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에서 음색의 미의식과 피아노 음색

글 입력 2014.02.26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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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서 음색의 미의식과 피아노 음색
음악미가 지니는 음색가치의 역사와 피아노 음색이 지니는 예술적 가치의 역사적 과정.
                       

피아노 음색이 순 물리적 가치에 의한 음악적 소리에서 미적 가치를 지니면서 예술성의 전면에 역사적 현실로 드러난 건 20세기 중반 이후다. 물론 낭만 시대 이전은 연주 자체가 아이디어 속의 음상에 의해 이루어졌기 때문에 음색이나 물리적가치의 예술적 인식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어쩌면 그것은 음악미라는 관점에서 보면 예술적 가치를 지닌 지고의 이상적인 한 형태였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그 기록을 남기지 못했다. 녹음기록의 역사에서 보면 시기적으로 이전 시기다. 그렇고 그 현상이 역사적 현실의 전통이라면 굳이 기록의 의미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절대가치에 대한 인식보다는 음악표현 과정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아니면 의례히 음악은 그렇게 표현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면 당연한 현상을 기록할 필요성을 못 느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서면서 과학이나 세기말적인 현상은 인간의 사고를 인식의 장으로 끌고 갔고 음악에서도 음의 물리적 현상을 극복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극복해야 한다는 개념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 음색이 지닌  예술적 절대치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20세기는 내내 음가의 질감에 대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지난 세기의 미의식을 망각의 시간 속에 잃어버렸기 때문에 음질의 문제는 악기의 문제고 악보의 문제를 악기는 소리 화하는 매개체 역할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는 back to Bach의 회귀의 수레가 작용하고 인간의 소박한 인식의 현상이 20세기 중반에야 본격적으로 일어나면서 시대연주, 즉 정격연주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그것은 옛 연주법의 재현과정을 거치지만 그 시작은 연주법보다 악보의 해석에 주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악보에 의한 해석의 연주에서는 템포의 변화 외에는 다를 게 없다는 연주의 결과가 비판의 대상이 되자 악기의 주법을 찾기 시작한다. 관악기는 밸브 없는 악기를 쓰는 걸로 쉽게 해결이 되었지만 현악기는 단아한 음가 도출이라는 단선 논리에 의해 one note one bow라는 주법으로 정리가 됐다. 그러나 과연 그 방법이 역사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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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정격음악의 대부로 통하는 정격악기의 첼리스트며 지휘자인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는 그런 의혹의 눈길에 대해 명쾌한 답을 전한다. 그의 저서 "바로크 음악은 '말'한다"(원제: Musik als klangrede)를 통해서다. 어느 날 자신의 친한 사람이 자신에게 질문을 했단다. "당신이 연주하는 시대 연주법이 과연 각 시대의 주법을 재현한 것이냐 "고 이에 아르농쿠르는 "글쎄 맞는지는 몰라도 현대인들은 좋아 한다”고 답을 했단다. 그들이 연주법에서 찾은 사운드는 단아함과 순수함을 지니고 있어서 음가가 절대치가 그대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과연 그런 방법이 맞을까? 여기서 이들의 연주에 비판을 하거나 토론을 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그러면 기악은 그렇다 치고 성악이나 건반악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성악의 경우는 알토는 카운트 테너가 하면 되지만 그 외의 성부는 대책이 없다. 특히 소프라노는 앰마 커크비라는 걸출한 소프라노를 제외로 하면 해당 성악가가 없을 정도다. 그러니 기존 소프라노 중에서 맑고 단아함을 지닌 성악가를 선택하는 게 전부다. 그 외의 성부도 예외는 아니다. 그렇다면 건반 악기는 어떨까? 역사에서의 쳄발로는 연주의 장이 교회나 궁의 로비, 성 등 이다. 이들의 연주 장소는 음향이 6-7초 이상으로 그곳 홀에서 연주 되었다. 