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예전부터, 나는 스스로를 ‘종교적 인간’이 아니라고 정의해왔다.
이것은 무신론자, 혹은 불가지론자라는 갑작스러운 선언이 아니다. 무형의 절대적 존재에 대한 인류의 오래된 믿음 자체는 흥미로우나, 나 자신이 신을 믿고 의지하기에는 의심이 너무 많으며 그를 구심점으로 하는 집단에 속하기에는 너무 개인주의자인 탓에 종교를 삶의 일부로 들일 수 없었다는 말이다.
돌이켜보면 내가 생각했던 종교적 인간이란, ‘초월적 인간’이었다. 죽음 혹은 그 너머의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는, 평온하고 초연한 존재. 그렇기에 종교는 언제나 내게 어렵게 느껴졌다. 어떻게 자신을 갈고 닦아야 그런 존재가 될 수 있을까? 나의 정의는 일종의 개인적 갈망이기도 했다. 갈망이 곧 부재의 증거라고 하던가. 약하고 불안한 인간인 나는 역설적으로 항상 초연한 존재가 되기를 바랐다.
동시에 그런 굳건한 (절대자에 대한 것이기 보다는 나 자신에 대한 것에 가까운) 믿음이 내 안에 존재할 리 없다고, 건널 수 없는 강 너머의 것으로 생각했다.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 Dialogues des Carmélites>,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정영란 옮김
하지만 좋은 기회로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 Dialogues des Carmélites>를 읽게 되었다. 가톨릭 신자도 아닌, 굳이 따지자면 불가지론자에 가까운 내가 제목부터 종교 문학이라는 뚜렷하고 강력한 베일을 쓰고 있는 책을 읽은 것은 손에 꼽을 일이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얇고 작은 책. 다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종교 너머 인간 본연의 약한 나를 마주하는 보편의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지금부터 가톨릭 문학의 거장,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유작,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자 한다.

조르주 베르나노스 Georges Bernanos (1888-1948), Britannica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Journal d’un curé de campagne>, <사탄의 태양 아래 Sous le soleil de Satan> 등의 작품으로 20세기 프랑스 문단에 돌풍을 일으켰던 조르주 베르나노스 Georges Bernanos는 1948년,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 육필 원고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베르나노스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화 대사 집필을 맡아 시나리오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1794년 프랑스 대혁명 중 공포정치 시기의 말미에 있었던 콩피에뉴 가르멜 수도원의 수녀들의 순교 실화를 다루고 있다.
독일 작가 게르트루트 폰 르포르의 중편소설 <단두대의 최후 여인>을 원전으로 하여 실제 역사와 가상인물을 적절히 차용하였는데, 장면의 구성과 풍부한 영적 대화는 베르나노스가 독자적으로 풀어낸 것이다. 특히 주인공, 블랑슈 들라포르스를 통해 베르나노스가 최초의 작품부터 말해왔던,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영적 유언’과 같은 대주제를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Glyndebourne Opera poster image, 2023
‘블랑슈’는 처음부터 끝까지 공포를 느끼는 인물이다. 태생부터 블랑슈의 삶을 지배했던 두려움과 불안은 단두대 아래 마지막 순간까지도 블랑슈와 함께한다. 그녀는 그 공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후작인 아버지와 기사인 오라버니에게 가르멜 수녀원으로 들어갈 결심을 고한다.
하지만 ‘그리스도 임종 고난의 블랑슈 수녀’라는 (그녀의 앞날을 예견한) 수도명을 가지고 피난처로 선택한 수녀원에서 조차, 블랑슈는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어린 소녀에 불과하다. 게다가 이미 대혁명의 거센 불길은 수녀원까지 번지고 있었다. 이미 처단의 대상인 귀족 출신에, 수녀가 되어서도 종교 탄압의 대상이 된 블랑슈는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갈등하고 고뇌한다.
결국 새 원장과 강생의 마리아 수녀의 주도하에 가르멜의 수녀들은 순교 서원을 내게 된다. 그러나 블랑슈는 겁을 먹고 혁명 당원들이 일으킨 소동에 혼란을 틈타 도망친다. 하지만 1794년, 아버지인 후작 들라포르스까지 처형으로 잃고 혼자가 되어 저택에서 하녀로 간신히 살고 있던 블랑슈는, 콩피에뉴 가르멜의 수녀들이 체포되어 처형된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마침내, 블랑슈는 군중들을 헤치고 나와 자신의 순교를 향해 걸어 나간다.

Carole Parodi, 2026
블랑슈는 독자로서 공감할 수 밖에 없으며, 작품에 몰입하게 하는 중요한 인물이다. 21세기의 비신자 독자들을 ‘순교’라는, 어렵고 거룩하게만 느껴지는 결말과 공명할 수 있게 한 존재가 바로 블랑슈, 처음부터 끝까지 ‘공포 속의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약 200 페이지의 책 대부분은 수도원을 덮친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죽음의 은유 속 수녀들의 대화와 침묵들이다. 베르나노스가 그리는 수녀들은 흔들림 없는 거룩한 성인들이 아니라 혼란한 세태의 공동체 속에서 서로 갈등하며 죽음의 공포를 느끼는 존재들이다.
특히 블랑슈는 그 중에서도 가장 어리고, 약하고, 비겁하고, 흔들린다. 독자가 이입할 수 있는 가장 현대적 인간에 가까운 인물인 블랑슈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결국 다른 수녀들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순교 서원을 위해 죽음을 맞이한다.

