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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소연 작가의 단편집 『사랑과 결함』에는 ‘사랑’과 ‘결함’처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 모여 있다. 수많은 사랑 이야기를 하면서 그 이면에 붙어있는 결함을 보여준다. 사랑은 우리의 삶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요소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과 그 순간을 지나 마주하는 것들까지.

 

단편집은 「우리 철봉 하자」, 「아주 사소한 시절」, 「우리는 계절마다」, 「그 얼굴을 마주하고」, 「사랑과 결함」, 「팜」, 「그 개와 혁명」, 「분재」, 「도블」, 「내가 머물던 자리」와 같은 단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여 책의 마지막 여운을 독자에게 남기는 단편 소설 「내가 머물던 자리」을 함께 읽어보자.

 


 

1. 시선 폭력


 

“내가 왜 나를 멸시하겠어? 그건 아니잖아.”라고 말하는 시연을 시작으로 소설 「내가 머물던 자리」는 방황하고 고뇌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풀어낸다. 친구에게 돈을 잃거나 공유 주택 규칙을 지키지 않거나 결혼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들. 예소연에게 멸시는 하찮게 생각하는 넘어서는 시선 폭력이다. 내가 너를 마음껏 쳐다볼 수 있다는 권력, 나는 너를 구경하고자 한다는 시선, 내가 너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뜯어볼 수 있다는 폭력이다.

 

이때 소설의 시점인물인 시연은 ‘불행 포르노’를 즐겨보지만, 실제로 그러한 광경을 보고 싶어하진 않는다. 소설 「내가 머물던 자리」에서 불행 포르노는 시연과 정선, 미리내 그리고 손과 진과 영을 보는 사람들의 시점이다. 동시에 시연처럼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시선이 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람들을 보면 한 단어가 생각난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는 독일어로 ‘남의 고통을 볼 때 느끼는 만족감’이라는 의미를 가졌다. 소설에서도, 그리고 현실에서도 불특정 다수는 이들을 보며 자기 만족감을 채운다. 인간은 자신이 열등감이나 질투를 느끼는 타인을 비웃고 멸시하는 순간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다. 뇌과학적으로 인간의 뇌 작용이 기쁨과 멸시를 동일한 자극으로 느낀다는 말이다.

 

주류의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비주류의 자리에 머무르기로 한 그들의 모습이 하나의 불행 포르노일지, 사람들이 평가하는 기준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인생일지 궁금하지 않은가. 예소연은 미세한 애틋함이 스며들어 존재하는 따뜻한 시절의 자리를 알려준다. 그 자리에 머물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어떤 평가를 받고 내릴 수 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리고 독자에게 보여준다.

 

 

 

2. 흔들리는 자리


 

사람들은 인생을 돌아볼 때 과거 자신이 머물던 자리를 찾아내고 그 자리의 깨끗함-이는 시각적인 범위뿐만 아니라 사회적 위치, 타인의 판단을 포함한다-을 기준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그런 경험이 없었다고 생각하거나 떠오르지 않는다면, 주변의 공중화장실을 떠올려보자.

 

 

아름다운 사람 화장실.jpg

 

 

문 앞에 붙어있는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리도 아름답습니다.’라고 적혀있는 문구는 그 자리가 마치 나를 대변하는 느낌을 준다. 잠시 머무르는 공간임에도 이곳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래 머무른 자리라면 더욱 그러하다. 내가 머물던 자리가 깨끗해야지 나 역시 양심적이거나 정직하고 깨끗한 사람이 된 기분이다. 즉,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평가받기 위해서는 머물던 자리가 하나의 기준점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내가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뿐만 아니라 타인이 나를 평가하는 기준, 더 나아가 나 역시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게 된다.

