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지금, 충분히 무용해지세요. [문화 전반]

빛이 시선을 잡아채는 계절속에서
글 입력 2018.10.04 0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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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충분히 무용해지세요.
- 빛이 시선을 잡아채는 계절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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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정하

해마다 피는 꽃이라도 
같은 모습이 아니다
그 꽃을 바라보는 나도 같지 않다

모든 것은 흐르고 변한다
한번 지나가면 그뿐 흐르고 흘러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는 것은 없다
지금 이 순간, 지금 이 자리로
돌아올 길은 영영 없다

그러니 어찌 소중하지 않으랴
어찌 간절하지 않으랴
지금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들
내 눈빛에 담긴 모든 것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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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다. 빛이 부신 계절이다. 지독하게 더웠던 여름에 대한 보상일까? 올해는 봄도 가을도 꽤 긴 것 같다. 요즘 하늘이 참 예쁘다. 길을 거닐기만 해도 아름다운 가을빛이 여기저기에 퍼져있다. 요즘 매일 해가 살짝 기울어질 때쯤 산책을 하는데, 그때마다 기울어져가는 가을 빛에 발걸음을 멈춘다. 빛이 시선을 잡아채는 계절이다.

가을빛은 주황빛을 닮았다
물들어가는 단풍과 그와 만나 부서지는 저녁놀의 빛깔을 닮았다.

오랜만에 텅 비어 한산한 캠퍼스를 걸으며, 내가 사랑하는 가을 사양을 맞으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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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채우는 무용한 것들을
나를 채우는 익숙함을
나를 채우는 모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한다.


참으로 지독하게도 무더운 여름이었다. 전쟁같이 치열했고 처절했다. 살아남으려고 악을 쓰고, 발악했다. 그리고 천천히 비워냈다. 대부분의 무용한 것들은 그 순간 자체가 아름답기에 존재한다. 무더운 여름이 끝난 뒤 선물처럼 찾아온 이 가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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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의미에서 ‘지금’을 느끼는 건 중요한 일이다. ‘지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 순간의 풍경도, 그 순간의 감정도, 그 순간의 나 역시도 한번뿐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쓰는 모든 글들은 ‘나의 지금’을 표현하고 수놓는 나만의 일기장이었다. 내가 쓰는 모든 글에서 가장 주안점을 뒀던 것, 살아있는 생생한 ‘지금’을 묘사하는 일이었다. 죽은 글을 쓰지 않는 것, 살아 움직이는 글을 쓰는 일. 그것이 내가 글을 쓰면서 나도 모르게 추구했던 글의 이유였다.

살아있는 글에 대한 정의는 다양할 것이다. 나에게 살아있는 글은 ‘지금’이라는 순간을 잡아채는 수단, ‘지금’을 나와 연결시키는 도구였다. 한 마디로 글을 쓰는 행위는 현재의 나를 지그시 반영하는 일인 셈이다. 우리의 일상과 떨어져 혼자 뜬구름 잡듯이 존재하는 글들은 죽은 글이다. 글은 누군가 공감할 수 있을 때에만 빛을 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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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상 모든 이들의 입맛을 맞추기란 불가능하다. 나의 글들이 나를 지극히 반영하는 이유는 여기에서 시작한다. 세상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순 없어도, 적어도 그 글을 써 내려가는 그 시점의 나는 지극히 반영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순간과 시점에서 글을 쓰는 나는 오롯이 그 글에 가장 적합한 독자가 될 터이고. 글의 장르와 주제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최대한 많은 글들이 우리네 삶과 연결되어 지상에 발 붙이고 존재하길 바란다. 허공을 향해 날아가버리는 활자들이 조용히 날개를 접고 내 삶에 안착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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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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