그러나 계몽사회가 되면서 연주회가 궁이나 교회를 떠나 근대적 개념의 콘서트 홀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에 따라 쳄발로는 당연히 볼륨의 제약으로 한동안 음악계에서 사라졌던 악기였다. 그러나 정격음악의 출현과 함께 등장하게 되었으며 건반 악기의 시대 악기를 해결할 수 있는 제격의 악기였다. 그렇다면 현대적 개념의 건반악기의 대명사며 모든 악기의 반주로 위상을 확고히 한 피아노는 어떨까? 현대 피아노로 바흐를 연주해? 연주 자체는 가능하지만 시대연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피아노의 역사는 1709년 이태리의 악기 제작자인 바르톨로메오 크리스토포리에 의해 만들어졌기 때문에 음악사적으로는 일천하다. 그러나 정격음악의 대중적 호응에 의하면 그 주 무대는 18세기부터 19세기 중반 무렵까지다. 그러다 보면 이 시대를 대변한 건반악기는 forte piano다. 지금은 옛 악기를 복원해서 쓰고 있는데 현대 피아노에 의해 청각이 길들여진 현대인들은 이 악기 소리에 전혀 흥미를 못 갖는다. 허약하고 깨진 듯한 울림의 톤은, 질감이 극대화한 지경에 이른 현대 피아노의 세련된 아름다움에는 도저히 미칠 수가 없다. 한동안 현대 정격음악의 대가인 구스타프 레온하르트가 모차르트를 중심으로 녹음을 했거나 그 외의 피아니스트들이 하이든에서 베토벤에 이르는 과정의 가곡 반주에 이 각기를 사용했지만 성악 자체의 음악적 의미 외에는 별 호응을 얻지 못한 듯하다. 현대에 이르면서 피아니스트들은 톤의 고도화한 질감, 즉 음색의 완벽함을 인식하기 시작했지만 실천과는 거리가 있었다. 이에 반해 음악을 즐기는 애호가들은 이미 지극한 톤의 이름다움에서 음악미를 찾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들의 리스닝 룸을 살펴보면 바로 이해가 된다. 그들의 지상 과제는 리스닝 룸의 오디오기기를 통한 무대 현장 사운드의 재현이다. 때문에 질감이나 세련된 음상과는 거리가 있는 forte piano를 찾는다는 것 자체가 고역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현대는 오케스트라를 위시해서 모든 앙상블단체들도 최상의 사운드가 애호가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음의 고도화한 질감을 즐긴 건 음악가들이 아니고 애호가들이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역사적으로 보면 악기의 기능이나 주법의 발달을 작곡가들이 주도했다면 현대의 음의 질감향상은 청중이 주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20세기 초 음악미학자들이나 사회학자들이 음악예술인의 영역을 작곡자- 연주가- 청중으로 정의한 사실을 상기 시킨다. 그것은 음악이 왕이나 귀족들의 성이나 대저택을 떠나 콘서트로 이동하면서 정의한 계몽시대 정점의 시대적 산물이다. 그게 20세기 중반을 지나면서 그들 애호가들의 수준이 음악회장과 각자의 리스닝 룸으로 이원화하면서 생겨난 또 다른 문화영역이다. 그러다보니 레코딩 문화가 보편화되었고 그게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당연히 그들은 최상의 음향에 의한 세련되고 고도화한 음질에 의한 미감을 즐겼고 그런 연주가나 단체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음악가들은 음상에 의한 즉흥연주를 즐겼던 고도화한 집중과 미감의 시대에서 20세기에 나타난 물리적 등가치에 의한 질감으로 바뀌었고 당연히 연습의 중요성이 연주의 전면에 나타난 것이다. 결국 현대는 음악도 소비자의 입맛에 맞추어야 하는 맞춤의 시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피아노도 예외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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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투르 루빈스타인(1887-1982)은 그의 나이 70을 바라보면서 완벽한 음가의 절대치가 무엇인지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완벽한 음질을 구사한 A.루빈스타인의 1960년 무렵의 시기는 그에게는 나이로는 73살이고 연주자로는 70여년이나 되는 시기다. A. 루빈스타인은 4살 때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인 요셉 요하임에게 음악가로서의 길을 물었으나 그의 재능이 바이올린이 아니고 피아노라는 사실을 간파한 요하임의 권유로 피아노를 시작했다. 나중에는 당대 최고의 피아노 대가면서 선생으로 역사에 기록된 테오도르 레체티츠키에게 배우며 명성을 얻어간 이후 60년이 넘은 시기다. 이렇게 연주가로 평생을 살아야 생기는 음색이니 연주가들이 엄두를 못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학문의 역사는 그런 음색도 단 시간에 접근할 수 있는 길을 가르치고 있다. 짧게는 3개월에서 길게는 2년여가 소요된다. 그게 현대적 개념의 음악적 음색 음향학이다. 모든 악기가 그렇지만 음색음향학의 기본은 악기 활용에서 비롯된다. A. 