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천상병 시인 [문학]

글 입력 2016.03.12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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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천상병
∙ 출생-사망    1930.1.29. ~ 1993.4.28
∙ 활동분야     문학, 시
∙ 가족           배우자 목순옥
∙ 데뷔           1952 문예 '갈매기' 등단
∙ 대표작        <새>(1971), <귀천歸天>, <요놈 요놈 요 이쁜 놈>




맑고 순수한 웃음을 짓는 천상병시인. 그 모습은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 아이를 연상케 한다. 그는 문단의 마지막 순수시인이자 마지막 기인으로 불리었고 그 무엇보다도 막걸리와 시를, 아내 목순옥과 친구들을 사랑한 시인이었다. 삶이라는 소풍을 끝낸 그는, 아름답고 순수한 작품들을 흔적으로 남기시고 귀천하셨다. 지금부터 천상병 시인의 그 흔적들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새벽빛 와닿는,

동 틀 무렵


1949년, 마산중학교 3학년에 편입한 그는 매우 조숙한 천재의 면모를 보인다. 그의 조숙한 재능은 당시 마산중학교 국어교사이던 김춘수시인의 눈에 띄어 1949년 시 '강물'을 <문예>에 발표하게 된다.


강물

강물이 모두 바다로 흐르는 까닭은
언덕에 서서
내가
온종일 울었다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밤새
언덕에 서서
해바라기처럼 그리움에 피던
그 까닭만은 아니다.

언덕에 서서
내가
짐승처럼 서러움에 울고 있는 그 까닭은
강물이 모두 바다로만 흐르는 그 까닭만은 아니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 네가 그것에 닿아야만 네 것이 될 수 있다.

마산중학교 교사로 계시던 김춘수선생이 시집 '장미와 구름'을
 5학년 천상병에게 주면서 책에 써준 글. (1949년)



날은 밝아와도,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1955년, 그는 서울대학교 상과에 입학하지만 문학에 전념하기위해 4학년 당시 중퇴를 한다. 그리고는 독일 동 베를린 공작단 사건, 일명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 사건은 재불화가인 이응로, 재독작곡가 윤이상, 그리고 몇몇 재독 유학생들이 동베를린을 구경하고 돌아온 것을 두고 북한의 배후 조종에 따른 '간첩단' 사건으로 확대 조작이 된 것이다. 당시 천상병, 그의 죄명은 친구였던 강빈구에게 공갈로 3만 6500원을 갈취했다는 것인데, 평소 그는 다른 문인들에게 그랬던 것 처럼 강빈구에게 백원, 오백원 씩 받아 썼던 것이 하루 아침에 그를 간첩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는 6개월이라는 시간동안 갖은 고문과 치욕스러운 취조를 받게 된다. 물고문은 물론, 성기에 전기고문까지 받게 되어 후에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성불구자가 되고 만다. 억울함에 휩싸인 그는 그를 옥죄어 오는 고문관의 수치스러운 질문들과 행세들에 점점 정신적인 황폐증을 겪게 되고 6개월이 지나 석방을 했을 때는 몸과 마음이 모두 만신창이 된 상태였다.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해서도 그는 예전만큼의 먹성도 사라졌고, 술은 많이 먹었으나 주량이 줄어들고 금방 취해서 횡설수설하기 일쑤였고, 뜻밖의 행동을 보이며 동료 시인들을 놀라게 한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는 실제로 많이 쇠약해졌고 혼란스러웠다. 어찌 보면, 그가 술을 사랑했던 것도 치욕스럽고 서러웠던 그 기억에서 벗어나고 탈피하고 싶어서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그 날은 새

이젠 몇 년이었는가
아이론 및 와이셔츠같이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땀흘리는 나에게악수를 청한 그날은...
네 살과 뼈는 알고 있다.
진실과 고통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그는 6개월의 시간동안 '아이론 및 와이셔츠같이' 전기고문을 받았다. 이 시에서는 그날의 고통과 경험들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람들은 그의 몸이 망가진 이유에 대해 술을 많이 마셔서 그런것이라 하였지만, 천상병은 결코 그 이유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잘 모르는 사람들의 추측일 뿐이라며. 그는 진실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더 없이 떳떳한 강자였다.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시를 품고 가난을 노래하는.


1970년 겨울, 동가식 서가숙 하던 그의 모습이 갑자기 사라졌다. 그의 모습은 어느 곳에서도 나타나지 않았고 다른 문인들은 그가 길거리에 쓰려져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점차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참 아까운 친구였는데, 안 됐어. 시집 한 권도 없이 세상을 뜨다니!"

