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술 권하는 사회 [문화 전반]

주류(酒流)문화가 주류(主流)문화인 세상
글 입력 2018.06.22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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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자리에 좀 더 있다 가라고 할 때, 나는 가장 단호해진다. 대부분 1차에서 끝이다. 정말 기분이 좋거나 술이 단(?) 날에도 2차가 마지노선이다. (주량을 밝히자면 소맥은 5잔, 소주는 1병 정도다.) 무슨 종교적인 신념이 있어서는 아니다. 그냥 술이 몸에 안 받는다. 조금이라도 과음한 날에는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아파 잠을 잘 수가 없다. 뜬 눈으로 밤새 침대에서 뒤척이다 아침 해가 뜰 때쯤 졸음이 쏟아진다. 그런 밤을 보낼 때마다 다짐한다. '다음엔 더 일찍 빠져나와야지.'

술을 더 마셔야 할 이유는 많다. 오랜만에 만나서. 좋은 날이니까. 슬픈 일이 있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술이 정신력이라고 한다. 마시면 느는 것이라고도 한다. 대학교 신입생 때 선배들은 "내가 네 주량 늘려준다."고 패기있게 말하기도 했다. 주량이 는 게 아니라 몸이 안 좋아진 것이라는 것을 2년이 지나고, 피부염을 얻고 나서야 깨달았다.

술이 정신력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김보통의 <어른이 된다는 서글픈 일>의 한 대목을 소개한다.

"김보통(이하 김) : 너는 수영할 수 있어?
동료 : 아니 못하는데?
김 : 수영도 정신력으로 해보지 그래?
동료 : 무슨 소리야 그걸 어떻게 정신력으로 해?
김 : 내겐 술이 그래. 정신력의 문제가 아니야."

'정신일도 하사불성', '일체유심조' 등등 정신을 집중하면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다는 격언들을 싫어한다. 의지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 있다. 내겐 술이 그렇다.

아버지께서는 "성공할라카면 술을 잘 무야 돼.", "높은 사람들 중에 술 못 먹는 사람 없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어릴 때부터 들었기에 그런 줄 알고 살았다. 머리가 굵고 나니 이제는 의문이 든다. 술 못 먹는 사람들은 성공할 수 없는걸까. 왜 높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술을 잘 마시는걸까.

씁쓸한 것은 그런 아버지께서도 술을 잘 못하신다는 것이고,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이 맞다면 아버지는 성공하지 못한 사람일까. 또 나는 성공할 수 없고, 높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일까. 아직 덜 살아서 알 수 없다. 높은 사람이라는 말 자체가 불편한 청년으로 자랐을 뿐이다. 다만 그런 사회적 시선이 있기에 가장 재미있게 젊을을 즐겨야 할 많은 청년들이 '할 거 없으니 술이나 마시자'고 하지 않을까. 술을 못하는 친구는 어쩔 수 없이 '아싸'(아웃사이더)가 되는 '술 권하는 사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내가 팀장으로 있는 취미 공유 집단 NERD를 소개하는 글에 이렇게 썼다.

"NERD는 마니아, 오타쿠 등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로, 한 가지에 깊이 빠져 몰두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하위문화 형성의 주체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들을 지칭할 만한 단어가 없습니다. 하위문화 자체에 무관심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처럼 음지에 가려진 하위문화들을 양지로 끌어올리는 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과 교류하며 다양한 '취미 문화'의 형성에 기여하고자 합니다."

술을 무작정 멀리하자는 것이 아니다. 주류(酒流)문화가 주류(主流)문화인 세상에서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내가 술보다는 커피를, 커피보다는 달달한 스무디를 좋아하는 것처럼. 이렇게 각자가 좋아하는 것을 문화로 인정하고 그 취미를 존중하는 사회를 바란다. 그렇게 살려고 노력한다.

할아버지도, 아버지도 술을 못하셨고 나도 못한다. 내 아들, 내 자식들도 술을 못 할 확률이 매우 높다. 부디 그 세대는 술자리에서 술 못 마신다고 하면 분위기 깨는 사회가 아니길. "할 것도 없는데 술이나 마시자."는 세상에서 살지 않기를 바란다.


[백광열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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