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페르난도 보테로가 작고한 뒤, 로마와 바르셀로나, 바쿠 순회 전시에 이어 한국에서 그의 예술적 유산을 대규모로 마주할 첫 번째 기회가 찾아왔다.
2026년 4월부터 8월까지 진행되는 이번 전시는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렸던 2015년 전시 이후 11년 만의 재회다. 거장의 부재 속에서 그의 상징인 ‘보테리즘’ 회화와 조각 등 대규모 작품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페르난도 보테로 : 형태의 미학》은, 그간 명화를 뚱뚱하게 재해석한 작가 정도로만 그를 알고 있던 내게 그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기회였다.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태어난 보테로는 라틴 아메리카 특유의 문화와 종교적 환경 속에서 예술적 감수성을 쌓았다. 당시 콜롬비아의 교회와 대성당은 도시에서 가장 역동적인 예술 공간이었으며 성직자의 권위 또한 매우 강력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고전 회화를 수학하며 형태와 비례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확립한다. 그 영향에서인지 여성 성인들 연작 처럼 종교적 소재를 다루면서도, 이를 언제나 성화의 전통 및 이탈리아 콰트로첸토(15세기 미술)의 기법과 연계하여 전개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존재의 힘을 드러내는 선택
보테로는 현실 세계의 대상을 그려내는 구상화가이지만, 당연하게도 사실주의 화가는 아니다. 인물을 보이는 그대로가 아닌 실제보다 넓은 면적에 걸쳐 표현하기 때문이다.
한편 보테로의 화풍을 단순히 ‘뚱뚱함에 대한 선호’로 치부하는 것은 그의 예술 세계를 단편적으로만 이해하는 일이다. 그가 인물과 사물을 부풀린 이유는 '양감'이라는 단어에서 비롯된다.
"예술에서 양감은 관능이라는 특정한 개념과 맞닿아 있다. 나는 회화가 관대하고, 감각적이고, 육감적이어야 한다고 확신한다."
관능, 감각, 육감. 모두 살아있는 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볼륨은 곧 존재의 힘으로 다가온다. 미술사에서 ‘보테리즘’이라 명명된 이 양식은 균형과 공간, 색채에 대한 치밀한 탐구 끝에 탄생했다.
그는 차갑고 지적인 추상 대신 육감적이고 풍요로운 구상의 세계를 선택했으며, 이는 시각적 즐거움을 넘어 대상의 실재감을 압도적으로 전달한다.
무표정이 만드는 거리감
소풍 The Picnic, 2001, 캔버스에 유채, 113 X 165 cm, ⓒ Fernando Botero Foundation
총 6개의 테마 중 4번째 테마인 '정물'에 이르기 전까지 내가 느낀 가장 지배적인 감상은 인물들이 모두 무표정하다는 것이었다.
인물의 감정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면 작품의 메시지를 '슬픔'이나 '환희' 같은 일시적인 감정의 범주로 읽기 마련인데, 보테로의 인물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기에 주변 요소와 그들 사이의 관계에 더욱 주목하게 된다. 이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응시하게 만드는 '거리두기'의 장치로 작동한다.
보테로의 작품은 일상과 종교, 투우와 서커스 등 폭넓은 주제를 다루지만, 그 이면에는 가볍지 않은 시대적 통찰이 흐른다. 무심한 표정과 과장된 신체는 때로 권력의 허망함을 날카롭게 풍자한다. 훈장을 단 군 장성이나 대통령을 풍선처럼 부풀려 그림으로써, 절대 권위 또한 언제든 터질 수 있는 허무한 공기와 같음을 시사하는 식이다. 반대로 서커스 단원이나 광대처럼 소외된 인간의 존엄을 드러낼 때는 볼륨의 힘이 역설적으로 작용한다.
세상이 주목하지 않는 작은 존재들을 화면 가득 거대하게 채워 넣음으로써, 그들이 지닌 생의 무게와 존재 가치를 물리적으로 증명해 보이기 때문이다.
6개의 테마로 조망하는 보테로의 여정
작가의 딸 리나 보테로와 크리스티나 카리요 데 알보르노스가 공동 기획한 이번 전시는 단순한 연대기적 구성을 탈피했다. 대신 ‘변주’, ‘라틴 아메리카’, ‘종교’, ‘정물’, ‘투우’, ‘서커스’라는 6개의 테마를 통해 보테로의 철학적 궤적을 입체적으로 추적한다.
명화를 재해석한 ‘변주’부터 그의 뿌리를 보여주는 '라틴 아메리카', 종교적 상징을 인간적인 시선에서 풀어낸 '종교', 삶과 죽음의 드라마를 담은 ‘투우’와 ‘서커스’에 이르기까지, 회화와 드로잉, 조각이 어우러진 이번 전시에서 보테로가 탐구해온 ‘볼륨의 미학’이 매체에 따라 어떻게 확장되는지를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는 인간의 본능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동시에, 삶을 바라보는 깊은 시선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효율과 속도를 중시하는 현대 사회에서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존재의 여유와 관능은 어디에 있는지, 보테로의 양감의 미학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풍요로운 답변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