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베이컨의 그림에서 나, 그리고 우리를 발견합니다 [시각예술]

글 입력 2016.10.31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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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동안은 글을 쓰기가 쉽지 않았다. 점점 글 쓰기가 어려워 지는 까닭이 있다면, 가장 걸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마음의 어려움 때문일것이다. 10월은 문화ㅡ예술ㅡ정치 크게 나아가 이 모든것들을 아우르는 사회라는 단어 속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안에서 혼란과 슬픔, 분노를 가해자와 피해자로 얻어갔고 우리가 사랑했던 많은 예술가들이 그리고 나라의 지도자가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범위의 기대를 송그리째 앗아가야만 했던 달이었다. 나에게도 충분히 잔인한 달이었고, 우리 모두에게 충분히 고통스러웠던 달이었다. 그런 상황속에서 나는 무엇에 집중하여야 할지 생각하게 된다. 이 모든 현실에 눈을 멀리하고 마음을 멀리하고 몸을 멀리해서 문학에 기대고 싶었고 음악에 숨어들고 싶었다. 미술에 안이하고 싶었고 글에 하소연하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래가지 못해 다시 동굴속에서 기어나올 수 있었던 까닭은 용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겁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작은 무책임의 비극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커져 이 처럼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기도 하고 마음을 다치게도 하며 눈물짓게 하는 것을 보게 된 이상 비극을 되돌이표 시키지 않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더욱 불편해져야 할 것임을 알지만 실행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고, 어른되기란 더더욱 더디기만 해보인다.

그런 연유로 이번 글을 통해서 동굴 안에 들어가있을 때 위로함을 얻었던 그림들을 나누고 싶었다. 한번쯤 봤을법한 화가의 작품일지 모르겠다.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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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언제나 도살장과 동물의 살덩어리 그림에 매료되곤 했다.
물론 기독교인들에게 십자가에 못박힌다 함은 전혀 다른 의미를 띄고 있음을 알지만
무신론자에게 도살은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행하는 행위에 불과하다"
- 프랜시스 베이컨.



미술관에서 혹은 영화관에서, 음악관에서 작품을 통해 작가를 만나고 사람을 만나는 경험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을 법한 이야기일지 모르겠다. 당연히 작품에 대한 첫인상이 자기 마음속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매겨지게 되는데, 그 인상이 그 작품을 대헸던 첫 태도이며 대게 그 태도는 자신이 그 작품속에서 강하게 부딫히는 메세지로 남고는 한다. 베이컨의 작품속에서 나는 '분노'함을 보았고, 자기부정적 느낌과 자학, 자해와 같은 단어들이 맴돌았다.

베이컨의 작품을 둘러싸고 그만의 시그니쳐라고 할 수 있는 것들 몇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로 기독교의 삼위일체의 편재를 강조하기 위해 삼면화(종교화에서 자주 사용하던 기법)라고 불리는 것을 그려왔다. 삼면화 형식을 비틀어 일그러지고 비틀어진 표정의 사람의 모습을 그렸다. 어릴 적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던 기억이 트라우마로 강하게 자리잡고 난 이후 폭력이나 가해당하는 사람의 모습에 대한 그림을 평생을 걸쳐 그린다.

그의 작품 속 사람의 모습은 늘 고개를 숙이고 있거나, 표정은 알수도 없을만큼 일그러지고 뭉개져버리게 표현되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 전체를 감싸고 있는 색감들은 단적이고 단순하지만 조화로운 색들을 사용하고 있다. 숨고싶어하는 사람의 모습같기도 하고, 또아리를 트는 것과 같은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인간 몸의 골격을 두드러지고 표현하여 내제되어 있는 인간내면의 율동미를 표현했다는 느낌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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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은 ‘짐승에 대한 연민’이라는 표현 대신 ‘고통 받는 인간은 고기다’라고 말했다. 고기는 인간과 동물의 공통 영역이고, 그에게 있어 인간은 죽어가거나 죽은 고기일 뿐이었다. "
-두산백과, 프랜시스 베이컨.



생전 동성애자였던 그의 그림속에는 뮤즈이자 애인들이 주로 등장하고, 여성이나 아이 노인과 같은 사람의 모습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아직까지 내가 보아온 그의 그림중에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림 속의 사람들이 모두 남자라고 사실화 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정장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모습, 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등에서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 그림을 그릴 때 그것들이 어디 중요한 것이었겠는가 생각해본다. 그가 나타내고 싶었던 것은 인간에 대한 혐오, 혐오 이상의 인간애, 인류애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심리학적으로도 혐오 또한 사랑의 다른 언어라고 판단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베이컨의 삼면화를 보면서, 그가 가장 보고싶어했던 진짜 '자아'(ego)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는 동시에, 인간이 가지고 있는 욕망과 본성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훌륭한 글을 썼던 작가이고, 멋이있고 수려한 작품을 만들어 마음 속 존경의 대상이었던 화가였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었고, 화려한 박수갈채를 받던 음악가였다. 그랬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같이 비난받고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이 사랑했고 기대했고, 존경해왔고, 그들의 작품을 마음속에 간직해왔을만큼 아껴왔기 때문에 그들에게 던지는 비난은 더욱 목소리가 높고 크고 뜨겁고 따가울것이 당연하다. 그럼에도 나는 자꾸만 무서워진다. 이유는 간단하다. 같은 사람이기 때문이고 인간이기 때문이다. 비난받아야 함이 당연한 사람들이지만, 미래의 내가 저 자리에 올라갔을때 저들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을지는 나 조차도 확신할 수 없음을 안다. 여태껏 누구보다 정직하게 살아왔고 성실하게 살아왔다. 어려운 사람들의 편에 서겠다 다짐한것에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다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알고 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언제든 악할 수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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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컨의 일그러진 초상을 보면서 일그러진 나를 보는 듯 했다. 오랫동안 절망해야하고, 낙심해야 하고, 죄책감에 몸을 떨어야 한다. 잠을 설칠만큼 괴로워야하고 매일 애도해야 한다. 회개의 기도와 자백의 기도를 해야만 한다. 일시적인 안타까움으로 그칠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분노해야 한다. 철저하게 따져야 하고 죄를 물어야 한다.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책임에 대해 책임져야 한다고 책임을 물어주는 사람, 책망하며 이유를 물어야 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속성을 가진것들끼리 가진 유전자의 무서움 그리고 본성에 대한 무서움을 알아야 한다. 보고싶은것만 보고 듣고 싶어하는 것만 듣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신이 싫어하는 행동이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쉽게 비판하고 싫어하며 배척하려 한다. 무의식적으로 우리가 그 남자이고ㅡ저 여자임을 알기 때문일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 예술이 인간에게 미칠수 있는 영향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인간 삶에 있어 예술은 과연 인간을 더 나은삶으로 인도하는 척도가 되었는가? 아니라면 어떤 부분일것일까. 베이컨의 그림이 불편해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럼에도 계속 두고두고 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박유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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