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예술가탐구-비디오 아트의 창시자 백남준 [시각예술]

글 입력 2015.01.13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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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K NAM JUNE 1932. 07. 20. – 2006. 0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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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아트의 아버지" 백남준 그의 생애

백남준은 1932년 7월 20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섬유업 경영자 백낙승과 어머니 조종희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경기중.고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대학에서 미술사와 미학, 음악학, 작곡을 공부한 뒤 졸업 후 독일 뮌헨대 철학과에 입학하여 음악학과 미술학을 수학하였다. 1963년 그의 나이 31세에 부퍼탈의 파르나스 화랑에서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 으로 백남준의 첫 개인전을 열었다. 1967년에는 첼로리스트 샬롯 무어만이 참여한 <오페라 섹스트로니크>퍼포먼스 공연도중 음란죄로 경찰에 연행되기도 하였으며 그의 나이 50세 때 뉴욕 휘트니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가졌고 1988년에는 1003대의 TV로 구성된 <다다익선>이 국립현대 미술관에 영구설치 되었다. 1993년 61세에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 작가로 초청되어 황금사자상을 수상하였으며 1996년 4월 20일 뉴욕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2006년 74세의 나이로 1월 29일 마이애미 자택에서 소천하였다.


●작품세계와 영향을 준 동료들

1.John Cage

미국의 작곡가로 백남준이 정신적인 스승으로 인정할 만큼, 그의 인생의 터닝 포인트 같은 존재였다. 존 케이지는 ‘4분33초‘ 라는 곡으로 유명해졌다. 이는 4분 33초 동안 연주자가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곡으로 연주자가 연주하지 않음으로써, 관객들이 황당해하는 소리, 바스락거리는 소리, 발을 구르는 소리 등 일상적인 모든 소리들이 곡의 재료로 이용되어진다. 존 케이지는 이 작품을 통해” 절대적인 침묵이란 없다/는 깨달음과 일상적인 소리(소음)가 음악이 될 수 있다” 는 사고의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 백남준은 이 곡을 계기로 그를 평생의 스승으로 여기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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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라는 작품과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 이라는 퍼포먼스로 화답하였다.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라는 작품은, 길거리의 소음과 산모의 비명 등 일상적인 소리로 작곡한 작품이었고, ’ 피아노 포르테를 위한 습작‘는, 백남준이 쇼팽의 피아노곡을 치다가 피아노를 부수고 쓰러뜨리는 퍼포먼스를 한 것이다. 그리고는 갑자기 관객석으로 내려와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버렸고, 공연장을 나와 퍼포먼스가 끝났음을 전화로 알렸다. 여기서 넥타이를 자른 의도는, 서양에서 넥타이로 상징되는 남자의 권위와 힘을 없애버리자는 것이었다. 이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기존의 권위와 관습을 깨는 백남준 특유의 예술관을 접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두 사람은 이 후에도 예술적 동반자로 평생 친밀한 인연을 이어나갔다.

2.Joseph Beuys

요셉 보이스와 백남준은 백남준의 첫 개인전에서 만나게 되었다. 요셉보이스는 백남준의 전시 개막 한 시간 뒤에 나타나 4대의 피아노 중 한 대를 박살내었다.  “피아노를 치면 음악이 되지만 피아노를 부수면 행위예술이 된다”는 걸 보여주려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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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첫 만남 이후, 두 예술가는 평생의 예술 동지로서 독일 플럭서스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플럭서스 운동이란, ‘변화’, ‘움직임’ 을 뜻하는 라틴어로, 기존의 예술, 문화 및 그것이 만들어 낸 모든 기구에 대해 불신하는 반 예술적, 반 문화적인 전위운동이다. 그들은 피아노를 때려 부수기도 하고 머리에 먹물을 묻혀 선을 긋거나 갑자기 관객의 머리를 샴푸시키는 해프닝을 벌이기도 했다. 그들은 찬라의 행위 속에서 우리의 관념을 깨는 행위예술을 보여주었다.이러한 퍼포먼스를 통해 백남준은 '동양에서 온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3.Lee Jung S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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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의 “손”으로 불리는 그는 백남준/ 작품 /기술전문가 로, 1988년 다다익선 작품을 만들 때부터 기술파트를 담당해 백남준 작가와 20년 동안 40~50점의 작품을 함께 하였다.그는 20여 년을 ‘백남준의 손’으로 살면서 작가의 상상력을 현실로 구현하였고 경기 양평 출신의 이정성씨는 고등학교 졸업 전부터 기술학원을 다니다가 군 제대 후 청계천의 세운 전자 상가에서 전파상을 차리면서 본격적으로 가전제품 기술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이름 없는 기술자였던 그가 백남준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당시 다다익선 작품의 TV를 협찬한 삼성전자가 백남준에게 이정성씨를 추천해서였다고..그는 백남준과 작품을 할 당시, 작가에게 재차 설명을 요구하거나 의문을 달아본 적이 없다고 했고, 못 알아보는 기호가 적힌 메모를 받아도 걱정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와 백남준은 밥을 먹다가도,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다가도 작품에 대한 아이디어와 계획을 늘 공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현재 국내에서 유일하게 백남준의 작품을 다룰 줄 아는 비디오 아트 기술자이며 백남준이 스케치하고 이정성이 만든다’ 고 할 정도로 백남준의 아이디어는 그의 손을 거쳐 현실화됐고, 백남준의 작품 전시가 열리는 곳에는 늘 그가 참여하였다. 그는 ‘가족같은’ 백남준의 작품과 함께 해온 시절이야말로 언제나 행복했다고 말했다. 

