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반항, 채식주의자 [문학]

글 입력 2018.01.08 00:41
댓글 0
  • 카카오 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 밴드로 보내기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 플러스로 보내기
  • 글 스크랩
  • 글 내용 글자 크게
  • 글 내용 글자 작게


13.jpg
 

[Opinion]
처절하지만 아름다운 반항
채식주의자


1. 사회적 맥락에서 읽는 <채식주의자>

 필자한테 <채식주의자>는 단조로운 문체에서 느껴지는 기괴한 내용도 충격보다도, 그 메시지 자체와 다양한 해석으로 특별했던 소설이었다. 필자한테 소설이 안겨준 복잡성과 충격은 일상을 뒤흔들었다. 그 충격은 오래 남아, 친한 사람들과 함께 한 독서토론이 끝나고 나서도 일주일간 침대에 멍하니 누워서 소설의 주인공 영혜를 생각했었다. 이해를 위해 본격적인 감상에 앞서 책의 내용을 간략히 설명하려 한다.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으로 이뤄진 연작소설이다. 각 단편 소설의 화자는 영혜의 남편, 형부, 언니 세 사람이 맡는다. 이들은 다양한 관점에서 여주인공 영혜를 평가하고 이해한다. 줄거리를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아래와 같다. 특별한 점 하나 없는 평범한 아내, 영혜는 어느 날 동물의 살점을 물어뜯는 꿈을 꾼다. 그 꿈을 꾸고 그는 집에 있는 고기를 모두 버리고 '채식주의자'가 된다.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입을 억지로 벌려 폭력적으로 고기를 쑤셔 넣는 등 그녀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그녀에게 몽고반점이 있다는 사실을 들은 예술가이자 중년의 형부는 예술을 이유로 그녀와 몸을 섞길 바란다.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형부와 몸을 섞고 동생에게 그것을 들킨다. 그 이후로 영혜는 더욱 무언가를 향해 내달린다. 영혜는 고기만이 아니라 다른 식단도 거부하고 나무가 되길 꿈꾼다. 햇빛을 맞으며 나무처럼 꼿꼿이 서있는 장면이 이 소설의 마지막이다.

 <채식주의자>는 '개인'의 영역이 아닌 '사회'의 영역으로 읽혔다. 필자가 충격을 받았던 것도 그런 사회학적 시점의 한계에 있었다. 필자를 제외한 패널들은 모두 '사회'가 아닌 한 개인의 탄생으로 읽어냈다. 그 사실이 충격적이었던 이유는, 평가당하는 영혜를 안타깝게 느끼고 영혜의 주변 사람들을 미워했던 필자조차도 '감상'이라는 이유로 영혜를 둘러싼 수많은 서술자들처럼 그녀를 제멋대로 평가하고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비도덕적인 것도 아니고, 이성적인 독자로서 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런 관점에 파묻힌 나머지 작품의 또 다른 맛을 느끼지 못했다. 필자의 생각은 '영혜'라는 인물을 한 '인간'이 아닌 비유로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이야기 속에서 모든 인물은 비유될 수 있고, 그 경계는 얼마든지 넘나들 수 있지만 인간과 비유는 분명히 다르다. 한 인물을 인간으로서 이해하면 그 역사와 감정은 독자와 거리를 좁히고, 그 삶에 대해 깨달음을 얻는다. 비유로서의 이해되는 인물은 다르다. 그런 사고방식은 그 인물 자체가 아닌 구조를 생각하게 한다. 예술작품을 향유하는 방법은 다양하고, 필자가 읽은 '사회학적 맥락'에서의 <채식주의자>다. 훌륭한 예술작품은 수많은 물음과 관점을 낳는다. 영혜라는 인물을 마음대로 평가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들었을 정도로 작품은 독자를 휘어잡는다. 수많은 불완전한 해석의 조각들은 모순되어 보이지만 끌어모은 순간부터 한 방향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법이다. <채식주의자>는 그런 소설이고, 그래서 훌륭하다. 필자는 그 불완전한 해석의 하나로서, 육식문화로 대표되는 사회의 압력과 그에 맞서는 처절한 개인인 영혜를 소개하고 싶다.