루빈스타인의 예로 그 과정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그는 1890년 후반에 이미 협연과 독주회로 명성을 쌓아갔다. 그리고 그의 녹음은 20년대 후반에 이미 기록되기 시작한다. 이때면 클래식 녹음 시기로는 초기에 해당한다. 이후 그는 특히 쇼팽 음악에 관한 최고의 대가로 명성을 얻고 있다. 그러면서 그의 연주 영역은 모든 장르를 어우를 정도로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60년 전후한 시기에 음색이 완벽하게 드러나기 시작하고 있다면 연주 그 자체로 음색의 경지에 들어서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상상이 아니라 간접이지만 체험적으로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레코딩 기록의 역사로 보면 20세기 전후한 시기에 태여 난 연주가들 예를 들면 첼로의 피아티골스키나 피에르 푸르니에, 바이올린에는 요셉 숙, 등등 수없이 많은 현악기 연주가들이 이 대열에 합류하고 관악기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현악기에 비해 관악기는 악기 활용성에서 다소 유리하다. 즉 현악기가 악기 전체를 울리게 해야 한다는 과제를 쉽게 성취한다는 게 만만치 않음에 비해 관악기는 각 악기가 지닌 관으로 호흡이 관통하면 음색의 생성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는 프렌치 혼의 데니스 브레인을 필두로 시작되지만 호흡과 관의 상호성만 성취하면 되기 때문에 현대의 젊은 주자들도 가끔은 어렵지 않게 음색을 성취하고 있다. 그러나 피아노는 특별한 예외가 거의 없다. 그것은 메커니즘의 단계극복을 통해 음색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만큼 합리적인 기능적 요소를 극복하지 못하면 안 되는 게 피아노 음색 성취다. 그렇다고 현대의 피아니스트들이 그런 기능적인 요소를 극복할 수 있는가와 악기 활용성에서 음향구조가 넘기 어려운 벽이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건 터치의 테크닉적 요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건 인지의 문제다. 피아니스트면 누구나 피아노를 친다. 그 과정에서 소리의 타점위치가 어디냐 하는 것으로부터 음색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건반 바닥에서 소리 점을 찾으면 된다. 여기서 일반적인 교육 과정을 살펴보면 이런 접근이 얼마나 현실성 없는 것인지 바로 알 수 있다. 피아노 교육, 특히 우리의 교육은 타점에 대한 어떤 고려도 없다. 오히려 타점이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타점은 건반상단 면, 즉 타건 되기 전의 평형상태가 타점이 된다. 그러면 평생을 해도 음색은 안 생긴다. 오히려 매번 독주회를 위해 연습을 몇 개월 한다면 그 과정에서 해당 곡에만 생긴다. 그러나 이건 음악적 음향에 의한 음색이 아니라 오랜 동안 같은 음을 반복적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생긴, 즉 습관에 의해  일시적으로 생긴 세련된 톤의 질감일 뿐이다. 그리고 이런 음질은 다른 곡을 새롭게 시작하면 바로 본래의 거친 톤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러니 평생을 해야, 그것도 아주 잘해야 생기는 것이다. 특히 터치과정의 타건 속도는 음색의 생성에 절대적인 역할을 하기 때문에 빠름이나 느림으로 구분되는 외에는 일정한 타건 역이 절대다. 그랬을 때 악기도 울리고 음색도 생성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때 생긴 음색의 역할은 음악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까? 왜 음색의 중요성이 대두될까? 단순히 자본주의의 특징인 소비자의 요구에 의해서 일까? 그런 현실은 어쩌면 당연하다. 그러나 같은 실력으로 같은 연주를 했을 때를 가정하면 그 차이는 속된 말로 하늘과 땅 차이다. 음색이 생기면 우선 음악미의 구도가 분명해 진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으로 분명해지는 게 아니다. 쉽게 예를 든다면 서예에서 같은 글씨인데 붓자리 엉성하게 나는 글씨와 붓자리뿐 아니라 각 획이 진하고 반듯하며 확신에 찬 글씨를 보면 아주 잘 쓰는데 라고 느끼는 그런 상태와 같다. 그리고 음색 유무는 그 자체만으로도 음악적 확신을 전해줄 뿐 아니라  명료한 음악 미까지 전해주기 때문에 음악을 듣는 사람을 감동적이게 할 여건이 충족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점에서 보면 음색은 성취여부와 음악의 균형감에 악보 음악의 서구적 어법만 갖춘다면 우리도 서구를 넘어가거나 그들과 동등하게 접근할 여지를 지닌 유일한 극복의 장이기도 한 것이다. 제 3세계 음악인들에게 음색은 그들이 서구음악 권에 들어갈 할 유일 한 길이기도 한 것이다. 
글 · 강노복 (경희대학교 음악대학 전속 조율사, 피아노구조와 조율 강사) 



출처 - 음악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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