Richard Hubert Smith, 2023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는 신앙 승리담, 환희로 가득한 종교 텍스트가 아니다. ‘거센 권력의 바람이 삶을 통제하려 들 때, 두려움을 느끼는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반(反)영웅적 서사의 제시이다.
여기서 우리는 베르나노스의 ‘영적 유언’이라 수식 받는 이 작품에 깔린 정치적 함의도 느낄 수 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모두 겪은 이 가톨릭 작가는 이념과 국가가 인간의 공포와 양심을 그들 발 아래에 두고자 하는 상황을 과거 혁명기에 이루어졌던 수도원 탄압에 비유한다.
다만 이는 단순히 프랑스 혁명과 혁명정부 자체를 비난하는 게 아니라, 근현대의 문명 전체와 정치 폭력 자체를 아울러 지적하는 것에 가깝다. 20세기 파시즘을 온몸으로 겪었던 그는 전체주의에 강하게 반대했으며 자본주의, 공산주의, 기술문명에 대한 진보적 낙관주의 모두를 비판했다. (Steven Huebner, 2016)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민주주의나 독재, 자본주의나 공산주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문명의 문제이다. The problem facing us today is not a problem of ... democracy or dictatorship, capitalism or communism. ... It is a problem of civilization.’ - Bernanos, ‘Why Freedom?’
‘악은 기계에 있는 게 아니라, 기계 문명이 만들어내는 인간 유형에 있다. 기계는 인간의 힘을 괴물처럼 증폭시키는 동시에 인간의 정신성을 말살한다. The evil is not in the machines but will be in the kind of person that machine civilization creates. The machine de-spiritualizes man at the same time that it monstrously increases his power.’ - Bernanos, ‘Revolution and Liberty’
FRANCIS POULENC’S ‘DIALOGUES DES CARME¤LITES’: FAITH, IDEOLOGY, LOVE (Steven Huebner, 2016) 논문 발췌.

Metropolitan Opera, 2023
어쩌면 혹자는 결국 블랑슈가 죽은 것 역시 공동체 때문이며, 공포에도 불구하고 결국 순교해야 했던 상황이 베르나노스가 그토록 비판하는 전체주의의 집단성과 다를 바 없다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수녀들의 순교가 전체주의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인간 개개인의 공포와 양심을 지우지 않고 완전히 드러내 보이는 데 있다. 전체주의가 집단과 자신을 동일시 하는 확신에 찬 강인한 영웅을 내세워 자기희생을 강요하고 미화한다면, 베르나노스가 제시하는 인물들은 그 도식과는 꽤 거리가 멀다. 노쇠한 원장 수녀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고통스러워 하고 두려워한다. 혁명 당원 무리가 수도원의 문을 두드렸을 때 가르멜의 수녀들은 모두 동요하고 불안해하며 서로 갈등한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블랑슈는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두려워하고, 기어코 신앙조차 흔들려 수녀원에서 도망치기까지 하는 인물이다. 그러나 블랑슈는 돌아온다. 이념에 압도되어서가 아니라 자유의지로, 두려움을 이겨낸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끝까지 가엾은 인간의 모습으로 순교에 임한다.

Metropolitan Opera, 2023
베르나노스가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를 통해 제시하는 본질, ‘공동체의 유대를 바탕으로 한 대속적 Substitutionary 순교’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블랑슈가 죽음으로써 함께 연대하고자 했던 공동체는 국가나 혁명정부와 같은 거대한 집단이 아니라 ‘서로의 공포를 알고 있는 약한 빈자들의 공동체’인 것이다. 더구나 강인한 성인의 순교가 아닌 가장 멸시 받고 핍박 받으며 겪는 인간으로서의 죽음은 어쩌면 블랑슈가 쫓고자 했던 그리스도의 죽음과 가장 닮아 있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한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마지막 장을 넘긴 후, 나는 이 책이 종교 너머의 연약한 인간성을 꿰뚫는다고 느꼈다. 아니, 더 정확히는 ‘오히려 철저히 가톨릭적이기에, 인간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 속에서 신의 은총을 발견하는 것’에 가깝다고 느꼈다.
나는 종교에 관해 많은 것을 오해하고 있었다. 종교적 인간이 되는 것은, 확신에 찬 신앙심으로 모든 두려움을 이기고 나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게 아니었다. 종교적 인간은 초월적 존재가 아닌, 절망과 공포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가장 인간적인 존재였다. 블랑슈는 결코 초월한 인간이 아니었다. 강한 신앙인이 아니었을 뿐더러 어떤 경우에서도 초연하고 평온해지지 못했다. 오히려 그녀는 불안 때문에 초월을 갈망하는 인간, 즉 현대의 우리를 아주 많이 닮아 있다.
베르나노스는 이러한 나약한 인간에 불과한 존재가 공동체와 양심을 위해 결국 행동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의 작품 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 굳건하고 거대한 종교가 사실 가장 약한 인간성과 맞닿아 있다는 진실. 그것이 오늘날까지 베르나노스의 글이 읽히는 이유이며, 우리가 <가르멜 수녀들의 대화>를 읽어야 하는 이유이다.
