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봄날은 간다' [영화]

글 입력 2018.05.10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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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이 모두 졌다. 옅은 분홍빛으로 가지마다 화려하게 피어났던 꽃은 이제 없다. 꽃이 진 자리에는 옅은 초록빛 잎새가 돋아나고 있다. 어떤 가지는 봄이 끝남을 알지 못하고 아슬아슬하게 여전히 벚꽃잎이 붙어있기도 하다. 벚나무는 꽃이 피어났던 가장 아름다웠던 순간을 뒤로하고 초록빛으로, 어떤 곳은 아직도 분홍빛으로 뒤섞여있다. 아련하게 가지에 붙어있는 몇 개의 벚꽃잎은 벚나무가 여전히 찬란했던 봄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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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 (2001)


겨울의 끝자락에 상우는 은수를 만난다. 두 사람은 소리를 녹음하기 위해 대숲으로, 눈 내리는 암자로 함께 돌아다닌다. 창밖에 비 오는 소리를 듣자 은수는 상우 생각이 나서 상우에게로 전화를 건다. 상우는 은수의 전화를 받고 밤잠 설치며 설레한다. "라면 먹고 갈래요?" 은수는 자신의 집 앞에서 상우를 붙든다. 상우와 은수는 이제 더는 '상우', '은수'라는 각각 다른 사람이 아닌 '상우와 은수', 서로가 된다. 두 사람 사이로 따스한 봄 햇살이 비치고, 꽃이 피어난다. 봄이 찾아온 것이다.

상우는 봄기운에 잔뜩 취해있다. 그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햇살 비추는 거리를 걸으며 콧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그를 취하게 만든 '봄'은 바로 은수다. 내 삶에 특별한 사람이 생기면 모든 것이 달라 보인다. 매일 지나다니던 익숙한 길도, 매일 보던 사람도, 지루한 일상도 모든 것이 변한다. 평범한 가로수에서 아름다운 색감을 발견하고, 하늘이 유난히도 푸르게 보인다. 날이 좋은 날에 비추는 햇빛은 그토록 아름다울 수 없고, 비 오는 날의 빗소리 역시 다정하고 포근하게 들린다. 모든 순간이 두근거리는 봄날의 한 장면이 된다. 실제로 같이 있지 않아도 모든 곳에 나만의 특별한 그 사람이 같이 있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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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반드시 봄은 가고 많은 것들이 변한다.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고 되물어도 이미 변해버린 봄은 답이 없다. 영화 속 은수가 상우에게 점점 익숙해지고 질려갈 때, 상우의 봄은 예고도 없이 사라진다. 어제 보았던 햇빛 아래서 반짝이던 벚꽃은 하루아침에 제모습을 잃고 꽃잎을 하나둘 떨어진다. 은수는 조금씩 거리를 두고 상우에게서 멀어져 간다. 그러나 상우는 아직 봄날과 이별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용기를 내서 전화를 걸어보지만 은수는 상우를 매몰차게 밀어낸다. 상우는 갑자기 떠난 봄에 적응하지 못하고 봄도 여름도 아닌 애매한 어떤 사이에서 방황한다.

상우를 잔뜩 물들였던 '은수'라는 봄기운을 떨쳐내보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창밖으로 내리는 비는 은수가 상우를 떠올리며 전화를 했던 어느 비 오는 날이 되어 다시 돌아온다. 한때 은수를 떠올리게 해줘서 좋았던 일상 속에 모든 것들이 이제는 은수를 떠올리게 하기 때문에 고통스럽다. '잊어야지, 잊어야지.'하면서도 상우는 아름다웠던 봄날은 떠올리며 은수 곁을 맵돈다. 그러나 은수는 여전히 자신이 남긴 봄의 흔적에 슬퍼하고 있는 상우와 다르다. 은수는 상우와의 봄을 지나 다른 사람과 더 빛나는 여름을 준비하고 있다. 상우는 그런 은수가 밉다. 자신을 봄의 끝자락에 두고 혼자만 여름으로 떠나버린 그녀가 정말 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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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름다운 순간은 영원하지 않을까? 항상 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에 있을 수는 없는걸까? 흔히들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말할 때 비유적으로 '봄'이라는 계절을 많이 사용한다. 춥고 삭막한 겨울을 지나 맞이하는 따스한 봄은 다른 어떤 계절보다 아름답다. 무채색으로 물들어있던 도시를 부드러운 색감으로 물들이는 봄은 유난히도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하지만 봄은 잔인하게도 한참 자신에게 취해있을 때 갑자기 떠나간다. 사람들은 봄을 느낄 새도 없이 얼떨떨하게 여름을 맞이한다.

몇 월 며칠에 떠나겠다는 확실한 날짜도 말해주지 않은 채 꽃잎은 떨어지고 우리 곁에서 봄은 달아난다. 벚꽃은 지고 반드시 여름은 온다. 내 곁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 역시 봄이 떠나가듯 예고도 없이 어느 날 떠나갈 것이다. 사실 모두 알고 있다. 봄 다음에는 여름, 그리고 만남 다음에는 이별이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알고 있다고 해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건 아니다. 나에게 봄을 선물해줬던 사람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한구석이 저리다. 그들과 함께 했던 순간순간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봄날이었기 때문에 더 서글프다. 하지만 우리는 봄 때문에 울었지만 상처받은 자리에 서서 또 다음 봄을 기다린다.




눈을 감으면 문득 그리운 날의 기억
아직까지도 마음이 저려오는 건

그건 아마 사람도 피고 지는 꽃처럼
아름다워서 슬프기 때문일 거야 아마도

봄날은 가네 무심히도 꽃잎은 지네 바람에
머물 수 없던 아름다운 사람들

봄날은 간다, 김윤아 中



[김하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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