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변하지 않고 싶은 것 [영화]

<중경삼림>을 보고
글 입력 2018.12.0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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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유효기간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

 

- 중경삼림 中 -


 

사랑은 변할까?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서도, 다른 관점으로 보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다만, 적어도 변하지 않는 사랑이 그리 쉽지는 않다는 점은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인다. 아무리 천생연분이라는 사이여도, 사랑은 결국 나와 다른 상대방과 하는 행위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변하지 않는 사랑은 때때로 나와 상대방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을 극복하고 서로를 좋아할 때 가능하다. 사랑이 인간이 느끼는 주관적인 감정이라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그러한 사랑이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점도 이해는 간다.

 

왕가위 감독의 『중경삼림(重慶森林)』은 홍콩 영화의 특유한 감성으로 그러한 사랑에 관해 묻는다. ‘변하지 않는 사랑’을 꿈꾸었던 두 남자가 ‘변하는 사랑’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를 두 개의 에피소드로 나누어 보여준다. 실연을 맞닥뜨린 그들의 행동은 다른 듯 닮은 묘한 구석을 공유한다. 먼저 등장하는 ‘경찰 223’은 생일이면서도 애인과 헤어진 지 한 달이 되는 5월 1일이 유효기간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사 모은다. 그날까지 애인에게 연락이 오지 않자, 그는 30일 동안 모아 둔 통조림을 한꺼번에 먹어버리고 그녀를 잊겠다고 다짐한다.


이후 등장하는 ‘경찰 663’은 애인의 생활방식에 머물러 하루하루를 지내다가, 자신을 남몰래 좋아하는 패스트푸트점 직원 ‘페이’의 노력으로 사랑하는 대상을 점점 바꾸어간다. 페이는 경찰 663의 옛 애인이 맡긴 그의 집 열쇠로 집에 몰래 들어가 자신의 흔적을 조금씩 덧칠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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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연을 당한 경찰 223과 경찰 663의 모습은 어찌 보면 상대보다도 더욱 큰 상실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영화가 두 사람의 독백이 중심이 되어 그들의 관점에서 옛 애인을 풀어내는 흐름은 이전과는 달라지는 자신들의 상태로 느끼는 감정을 잘 보여준다. 거슬러 올라가고 싶으면서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인지하는 데에서 방향성을 상실한 그들의 사랑은 ‘반쪽짜리 사랑’으로 전락한다. 더욱더 많은 감정을 내준 만큼, 통조림의 유효기간과 사랑의 기한을 비교하며 무한한 사랑을 희망하며 그 간격을 없애고자 하는 심리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그렇기에 사랑과 호감을 상징하는 통조림을 두고 경찰 223이 호감을 내보일 때, 그에 대한 마약밀매 중계자의 독백은 꽤 흥미롭다.

 


“사람은 변한다.

어제 파인애플을 좋아했던 사람이

오늘은 아닐 수도 있다.”

 

- 중경삼림 中 -


 

실제로 시간이 멈추지 않는 이상, 모든 것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변한다. 그런 시각에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변하지 않는’ 사랑은 ‘변하고 싶지 않은’ 사랑일 수도 있겠다. 사랑을 탐닉하고 회상하는 것 자체에는 이미 다르게 쓰인 끝이 자리하고 있다. 다만 나름의 이유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에 거리낌이 있어 이전을 추억할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지 부조화 속에서 우리는 끝없이 변할지도 모르는 사랑이라는 가치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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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 들뢰즈(Gilles Deleuze)는 ‘아장스망(agencement)’을 통해 인간이 매 순간 마주하는 변함으로 느끼는 이질감을 일찍이 설명한 바 있다. 이는 우리는 언제나 낯선 것들을 맞닥뜨리고 조금씩 시간이 흐르면서 나와 알맞은 ‘주름’을 하나둘씩 만들어나간다는 개념이다. 주름이 하나둘씩 쌓이며 새로운 것들은 낯익은 것으로, 불편한 느낌은 안락한 느낌으로 차차 바뀐다. ‘나’라는 주체는 그렇게 꾸준히 새로운 객체들을 재배열하면서 자신에 맞게 사유한다. 들뢰즈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사랑이 변한다는 말은 나에게 익숙한 사랑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라고 볼 수도 있어 보인다. 한번, 경찰 663이 페이를 알아가면서 내뱉은 독백을 살펴보자.

 


“우리는 함께할 시간이 오래 갈 줄 알았다.

연료를 채우고 나는 비행기처럼 멀리…

비행기가 항로를 바꿀 줄은 몰랐다.”

 

- 중경삼림 中 -


 

사랑이 변할 수는 있다. 아니, 아마 변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점을 알면서도, 사랑을 빠지면 그 이전에 어떻든 간에 또다시 우리는 변하지 않는 관계를 바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집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경찰 663이 애인의 물건들을 페이의 손길로 천천히 대체하는 모습만 보더라도, 내가 편안하고 좋다고 생각되는 사랑을 우리는 추구한다. 그로부터 느껴지는 상실도 어찌 보면 아장스망을 다시 만들어나가기 위한 과정인 셈이다. 따라서 ‘변하는’ 사랑을 두고 ‘변하지 않고 싶’은 사랑을 꿈꾸고자 하는 노력이 헛된 가치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최소한 그 순간들만큼은 변하지 않는 사랑을 한다고 느낄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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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OST M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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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환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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