 

소설 「내가 머물던 자리」에는 한 사람이 머물던 자리와 그 자리를 토대로 한 사람을 평가하는 화자인 시연이 나온다. 그녀의 평가에는 그녀 역시 포함된다. 시연은 “어떤 상황에 놓이더라도 가장 먼저 스스로를 의심하곤”(311) 한다. 이에 대해서 소설 속 시연이 경험한 일이 있다. 회사 공유 드라이브에 파일이 없어진 상황은 회사라는 공간에서 회사원 자리에 있는 시연이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면서 무엇을 잘못했는지 판단하고 ‘나’라는 사람을 평가하는 일이다.

 

동시에 “그간 일어났던 모든 일-부모와의 관계 청산, 전 애인의 물리적 폭력, 다낭성난소증후근 진단과 호르몬 불균형-로 말미암아 나 자신을 멸시”(318)한다. 그러면서 ‘나는 왜 이렇게 살면서 쉽게 버림받는가.’에 대한 질문을 꺼내 돌아본다. 그리고 그 질문의 답은 역시 스스로를 탓하며 자신이 머물렀던 자리를 떠난다. 홀로 살다가 미리내를 만난 공유 주택까지 말이다. 여전히 시연의 자리는 흔들리고 불안하다.

 

시연이 자신과 가장 닮은 자리에 있다고 판단하는 사람은 정선이다. “토킹 바에서 일했던 사람, 얼마든지 실수로 임신할 수도 있는 사람.”(331)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정선과 시연이다. 토킹 바라는 자리에 있는 이들을 보며 누군가는 “토킹 바에서 친구를 사귀느냐며 혀를”(320) 찬다. 이는 사회 전체가 자본주의의 굴레에서 사람의 계급을 자리로 나눔을 알 수 있다. 예소연 작가의 작품세계에서 낮은 계급은 토킹 바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된다.

 

그렇기에 「내가 머물던 자리」는 소외된 이들의 자리를 비추는 소설이 된다. 타인에게 평가받는 기준을 떠올리고 나의 자리를 돌아보게 한다. 시연은 자리의 변화를 경험한다. 소설에 나오진 않았지만, 공유 주택에서 벗어나 미리내와 함께 전셋집으로 옮길 것이다. 이제 시연 역시 불안하게 흔들리며 머물던 자리가 정선의 군산 집처럼 자리 잡게 될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밝은 이야기만 남겨두지 않는다. ‘손’은 정선과 시연이 돈 이야기로 다투니까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는다. “제가 있을 자리를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는 서글픈 아이”(334)다. 정선이 손은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고 했으니, 손의 부모가 누군진 알 수 없다. 손이 방에 들어가면서 작가는 현실을 직면하게 한다. 피할 수 없게 만들면서 변화해야 함을, 이는 독자의 몫임을 말하고 남겨둔다. 동시에 작가의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지점은 인물의 자리를 인물이 선택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현실에서는 부모가 아이를 버림을 선택하지만, 소설에선 아이가 스스로 보호자를 선택했음을 강조한다. 이는 작가의 말이 인물의 입을 통해서 나오게 되는 지점이다.


결국 시연은 결말의 계곡으로 나아가기까지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을 변화시키게 된다. 불행 포르노의 렌즈를 종종 끼곤 했던 시연은 여기서 벗어난다. 앞에서 언급했듯 불안한 자리를 벗어나 견고한 자리로 움직일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직접 머물던 자리를 부수면서 말이다. 이는 군산의 작은 마을 속 ‘손진영주’라고 새겨진 문패가 걸린 낡은 한옥 마당에 있는 화장실을 부수는 일이다.

 

 

내가 머물던 자리 1.jpg


 

정말이지, 정선이네 화장실은 몹시 열악했다. 대충 시멘트만 발라놓은 모습이 어떻게든 변기 하나는 있어야겠다, 싶어 만들어놓은 것 같았다. 심지어 타일 몇 장은 깨져 있었다. 그것을 어떻게든 보수해보겠다고 노력을 했었던지 수도 옆에 망치가 놓여 있었다. (…) 어쩌자고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수도 옆에 놓여 있던 망치를 들었다. 그러자 미리내가 놀라 뒷걸음질쳤다. 망치를 들자 타일을 그대로 내리치고 싶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그래서 그렇게 했다.