2. 육식문화에 물든 몸, 타인에 의해 규정된 여성의 몸


 권력은 개인을 지배하고 능가한다. 개인의 경험과 행위 양식을 생산하고 통제하기에 개인은 권력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권력은 제도와 기술적 양식을 통해 개개인의 몸에 새겨진다. 이런 관점에서 영혜의 기이한 행동은 새롭게 해석될 수 있다. 영혜는 몸에 새겨진, 하지만 자신이 새겨내지 않은 육식의 언어를 인식한다. 그녀는 사회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광기와 폭력으로 얼룩진 타자화된 자신의 몸을 견딜 수 없었고, 주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채식을 시작한다. 영혜는 고기를 먹지 않고, 고기냄새가 나는 남편과도 더이상 잠자리를 하지 않는다. 남편을 위해 고기를 맛있게 요리해 대접해야 하는 사회에서 영혜는 낯설고 혐오스러운 존재다. 그녀가 가족들에 의해 강제로 고기를 먹게 된 것도 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인정되고 있던 육식의 원칙을 그녀가 거부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부르짖는다. "네 꼴을 봐라, 지금 네가 고기를 안 먹으면, 세상 사람들이 널 죄다 잡아먹는다." 어머니의 안타까운 외침은 공동체를 벗어난 이들에게 어떤 무자비한 폭력이 가해지는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걱정처럼 보이지만, 또 다른 방법의 억압이었다. 영혜의 언니가 ‘성실’하다. '성실하다'라는 말은 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맞춘 사람에게 씌워진 월계관과 같다. 반대로 그 말에서 우리는 권력의 언어가 얼마나 은밀히 새겨져 있는지도 깨달을 수 있다. 남성- 여성, 인간 - 자연, 강자 - 약자. 우리는 우리의 몸을 둘러싼 일상적인 분류와, 극단적인 이분화로 발생하는 갈등과 권력에 익숙하다. 그런 의미에서 영혜는 자연스럽게 '고기를 뜯어 먹는 자신'의 몸이 경멸스럽다고 느낀다. 그녀는 채식이라는 행위를 통해 남성중심주의라는 권력의 언어에서 탈출을 시도한 것이다.
​ 만약 영혜가 채식을 하는 데서만 끝났다면, <채식주의자>에서 필자는 책의 내용이 자연과 여성을 엮어 남성성에 대항한다는 에코페미니즘이라는 주제 외에는 잡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특이한 여성에게 끌려 욕망을 품는 남자들의 이야기나, 식물에서 여성을 발견하고 육식문화에 반항하는 이야기는 낯설지 않다. 종반부에 이르기 전까지 필자는 채식주의자라는 책의 이름과 초반부 드러나는 영혜의 행동을 통해 작가가 구시대의 에코페미니즘을 표현한다고만 생각했다. 책을 넘기면서 이상한 거북함에 시달렸던 것을 기억한다. 영혜는 육식을 거부하고, 젖가슴을 드러내고, 식물이 되려 한다. 그녀의 행동은 남성적 질서를 넘어선 저항과 여성적 에너지를 내포하고 있는 것 처럼 보였다. 기존 에코페미니즘에 많은 불만을 품은 필자로서는 그런 전개가 유쾌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영혜와 엮인 남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불만과 의문은 커져만 갔다. 남녀차별의 세계에서 영혜라는 여성은 일탈적 존재, 자연의 신비로운 존재로서만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여성을 억압하는 두 남자와 그것을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 여성의 존재는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모습이 아닌가? 돌봄과 모성애와 같이 여성의 생식능력에 기반을 둔 여성성이 남성성과 함께 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가? 그것은 남성중심주의의 또다른 지배가 아닌가? 하지만 '채식주의자'가 '고기를 먹지 않는 영혜'를 이해하기 위한 다수의 낙인이었던 것 처럼 필자의 생각도 낙인이었다. 소설의 마지막 파트, <나무불꽃>에서 내용과 메시지는 말 그대로 불을 내뿜는다. 영혜의 언니가 등장하면서 소설은 한 발자국 더 나아간다.


