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은 시간을 초월한다. 무언가에 강렬하게 압도당하는 감정은 현실의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극장을 찾는다. 무대는 이야기와 연출, 배우의 연기와 퍼포먼스뿐 아니라 일상에서 접하기 힘든 감정 또한 제공하는 공간이다. 특히 뮤지컬은 음악이란 언어로 캐릭터가 처한 상황과 감정을 표현하며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몇 년이 지나도 절대 잊히지 않는 노래와 무대, 연기가 마음에 맺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4년 만에 돌아온 뮤지컬 <서편제>가 그러한 작품이다. 대한민국 창작 뮤지컬 역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서편제>는 2022년 원작 계약 종료와 함께 막을 내렸었다. 하지만 작품을 다시 보고 싶다는 수많은 성원에 힘입어, 원작 사용에 대한 재계약이 이뤄지며 2026년 다시 무대로 돌아왔다. 2026년 4월 30일에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막을 올린 작품은 7월 19일까지 공연된다.
K-뮤지컬 대표 레퍼토리로서 대중성과 흥행성을 증명해 온 <서편제>는 전통 소리, 발라드, 록, 팝까지 여러 음악적 색채가 어우러진 귀가 황홀해지는 뮤지컬이다. 윤일상 작곡가의 넘버 ‘살다 보면’과 판소리 다섯 마당 중 하나인 ‘심청가’의 한 대목이 대표곡인 극은 서로 다른 장르를 한 작품 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서편제>만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었다.
소리꾼 가족의 유랑과 선택, 소리를 둘러싼 집착과 사랑, 상처와 화해를 다룬 <서편제>는 ‘한’을 중심 정서로 내세우며 가장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보여준 극이다. 2010년 초연 당시 한국적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서편제>의 등장은 당시엔 무모한 도전이었다. 한국 창작 뮤지컬임에도 애국적인 정서를 담지 않은 <서편제>는, 서양 배경의 대형 라이센스 뮤지컬들이 흥행을 주도하던 2010년만 해도 시장에 자리 잡기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작품은 초연 후 십여 년간 여러 차례 재공연을 거치며 관객층을 넓혀 왔다. 이젠 K-컬처가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다양한 소재로 작품들이 제작되며 ‘낡음’이 ‘새로움’과 ‘신선함’으로 탈바꿈한 시대가 됐다.
이처럼 시대 변화와 더불어 한국 창작 뮤지컬 시장의 성장과 함께 발전을 거듭해 온 뮤지컬 <서편제>는, 그동안 작품을 함께 만들어온 주요 창작진이 다시 힘을 모았다. 예술감독 이지나, 작곡 윤일상, 대본·가사 조광화, 음악슈퍼바이저 김문정, 안무 남수정, 국악감독 이자람 등 <서편제>의 역사를 써온 창작진이 다시 모여 새로운 소리를 그려나가고 있다.
<서편제> 주인공 ‘송화’는 우리 안의 고향과도 같은 정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오직 소리가 인생의 전부였던 송화는 두 눈을 잃는 비극을 맞이하지만, 그럼에도 생 후반부에서 자신만의 소리를 찾으며 예술적 경지에 오르는 인물이다. 초연부터 함께해온 이자람과 차지연이 이번 시즌에도 송화 역할에 이름을 올렸다. 소리꾼 이자람은 국악감독 또한 겸하며 작품의 대표 얼굴이 됐고, 판소리 인간문화재 외조부를 둔 차지연 또한 특유의 한이 서린 음색과 무르익은 연기력으로 송화의 여정을 이끌고 있다.
<보니 앤 클라이드>, <마리 퀴리>, <팬레터> 등의 작품에서 폭넓은 캐릭터 스펙트럼을 증명한 이봄소리가 새로운 송화로 합류했다. 걸그룹 스테이씨(STAYC) 멤버 시은 또한 아역배우 때부터 쌓아온 연기력과 풍부한 무대 경험을 바탕으로 <서편제> 무대에 올랐다.
시은과 페어를 이루는 ‘노년 송화’ 역의 신설이 2026년 <서편제>의 가장 큰 특징이다. 노년 송화 역엔 소리꾼 정은혜가 캐스팅됐다. 7세부터 판소리를 시작해 장기간 수련을 이어온 정은혜는 소리꾼, 배우, 작창가로서 여러 영역에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최근 막을 내린 뮤지컬 <몽유도원>에서 강렬한 연기와 노래를 선보였던 정은혜가 부르는 ‘심청가’ 또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들고 있다.
송화 동생 ‘동호’는 아버지와 송화를 떠나지만, 기나긴 방황 끝에 다시 소리와 송화에게 돌아오는 인물이다. 송화가 고향이라면, 동호는 고향을 거부하며 떠돌다가 결국엔 돌아오는 ‘귀향’을 상징한다. <팬레터>, <와일드 그레이>, <랭보> 등의 작품으로 큰 사랑을 받아온 김경수, <렌트>, <도리안 그레이>, <클로저> 등 다양한 무대에서 활동해 온 유현석이 이번 시즌의 새로운 동호로 합류했다.
2022년에 이어 2026년에도 소리꾼 김준수가 동호로 참여한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유산 판소리 ‘수궁가’ 이수자이자 국립창극단 간판스타였던 김준수는 창극, 뮤지컬, 연극까지 활동을 확장하고 있다. 2022년엔 소리꾼인 김준수가 소리를 거부하고 서양 문화에 이끌리는 동호로 캐스팅된 것, 소리꾼 이자람과 페어를 이루며 정통 소리를 들려준 것에서 화제가 된 바 있다.
송화와 동호의 아버지 ‘유봉’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소리의 꿈을 자식에게 강요하는 불행한 아버지다. 뒤틀린 부성과 광기에 가까운 소리에 대한 집착은 송화의 눈을 멀게 하고, 가족을 절망에 빠트린다. 유봉 역엔 초연부터 작품과 호흡한 서범석, 2022년에 이어 또다시 참여한 김태한, 새롭게 이름을 올린 박호산까지 합류하며 각기 다른 얼굴의 부성을 선보이고 있다.
이자람은 과거 인터뷰에서 아버지에 의해 눈이 먼 송화를 피해자로 그리는 것이 아닌, 절망을 딛고 소리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는 예술가로 표현해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서편제>는 쉽사리 이해하기 힘든 소리에 대한 열망, 생을 불태우는 예술혼을 가장 극적인 상황에서 보여주며 극한의 카타르시스를 만든다. 응축된 한의 정서가 깨달음으로 변하는 하이라이트이자 피날레 ‘심청가’에선, 눈은 멀었지만 예술엔 눈을 뜬 송화와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