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현대시 미학

글 입력 2016.12.27 0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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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어려워요.'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난해하네요.'
'어떤 분위기인지는 느껴지는데 주제가 감이 안 잡혀요'
'너무 자기중심적이네요'
...


  중고등학교 교육과정에서만 시를 접해 '시'에 대한 시대착오적인 환상을 갖고 있는 자라면 아마 오늘 날의 '시'에 대한 실망과 환멸이 클 것이다. 현대시의 경향을 보면,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기엔 다소 무리있는 작품들이 많은데, 내용면에서도, 형식면에서도 통속성, 보편성과는 거리가 있다. 주제가 일관되지도 않고 보기에 편한 얘기거리를 다루지도 않으며 시적 화자도 단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데다 정서도 다층적으로 꼬여있다. 여러모로 현대시는 '불편한 텍스트'다. 전통적으로 '시'라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떠올리는 순수성과 서정성의 이미지와는 상당히 상이한 성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시에 대해 지속적인 관심이 가졌던 사람들이라면 이런 현대시의 기괴함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이미 낡은 시적 장치이고 관행이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현대시는 '읽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는 것'에 가깝다. 의미와 작품 사이의 연관성이 너무나도 비약적이거나 혹은 아예 부재하기 때문에 현대시를 접하는 데에 있어서 작가의 의도를 꼼꼼하게 읽고 보편적인 의미를 유도하려 해석하려 한다면, 그것만큼 공허한 작업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시를 읽을 때, 무엇을 상기하며 무엇을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할까?




1. 그로테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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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괴함과 우스꽝스러움이 공존하는 미학인 ‘그로테스크 미학’은 이미 20세기 때,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예술 작품과 무대에서 충분히 정점을 찍고 역할을 다했던 묵은 개념이다. 그러나 한국 현대 시단에서 활약 중인 젊은 시인들에게 그로테스크한 미학의 효과는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소통과 공감의 스토리보다 자폐적이고 불통하는 이미지를 추구하는 요즘의 젊은 시인들은 의도적으로 현실을 비틀어 기괴하고 상식을 깨는 연출을 하는 데에 익숙하다.

  환상과 실재를 넘나들면서 충돌하는 이미지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편함과 당혹, 공포감을 느끼도록 하는데, 그러한 ‘기괴함의 자유로운 방목’이 가능한 이유는 그것이 환상성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환상의 세계는 그것이 현실에 기반을 한 것이든, 비실재적인 것들을 기반으로 한 것이든, 온갖 상상을 가능케 한다. 자연을 과장하고 왜곡하며, 아름다움의 상식에 반하는 끔찍하고 추한 형상들을 구현할 수 있다.

  그러나 그로테스크 미학을 성공적으로 선보이기 위해서는 기이함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눈을 찌푸리게 만드는 충격, 충격에서 오는 불편함 이후에, 어떤 헛헛한 웃음과 흥분, 의미심장한 매혹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의 젊은 시인들은 이러한 이질적이고 복합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미학으로 무장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그로테스크’는 21세기적 관점으로 봤을 때 완전히 새롭다고 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며, 이미 내성이 생긴 독자들에게 지지부진하게 반감된 절름발이 충격을 줄 것이 아니라면, 시인들은 이를 넘어서는 새로운 성취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2. 멜랑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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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주의 시대에 있어 ‘멜랑꼴리’는 이상향에 대한 동경, 예술적 광기 정도로 묘사되어 비교적 안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심미적 관념이었지만, 보들레르의 시 세계가 열리면서부터는 ‘대도시(파리)’와의 관련선상에 놓이며 현대적 의미를 갖게 되었다. 벤야민은 보들레르가 그린 여자와 죽음의 이미지들, 파리의 형상 속에서 일상과 예술의 경계가 무너진 현대적 의미의 ‘멜랑꼴리’를 발견했고, 21세기를 ‘상실해버린 기의의 흔적으로 떠도는 텅 빈 기표의 세계’라고 설명했다. 즉, 오늘날의 ‘멜랑꼴리’는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있는 역사적 징후인 것이다.

  대도시는 전통적인 삶이 탈각된 개인적 삶의 공간(긍정)이자 동시에, 개인을 익명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공간(부정)이라는 양가성을 지니고 있다. 시인은 그 분열된 상으로부터 ‘고통’을 느끼며 특유의 비관주의에 빠지게 된다. 근대성의 상징인 도시를 폐허로 만듦으로써 이성과 진보의 신화를 한낱 추문으로 그리는 것이다. 모든 아름다움으로 승화된 상징적 조화들은 산산이 부서져 파편화되고, 예술작품(형상)과 관념(의미) 사이의 연관성은 상실된다. 해체된 맥락 속에서 대상들은 전혀 ‘다른 것’이 되며 이러한 알레고리는 결국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는 공허한 기호의 확장’으로 현상(現像)된다. 그러나 멜랑꼴리는 바로 그러한 ‘공허’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이며 역설적이게도 그 덧없음의 알레고리에 영원성을 부여하는 구원자적 태도를 갖는다. 역사가 진보를 외치며 폭풍을 일으킬 때, 멜랑꼴리는 무조건적으로 현재를 긍정하지 않고 그 아래에 깔려 파국이 된 잔재를 함께 주시하는 것이다. 보들레르의 시는 바로 그런 현대적인 삶이 짧은 황홀과 긴 나락의 패배감으로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애도’라는 개념과 견주어 봤을 때, ‘애도’는 대상의 부재와 대상에 부과한 리비도를 철회해야하는 것을 수용하는 반응이라면, ‘멜랑꼴리’는 대상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대상 상실이 자아 상실로 이어지는 상태를 말한다. 이에 관하여 ‘상실’이냐 ‘결여’냐의 논쟁이 있지만 어쨌든 시인은 대상의 부재에 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우울한 존재라는 관념은 여전히 유효하다.





  2000년대 시, 소위 말해 미래파라 불리는 시인들의 작품은 ‘시인(1인칭)의 내면 고백으로서의 시’라는 고정적인 통념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소통불능의 자폐적이고 이기적인 문학이라는 신랄한 비난을 받을 정도로 낯선 감각과 새로운 어법을 사용한다. 그 기저에는 ‘시와 정치’라는 관계 속에서 무의식적 미학 혁신을 작동시키는 정치적 조건이 자리하고 있다고 한다.

  원래부터 불완전했던 민주주의가 더 후퇴하기 시작하면서 ‘나’라는 존재들은 현실 정치에 대한 환멸과 무력감, 권태를 느낀다. 민주주의를 통해 기대했던 것과 한국 민주주의가 실제로 가져온 결과 사이의 격차가 실망과 냉담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정치적 상황에서 ‘나’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는 힘을 잃고, 다양한 양태의 존재들이 품은 좌절과 분노가 3인칭의 형상으로 시 속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난다.

  일상, 개인, 욕망, 몸, 탈중심, 여성 등과 같은 미시 담론의 가치들이 대두되고 새로운 감각과 시각적인 효과가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다. 과거엔 금기시 됐던 동성애 코드나 파격적인 수위의 에로티시즘, 엽기적인 하위 문화 등이 다 포함된다. 스토리보다는 캐릭터가 강조되고, 의미보다는 날조된 이미지를 제시하며 젊은 시인들은 환상성과 탈주체, 혼종과 다변성, 다성성의 언어를 해체적인 문법을 통해 구사하고 있다. 여성시 역시 그저 남성 중심의 지배질서에 저항하는 것에 멈추지 않고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는 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김해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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