3. 주체성과 창조성의 회복, 그 처절하고 아름다운 반항과 실존

 영혜는 육식을 거부해 폭력을 당해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으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녀는 채식을 넘어서 음식을 섭취하지 않는다. 물구나무를 서서 나무가 되려 하면서 그녀는 이분화라는 한계에 고착되어있던 에코페미니즘을 넘어섰다. 그녀는 그녀의 몸으로써 육식과 채식이라는 원리를 넘은 새로운 원리의 질서를 세우려 했다. 채식이 육식-채식, 남성-여성으로 대표되는 권력의 언어를 넘어서기 위한 노력이었다면, 나무되기는 인간과 자연과 같이 더 큰 세계를 통합하기 위한 노력과 같다. 따라서 더 이상 나무가 된 그녀 앞에 단일한 분류체계인 남성-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 사회에 뿌리 깊게 존재하는 종속과 지배, 차별과 소외가 존재할 뿐이다. 나무가 되길 바라는 그녀는 단순히 권력의 희생자가 아니다. 이제 그녀는 그런 세계에 대한 새로운 조화로서 햇빛과 물을 섭취하는 나무가 되려 한다. 그녀는 마침내 억압되어 있던 여성성의 회복과 권력의 언어들을 넘어 자신의 주체성 회복을 꿈꾸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병원에서 양 손을 뻗고 햇빛을 맞을 뿐이다. 영혜는 변했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다. 영혜를 돌보면서 영혜가 꾸었던 꿈을 천천히 이해해가는 영혜의 언니는 고통을 느낀다. 성실하게 적응하면서 살아온 그녀의 눈으로 영혜는 세상에 버림받고 상처받은 안타까운 존재다. 하지만 그녀는 초록색으로 불타오르는 나무를 보고 자신의 삶을 조금씩 인식하기 시작한다. 영혜의 언니는 '성실한' 현실주의자다. 사회에서 그녀의 성실함은 구조에 따라준 포상이었지만, 그것은 사실 개인적 삶에서 가질 수 있는 열정과 활기다. 영혜와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행동이 비일상적이고 고통스러웠던 것과 다르게, 그녀가 영혜를 생각하는 마음은 특유의 성실함과 다정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녀는 <채식주의자>에서 가장 독자와 거리가 가깝다. 영혜는 물론이고 채식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아내를 잔인하게 대했던 남편이나,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금기를 깨뜨리려 했던 그녀의 남편을 생각해봤을 때, 그녀는 우리와 가장 닮았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영혜를 감싸 안는다. 꼿꼿이 서 있는 영혜를 이해하고, 영혜로 인해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작가가 독자를 영혜의 언니의 위치에 서기 쉽도록 의도적으로 설계했다면, 작가는 영혜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독자가 그녀와 같은 길을 걸어보길 기대했던 것이 아닐까.

*

 처음 태어난 아이가 크게 우는 것 처럼, 출생은 가장 벅찬 순간인 동시에 불안의 시작이다. 갑자기 사회에 내동댕이 쳐진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확실한 끝 말고는 보장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 삶에서 가장 열광하고 집착하는 것은 닿을듯 말 듯한 주체성과 자유뿐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규정될 수도 없을뿐더러, 수많은 권력관계에 의해 위협받기도 한다. 영혜의 고통스러운 몸부림은 그런 사실을 한번 더 깨닫게 한다. 그 참혹한 장면은 고통스럽지만, 그 행동의 기반이 되는 끝없는 열정은 인간의 한계와 죽음이라는 결과보다 더 크고 역동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은 아름답게 느껴진다. 감기에 걸린 몸이 몸을 덮는 죽과 이불의 가치를 잘 아는 것처럼, 필자한테는 소설도 그랬다. 아까 필자는 이 책을 가장 좋아하는 부분에 책갈피를 끼워, 서재 안쪽에 넣었다. 한번 더 책을 끼워 넣으면서 중얼거리되, 정말 <채식주의자>는 열병 같은 소설이었다.




1511616985004.jpg
 

[손진주 에디터]



<저작권자 ⓒ아트인사이트 & www.artinsight.co.kr 무단전재-재배포금지.>
 
 
 
 
 
등록번호/등록일: 경기, 아52475 / 2020.02.10   |   창간일: 2013.11.20   |   E-Mail: artinsight@naver.com
발행인/편집인/청소년보호책임자: 박형주   |   최종편집: 2024.03.27
발행소 정보: 경기도 부천시 중동로 327 238동 / Tel: 0507-1304-8223
Copyright ⓒ 2013-2024 artinsight.co.kr All Rights Reserved
아트인사이트의 모든 콘텐츠(기사)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습니다. 무단 전제·복사·배포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