 

_(334-336)


 

열악한 화장실, 그래서 멸시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던 이 화장실은 샤덴프로이데의 사람들에겐 ‘좋은 자리’가 아니다. 나는 저곳에 있고 싶지 않으면서, 누군가가 저곳에 있다면 즐거워할 수 있는 그런 자리. 시연은 화장실 내부를 보며 정선의 노력을 확인한다. 그리고 불특정 다수를 향해 망치를 들고 그대로 내리친다.

 

이로써 시연은 오해를 풀게 된다. 정선과의 오해, 미리내에 관한 오해, 화장실이 집안에도 있다는 오해, 더 나아가 스스로를 향한 오해를 말이다. 사람을 판단하던 기준이 바뀐다. 그러면서 시연은 그들과 함께함에 마음속 찝찝함을 떨치고 계곡으로의 작은 여행을 떠난다.

 

 


3. 함께함의 관계


 

‘추우강남(追友江南)’이라는 말이 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의미의 한국 속담이다. 이 속담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자기 주변에 있는 사람에 의해서 행동, 생각이 달라질 수 있으니 친구를 가려 사귀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누군가를 판단하거나 평가할 때 그 사람뿐만 아니라 주변의 관계까지 함께 고려하곤 한다. 즉, 나를 평가하는 일에 내 주변 사람들이 받는 평가로 점수 매겨진다는 것이다.

 

동거인. 한집에 같이 사는 사람을 묶는 단어이다. 이때 국어사전에서는 ‘가족이 아니면서’ 같이 사는 사람이라는 의미로도 동거인을 설명한다. 소설에서 나오는 인물은 모두 동거인의 관계이다. 가족이 아니면서 한집에 사는 이들의 모습은 더욱 끈끈하게 뭉쳐있다. 미리내는 시연의 동거인이고 손과 진, 영은 정선의 동거인이다. 그리고 과거 시연과 정선 역시 같은 곳에서 일하던 동거인이다. 미리내와 정선도 함께 유럽 여행을 한 동거인에 포함된다. 동거인만큼 인간관계에서 가까운 존재, 서로를 판단하고 서로의 거울이 되는 존재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기본 욕구인 의식주를 함께하기 때문이다.

 

매슬로의 욕구단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생리적인 욕구에 해당하는 의식주, 숨쉬기, 수면을 충분히 얻었을 때 안전 욕구, 존경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로 나아갈 수 있다. 그만큼 의식주를 함께함의 관계는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군산에서 꼬막을 먹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작가는 이들을 동거인의 관계로 묶는다. 하지만 미리내를 제외한 공유 주택에서 시연은 동거인을 만나지 못한다. 항상 데면데면하며 대화는 카카오톡 단톡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함께 밥을 먹지 않는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 청년 세대가 경험하는 문제점과 맞닿아 있다.

 

관계의 단절, 의사소통의 오류는 소설의 인물들과 현시대의 청년들이 경험하고 있다. 그렇기에 시연은 더욱 “만약 누군가 나에게 김치를 조금 나눠 줄 수 있나요? 하고 물어봤다면 나는 언제든 그러자고, 함께 김치찌개도 끓여먹고 볶음밥도 해먹자고 말했을 것”(334)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공유 주택 사람들은 미리내와 시연을 피할 뿐이다. 서로의 영역을, 규칙을 지키지 않는 비정상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시연도 정선처럼 진정으로 함께하는 동거인을 만난다. 군산에서 서로 꼬막을 나눠 먹는 ‘손지영주’를 만나면서, 미리내가 전셋집에 같이 살자고 말하면서.

