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 insight

아트인사이트에게
문화예술은 '소통'입니다.

 

 

아트인사이트에 글을 쓰며 여러 작품을 만났다. 전시, 영화, 공연, 도서처럼 분야는 달랐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읽어보니 많은 글이 비슷한 질문 앞에 서 있었다. 나는 작품을 단순히 좋았다거나 아쉬웠다고 말하기보다, 그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여 온 세계를 어떻게 흔드는지 살피고 싶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되어 온 헌신, 과학이라는 빛 아래 가려진 책임, 눈에 보이지 않는 생태적 연결, 사라지고 삭아가는 존재들의 시간, 그리고 현실 바깥으로 밀려난 영적 상상력 같은 것들이다. 이 글들은 모두 서로 다른 작품을 다루지만, 공통적으로 보이지 않던 것을 다시 보게 만든다. 그래서 이번 큐레이션은 ‘보이지 않는 관계를 다시 읽는 법’이라는 이름 아래 몇 편의 리뷰를 다시 엮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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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이름을 의심하기 - 로테/운수


가장 먼저 꺼내고 싶은 글은 연극 「로테/운수」에 대한 리뷰다. 이 글에서 나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남긴 불편함에서 출발했다. 어릴 적 읽었던 동화와 고전은 당시에는 교훈과 즐거움을 주었지만, 시간이 지나 다시 떠올려보면 이상한 장면들이 많다. 누군가의 희생은 사랑으로 포장되고, 누군가의 침묵은 미덕으로 여겨지며, 중심 서사의 바깥에 놓인 인물들은 끝내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다.


「로테/운수」는 바로 그 주변부의 인물들을 다시 불러낸다. 사랑받는 주인공의 곁에서, 혹은 남성 중심의 고전 서사 주변에서 조용히 기능하던 여성들이 무대의 중심으로 들어온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여성 인물에게 발언권을 준다’는 점에만 있지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너무 쉽게 믿어온 사랑과 헌신의 언어를 다시 의심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사랑은 아름다운 감정일 수 있지만, 때로는 누군가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이름이 되기도 한다. 헌신은 숭고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 헌신을 당연하게 소비하는 구조 안에서는 폭력이 되기도 한다. 「로테/운수」 리뷰는 그런 점에서 내가 쓴 글들 가운데 가장 직접적으로 ‘오래된 이야기의 윤리’를 묻는 글이었다.

 

 

“마리 퀴리”, 과학의 빛과 그림자를 말하다


뮤지컬 「마리 퀴리」에 대한 글은 ‘빛’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과학은 흔히 진보, 발견, 합리성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어떤 발견도 완전히 순수한 빛으로만 남지는 않는다. 그것이 사회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지식은 책임과 결부되고, 발견은 누군가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이 리뷰에서 중요하게 다루고 싶었던 것은 한 위대한 인물의 업적보다, 그 업적을 둘러싼 윤리적 질문이었다. 뮤지컬은 마리 퀴리를 천재 과학자로만 조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학의 성취가 산업과 노동, 질병과 죽음, 그리고 사회적 책임의 문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보여준다.


이 점에서 「마리 퀴리」는 단순한 위인전이 아니라, 빛의 그림자를 응시하는 작품이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 발견한다는 것, 세상을 바꿀 힘을 갖는다는 것은 언제나 책임을 동반한다. 이 글은 예술이 과학을 다룰 때 무엇을 말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대가 어떻게 윤리적 질문의 장소가 될 수 있는지를 고민한 기록이다.

 

 

삶이라는 무대, 잊힌 이들을 위한 제의 - 유령


연극 「유령」에 대한 리뷰는 극장이라는 공간 자체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글이다. 공연은 무대 위에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관객이 객석에 앉아 숨을 고르고, 배우가 그 앞에서 몸을 움직이며, 조명과 소리와 침묵이 한 공간을 채울 때 비로소 공연은 하나의 사건이 된다.


「유령」을 보며 인상 깊었던 것은 작품이 단순히 이야기를 전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잊힌 이들을 위한 일종의 제의처럼 느껴졌다는 점이다. 극장은 현실에서 쉽게 지워지는 존재들을 잠시나마 다시 불러내는 장소가 된다. 이름 없이 사라졌거나, 말할 기회를 얻지 못했거나,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진 존재들이 무대 위에서 다시 형태를 얻는다.


이 리뷰는 내가 공연을 볼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각을 잘 보여준다. 공연은 완결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라기보다, 함께 있는 사람들의 몸과 시간을 통해 어떤 감정을 통과하게 만드는 장르다. 「유령」은 그 통과의 경험을 통해 삶과 죽음, 기억과 망각, 관객과 배우의 관계를 다시 묻게 했다.

