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곧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이 모든 것을 덮어버립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마음이 주체할 수 없이 커져 해일처럼 밀려옵니다. 이성적인 생각을 못하게 되어버리죠. 사랑이 눈을 멀게 만든다는 말처럼요.


 

 

매 순간 나는 누군가 내 소매를 끌어당기며 “이건 양립할 수 없는 거야”라고 말하는 느낌을 받는다. 천만에, 그건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보라. 산들이 평평하게 내려다보이면서 계곡들과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되리라.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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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그르니에는 어쩌면 지중해를 여행하며 무력감을 느꼈거나 해탈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어느 한 쪽에 쏠리기보다 복합적인 성질 그대로를 받아들이려고 하죠. 사실 완벽히 어느 한 쪽에 속한 것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요? 최소한 사람은 완벽히 어느 한 쪽에 속한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을 좋아하면서 다른 사람을 좋아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겐 한없이 착한 사람이지만 다른 사람에겐 한없이 잔인한 사람일 수도 있고, 모든 것이 한 사람 안에서 양립할 수 있습니다. 그르니에는 그 가능성을 받아들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대는 그냥 놀란 것 이상으로 그야말로 정신이 확 나가버린 듯한 적이 한 번도 없었나?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이 나가버린 경험이? 처음엔 그대에게 어떤 취기였던 것이, 그대가 정신을 차리고 그것을 또렷하게 알아차리려고 하자, 엄청난 고통으로 변하지 않던가? 그대는 멈출 수가 없는 거야. 언제나 새로운 그 무엇이, 언제나 그것에 대립하는 그 무엇이 나타난다. 새로운 것들에서 모순되는 것들로 옮겨 다니는 동안 그대는 그만 용기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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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 코르넬리우스는 장 그르니에에게 반대 입장을 표명합니다. 그렇게 모든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권리포기 쪽으로 도망가는’ 행위를 ‘무기력하다고 비난’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계속되는 선택의 순간이 고통스러워 도망가버리고 마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죠.

 

사실 선택의 고통은 살면서 누구나 겪어봤을 고통입니다. 오죽하면 ‘선택장애’라는 말이 있겠습니까. 이 증상이 심한 사람들은 점심 메뉴조차도 혼자서 고르지 못해 다른 사람에게 선택권을 양도해버리고 맙니다. 이런 일상적인 경우는 양반입니다. 판사는 어떤 한 사람의 인생을, 혹은 국가의 운명을 선택해야 하죠. 그런 일을 직업으로 하고 있으니 얼마나 스트레스가 심할까요. 하지만 선택은 해야 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 그르니에의 초탈한 심정은 선택해야만 하는 용기를 잃어버린 것이라고 비판받을 수도 있겠네요.

 

*


『지중해의 영감』은 이렇듯 여행에세이보다 철학에세이에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유럽 여행을 추억하며 가볍게 읽으려다 식겁하고 말았지만, 딱딱한 문체와 의식의 흐름 기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에도 불구하고 흡입력 있어 생각보다 금방 읽을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부분에선 갸웃하기도 했지만 많은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작가인 장 그르니에의 제자이자 유명한 작가인 알베르 카뮈나 장 그르니에를 선호하신다면, 그리고 여행을 통한 철학적 사고를 하고 싶다면 읽어볼 만한 에세이인 듯 합니다.





[김다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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