 

 

내가 머물던 자리 2.jpg

 

 

시연이 바라보는 정선의 동거인들은 “서로의 머리를 스스럼없이 묶어주고 실한 꼬막을 고르고 골라 내어주는 사이이다.”(333) 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사회의 기준-누군가 결혼이 의무라고 한다면-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도대체 너희는 무슨 사이냐며 의구심을 갖거나 각자의 ‘불행 포르노’에 끼워 넣을 수도 있다. 또한, 사람들은 군산 마을 한옥 동거인 무리에게 제멋대로 불행 포르노의 렌즈로 덮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예소연 작가는 이 특별한 관계에서 함께함의 힘을 말한다. 단순히 지금 한 공간에 있기에 즐거운 것이 아니라 내일의 하루를 같이 하고 의지할 수 있는 함께함이다. 그렇기에 사람들의 평가에서 외면받거나 낮아지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평가가 중요한 것이 아닌 내가 즐거움을 느끼는 관계가 중요해진다. 결국 시연이 제멋대로인 미리내와 함께함을 선택하면서 만족감을 느낀다. 미리내가 담배를 권했을 때도 이런 게 필요했다며, 긍정한다. 정선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외따로 태어나서 홀로 자신을 길러낸 사람들이고 지금은 함께 살고 있어.

 

_(338)

 

 

지금 ‘손지영’과 함께 살고 있음에 만족한다. 자신이 선택한 결과를 긍정한다. 시연은 처음 한옥에 들어왔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한옥은 짐작보다 훨씬 아담하고 고즈넉했다. 나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안심이 되었다.”(321) 고 말한다. 아담하고 고즈넉한 한옥에서 출발한 트럭에서 여섯 인물은 ‘트럭 동거인’이 된다.

 

 

 

4. 무디게 흘러가는 인생


 

결국 소설 속 그들이 받게 되는 사람들의 평가는 ‘어쨌든 멸시’이다. 시연과 정선이 토킹 바에서 일했기 때문이 아니다. 사람들은 대개 ‘불행 포르노’를 즐겨 보기 때문이다. 이는 낮아지는 자존감이 원인이기도 하다. 내가 평가 기준에 충족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타인을 나보다 더 낮은 존재로 생각하며 자신을 올리는 것이다. 이렇게 불안하게 흔들리는 자리는 머묾의 순간을 짧게 만든다.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정착하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계곡으로 향하는 그들에겐 각자의 자리가 있다. 타인의 평가에 치우치거나 흔들리지 않을, 내가 머물 자리가 있다. 이제 사람들이 보내던 시선 폭력의 날카로움은 무뎌졌다. 군산에서 꼬막을 함께 먹으면서, 화장실을 허물면서, 그리고 계곡으로 가면서 말이다.

 

내가 머물던 자리에 무엇이 남았는지도 중요하지만, 지금 내가 머물고자 하는 자리, 머물고 있는 자리에 무엇을 남길 것인지도 중요하다. 이미 지나간 일은 다시 되돌아가서 바꿀 수 없다. 지금 함께하고 있는 이들과 어디로 향할지가 중요하다. 소설의 마지막 자리는 계곡이다. 그곳에서 과거의 내가 머물던 자리를 마주한다면 가끔 복잡하고 더럽고 안타까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지금은 함께 살고 있”(338)다고 말하는 정선처럼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된 여러 선택의 과정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는 나 스스로를 평가하는 기준이자 내가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 그렇기에 소설 「내가 머물던 자리」엔 누군가와 함께한 추억이 남는다.

 

샤덴프로이데, 어떤 의미를 가진 단어인지 기억하는가. 남의 불행에 즐거움을 느끼는 감정이다. 이 단어와 반대되는 단어가 있다. 무디타, 누군가와 ‘함께 기뻐한다’라는 의미로 다른 사람들의 성공이나 행복을 볼 때 느끼는 행복의 감정이다. 다른 이의 안녕을 바라는 자세가 필요한 시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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