“선생님 상상 속의 기계를 내가 멋진 작품으로 만들고 사람들이 열광했어요.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보람이 있었습니다.” 


4.solvey kall

백남준의 후원자이자 경제의 그림자이다. 1982년 뉴욕 휘트니미술관에서 열린  ‘백남준의 회고전’에서 처음 만나 단번에 백남준의 작품에 매료되었는데 당시 백남준이 모든 작품을 빌려온 TV로 만드는 까닭에 전시 후 돌려주고 나면 그의 작품으로 남는 게 없는게 안타까웠기 때문에 후원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화랑 건물에 스튜디오를 마련해주고 TV와 전기회로 등 작품에 쓸 재료를 살 돈과 스튜디오 운영비도 지원해주었다. 또한 백남준의 작품이 평론가들의 관심을 받게 하도록 도와주었다.


●시간을 지휘하는 예술가 백남준 그리고 현재의 고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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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생애를 정리하는 것은 그의 삶의 방식에 비추어 합당하지 않다. 백남준은 직선적으로 흐르는 시간을 살지 않았다. 백남준은 새로운 테크톨로지에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술과 테크놀로지의 관계에 있어 진짜 관건은 너무나 빠르게 진보하는 테크놀로지와 전자매체를 인간화 하는 일이라고 백남준은 강조하였는데 ‘기술의 인간화’란 단순히 인간은 주체이고 기술을 객체라는 이분법적 구도가 아니라 발전하는 테크놀로지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또 하나의 소외와 단절을 경계하면서 인간이 서로에게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가는 데 테크놀로지가 주체적으로 기여하는 것. 이것이 백남준이 말하고자 했던 기술의 인간화이자 백남준이 예술로서 성취하고자 했던 궁극이다. “한편에 예술이라 불리는 것이 있고, 다른 한편에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있다. 가끔씩 그 둘이 그리는 곡선이 교차한다… 그 지점에 사과 씨앗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주체이며..어쩌면 우리의 꿈일지도 모른다."


현재 국내에선 경기도 용인에 백남준(白南準)의 작품 세계와 예술혼을 기리기 위해 경기도와 경기도문화재단이 2007년에 착공하여 2008년 초에 완공된 ‘백남준 아트센터’가 운영되고 있다. 주요 작품 《삼원소》, 《TV물고기》, 《TV시계》, 《로봇 456》 등의 작품을 전시,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백남준 아트센터가 경기도의 지원 예산이 크게 줄면서 파행 운영되어지고 있다. 2층은 조명이 꺼져있고 벽에는 작품이 걸렸던 흔적만이 남아있다. 작품 30여 점이 전시되어 있던 한 층 전체가 문을 닫았다. 공공미술관인 백남준 아트센터는 예산의 80% 가까이를 경기도 지원에 의존해오고 있다. 그런데 경기도가 재정난으로 지원액을 줄이면서 미술관 전시 사업비도 2년만에 반토막 나 버렸다. 결국 예산은 바닥났고, 미술관 절반은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또한 작품이 미디어 아트이다 보니 고장이 날 때가 많고, 다다익선의 경우만 해도 노후된 브라운관을 교체해야 하지만, 더 이상 생산이 되지 않는 제품이라 구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소장한 공공기관이나 소장자들이 작품의 보수과정에서 원작을 훼손할 위험성이 또한 크다. 백남준의 기술관리자 이정성씨는 "작품관리에 어려움은 있겠지만 고장난 상태로 꽤 오랫동안 지속되고 있는게 이것은 너무 심한게 아닌가 생각한다. 백남준의 사후, 작품 수리에 관한 문의가 많아졌다.”고 인터뷰하였다.


세계의 많은 이들이 백남준을 일본의 작가로 알고있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백남준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예술가이다. 그에게 항상 따라붙는 수식어이기도 하다. 한국에서 직접적인 미술교육을 받거나 생활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정서에는 언제나 한국적인 혼이 있었다. 백남준의 세계적인 명성은 과장이 아니라 실제로도 독보적이어서 이름난 미술관 치고 그의 작품 한두 점이 없는 곳이 없다고 한다. 한국이 낳은 예술가이니 우리는 그의 작품을 지키고 꾸준히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백남준의 작품을 둘러싼 기계적 환경을 생각하여 소장되어있는 곳에서 비디오아트의 역사의 일부로서 작품이 변해가는 과정과 현재 보존하고 있는 상태들을 꾸준히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점검을 할 겸 주기적으로 작품을 틀어주고 레이저 디스크 방식을 DVD로 변환하는 것이 필요하다. 백남준 작가 스스로 살아 생전에 “ 내 작품은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새 옷으로 갈아입으면 된다. 사람이 아프면 병원에 가듯이 모니터가 망가지면 새것으로 바꾸어도 된다.”라고 하기도 하였다. 현재 상황에서 유일하게 실현 가능한 대안은 모니터 교체”라고 주장했다. 현재 백남준 작품의 수리 권한을 일임받은 이정성씨의 나이는 올해로 71세이시다. 향후 이정성씨를 대신할 인력이 없다는 것 또한 작품의 보존에 큰 문제라고 여겨진다. 하루 빨리 미디어아트 작품의 보존과 전시에 대한 기준이 마련되어져야 하지 않나 싶다. 그래야 우리의 백남준이라고 세계에 떳떳히 말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백남준 아트센터 www.njpartcenter.kr 

백남준 문화재단 www.namjunepaik.org

네이버 캐스트 <시간을 지휘하는 예술가, 백남준>

더 많은 백남준의 작품들을 보고싶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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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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