시인 민영 등이 '요절시인' 천상병의 유고시집을 묶어주기 위하여 작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1년 12월 천상병의 시집 [새]가 나오는데, 그것은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상병이 살아있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는 거리에서 쓰러진 채 발견 돼 행려병자로 오인되어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여전한 순진무구한 웃음을 흘리며 친구들 앞에 나타났고, 그는 생애 첫 시집을 '유고시집'으로 낸 유일무이 한 시인이 되었다.



외롭게 살다 외롭게 죽을
내 영혼의 빈터에
새날이 와 새가 울고 꽃잎 필 때는,
내가 죽는 날
그 다음날.

산다는 것과
아름다운 것과
사랑하는 것과의 노래가
한창인 때에
나는 도랑과 나뭇가지에 앉은
한 마리 새.

살아서 좋은 일도 있었다고
나쁜 일도 있었다고
그렇게 우는 한 마리 새. 


그는 가난하였다. 하지만 그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가난이 내 직업이다, 하고 외치고 다니던 사람이다. 시의 소재로도 가장 많이 쓰인 것이 가난이고 그것을 당당히 드러내며 자신의 삶의 한 부분으로 표현해 내는 그 모습에서 그의 순진무구함과 무욕이 묻어나는 듯 하다. 그는 청년시절 정해진 거처 없이 동가식 서가숙 하며 친구들에게 빌붙어 지내었고, 동백림 사건의 발단이 된, 수시로 백원, 오백원 씩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는 일이 다반수였지만 그 모습을 미워하는 이들은 없었다고 한다. 천상병이 돈을 빌려달라 하는 사람은 그와 친한 사람이라는 증거이므로 오히려 사람들은 그런 모습을 반겼다.


나의 가난은

오늘 아침을 다소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 잔 커피아 갑 속의 두둑한 담배,
해장을 하고도 버스값이 남았다는 것.

오늘 아침을 다소 서럽다고 생각한 것은
잔돈 몇 푼에 조금도 부족이 없어도
내일 아침 일도 걱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가난은 내 직업이지만
비쳐오는 이 햇빛에 떳떳할 수가 있는 것은
이 햇빛에도 예금통장은 없을 테니까.

나의 과거와 미래
사랑하는 내 아들딸들아,
내 무덤가 무성한 풀섶으로 때론 와서
괴로웠을 그런대로 산 인생. 여기 잠들다. 라고,
씽씽 바람 불어라.


어둠은 찾아온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1972년, 천상병은 친구 목순복의 동생 목순옥여사와 결혼하게 된다. 고문으로 인해 그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고, 그간의 고통들이 그 스스로를 어린 아이로 만들어버렸지만, 그런 모습들을 목순옥여사는 변함없이 아끼고 사랑하였다. 끊임없이 되묻는 똑같은 질문들에 귀찮음과 짜증 한번 섞이지 않고 늘상 다정하게 웃으며 그의 말에 대답해주곤 하였다. 
1988년 천상병시인은 간경화증으로 춘천의료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다. 생사에 기로에 놓인 그를 두고 목순옥 여사는 부디 5년만 더 살게 해 달라는 기도를 했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병원에서조차 가망이 없다던 그의 병은 완쾌되었고 정확히 5년 후인 1993년 거짓말같이 그는 세상을 떠났다. 천상병시인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목순옥 여사는 이렇게 생각했었다고 한다. "5년이 아니라 10년만 더 살게 해달라고 빌었을 것을..."


귀천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시인은 실제로 많은 죽음을 경험하였다. 동백림사건에 연루되어 독한 고문을 받았고, 행려병자로 오인되어 병원에 입원하는 동안 유고시집을 내는 기이한 경험도 하였고,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기적적으로 5년간의 유해기간을 갖고, 1993년 간경화증으로 끝내 소풍을 마쳤다. 순진무구하고 천진한 그 웃음 뒤의 몸과 마음은 조금 할퀴었고,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삶을 보내었다. 하지만 누구나가 한번쯤은 두려워하는 죽음에 대해 호탕하고 유쾌하게 표현한 사람이었고, 죽음을 아름다운 이별로 생각한 순수 시인이었다. 죽음을 그저 자신의 고향으로 떠나는 과정일 뿐이라고 여기며 그가 잠시 살았던 이 세상에서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으로 여기었다. 그렇기에 죽음은 결코 비극적인 세계가 아니라고 말 할 수 있을것이다.

지금 천상병시인, 그는 하늘나라 어떠한 곳에 자리잡고 앉아 변함없이 사랑하던 막걸리를 옆에 끼고선, 찬란하고 황홀했던 소풍의 시간들을 떵떵거리며 얘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김희주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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