 

 

보이지 않는 연결을 읽다 - 미코, 버섯의 모든 것


도서 「미코, 버섯의 모든 것」에 대한 리뷰는 인간 중심의 시야에서 조금 벗어나려는 시도였다. 버섯은 대개 숲속 어딘가에 잠시 돋아났다 사라지는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 아래에는 거대한 연결망이 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작은 갓과 줄기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균사체는 숲의 생명들과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책을 읽으며 흥미로웠던 것은 버섯이 생태계의 조연이 아니라, 세계를 연결하고 순환시키는 중요한 존재로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인간은 너무 자주 눈에 보이는 것, 크고 빠르게 움직이는 것, 명확한 형태를 가진 것만을 중심에 둔다. 그러나 생명은 훨씬 더 느리고 은밀한 방식으로 서로를 지탱한다.


이 리뷰는 그런 보이지 않는 연결을 읽으려는 글이었다. 버섯을 통해 생태를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오래된 착각에서 한 걸음 물러나는 일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실은 세계를 떠받치고 있다는 감각. 이 감각은 이후 다른 전시와 공연을 바라보는 데에도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소멸을 사유하는 미술관: 삭아감의 미학과 시간


전시를 다룬 글 중에서는 「소멸을 사유하는 미술관」을 이 흐름 안에 함께 두고 싶다. 이 글에서 중심이 된 것은 사라짐이었다. 우리는 대개 소멸을 부정적인 것으로 여긴다. 무언가가 낡고, 삭고, 부서지고, 사라지는 과정은 실패나 끝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예술은 때때로 그 소멸의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보게 만든다.


삭아간다는 것은 단순히 없어지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물질 위에 남기는 흔적이며, 존재가 세계와 관계 맺어온 방식의 기록이다. 완전하고 단단한 형태보다, 부서지고 변형되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더 많은 이야기가 드러날 때가 있다.


이 리뷰는 사라짐을 애도하면서도, 그것을 단순한 상실로만 바라보지 않으려는 글이었다. 소멸은 끝이 아니라 관계의 다른 이름일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존재들, 쉽게 지나쳐지는 물질들, 시간 속에서 천천히 변하는 것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세계를 바라보는 일. 그것이 이 글의 핵심에 있었다.

 

 

영혼에 색을 칠하기 - 2025 미디어시티비엔날레


마지막으로 「영혼에 색을 칠하기」를 이 큐레이션의 끝에 놓고 싶다. 이 글은 2025 미디어시티비엔날레를 다루며 영성, 상상력, 공동체의 문제를 생각한 글이다. 영적 세계는 때로 현실 도피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어떤 상상력은 현실을 외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현실을 다르게 살아가기 위해 필요하다.


이 전시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영성이 비현실적인 환상으로 머무르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한 또 하나의 현실로 제안된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모두 너무 구체적이고 실용적인 언어에 익숙해져 있다. 그러나 예술은 때때로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감각, 보이지 않는 믿음, 아직 도착하지 않은 가능성의 형태를 보여준다.


이 리뷰는 그래서 이 큐레이션의 결론처럼 읽힌다. 사랑을 의심하고, 과학의 책임을 묻고, 생태적 연결을 읽고, 소멸의 시간을 사유하는 일은 결국 우리가 어떤 세계를 함께 상상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어진다. 예술은 답을 주기보다 질문을 남긴다. 그리고 그 질문은 우리가 익숙한 세계를 조금 다르게 살아가게 만든다.

 

 

다시 읽으며


다시 돌아보니 내가 쓴 글들은 서로 다른 장르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것은 중심에 놓인 것보다 주변에 밀려난 것을, 선명하게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을, 완성된 형태보다 변화하고 사라지는 과정을 바라보려는 태도였다.


리뷰는 작품을 평가하는 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작품을 통해 나의 감각과 질문을 정리하는 글이기도 하다. 어떤 작품은 사랑의 언어를 의심하게 만들고, 어떤 작품은 과학의 책임을 묻게 하며, 어떤 작품은 인간 너머의 연결을 상상하게 한다. 또 어떤 작품은 사라지는 것들 곁에 조금 더 오래 머물게 한다.


이번에 다시 엮은 글들은 그런 의미에서 내가 예술을 통해 계속 붙잡고 싶었던 질문들의 목록이다. 우리는 무엇을 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가. 어떤 존재들이 이야기의 바깥에 놓여 있었는가. 예술은 그들을 어떻게 다시 불러낼 수 있는가.


아마 앞으로도 나는 작품 앞에서 비슷한 질문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다만 그 반복은 같은 자리를 맴도는 일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감각의 연습에 가깝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일, 들리지 않던 목소리를 들으려는 일, 사라지는 것들 곁에서 시간을 함께 보내는 일. 내가 아트인사이트에 써온 글들은 결국 그런 연습의 기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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